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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교회 - (03). 깊이 있는 성화

고린도후서 3:18, 출애굽기 32:1-35, 출애굽기 33:1-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2-21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두 주일에 걸쳐, ‘피상성을 넘어서는 교회’ 그리고 ‘깊이 있는 회심’이라는 주제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성경이 가르치는 ‘깊이 있는 성화’라는 주제를 상고합니다.


1. 성화의 큰 그림 (레 19:2; 골 1:22; 요 17:17)
성경의 가르침에 뿌리를 내린 깊이 있는 교회는 한 마디로 경건한 어른이 많은 교회입니다. 경건한 어른은 깊이 있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완전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성화의 열매를 맺는 성숙한 성도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적다는 것이지요. 회심만 드물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매우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지만, 성화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한국의 많은 개교회들의 상황에서 성화의 열매를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둘은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화의 열매를 보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을 때(마 3:8) 그는 성화의 문제를 말한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그에 상응하는 삶의 변화와 열매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행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를 거듭나게 하신 성령님께서는 신자 안에 내주하시면서 그의 성품과 인격을 거룩하게 빚어 가십니다. 문제는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 현실 사이의 갭입니다. 말씀처럼 그 열매를 보기 쉽지 않습니다. 성화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레 19: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거룩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성경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엡 5:25-27; 히 10:10-13; 13:1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로새서 1:22).” 주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시기 전에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 17:17).”
성화는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뒤에, 성화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화도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다만, 성화가 칭의와 다른 점은, 사람 자신이 성령의 역사에 따라 행하는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화의 열매를 보기 어렵고, 경건한 어른이 드문 현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례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같은 은혜의 수단들을 등한시하며 살아가고 있고, 부정적으로는 회개를 통해서 죄와 싸우고 죄를 죽이는 일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들 개인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데에도 그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30-40년 동안 한국교회의 강단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성도들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만일, 성도 개개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들을 전혀 혹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녀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회심 자체에 의문을 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성화의 큰 그림 속에서, 그리고 특별히 은혜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설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은헤의 수단으로서의 말씀은 물론 설교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일 등이 다 포함되지만, 우리는 주제를 설교로 좁혀서 말씀을 상고할 것입니다.


2. 성도의 사귐과 성화
이 주제를 말하기 전에, 성화에 있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잠깐 짚고 가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다룬 주제인 회심도, 중생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일어나지만, 거기서 공동체의 역할이 또한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화에서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신 대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지만(요 17:17) 이것도 교회 공동체라는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만과 시기, 분노와 같은 치명적 죄악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잘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성품이 가정 환경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듯이, 신앙의 성품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경건한 어른이 적은 데에는 깊이 있는 교회의 부재라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좋은 품성과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기 위해서 좋은 가정이 필요하듯이, 경건한 어른들이 나오려면 깊이 있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것만이 결정적 이유는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공동체와 사귐의 주제는 다음 주일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3. 모세 얼굴의 광채와 수건 (빌 2:12-13; 출 32-34)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죄인을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성도를 낳으실 뿐 아니라, 그 말씀으로 신자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십니다. 정리하면, 성화는 은혜라는 동력으로 시작되고 진행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도의 영혼에 거룩한 소원을 주심으로써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주도하십니다(빌 2:12-13). 은혜의 수단들은 그 자체로 수단일 뿐입니다. 그것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동적으로 은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고, 그렇게 은혜를 받을 때 사람은 거룩한 변화를 이루어 가게 됩니다. 제가 성경읽기를 그토록 강조하고 기도저널이나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라는 훈련들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신자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일상이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제들을 다 다루지 않고(신앙과 성숙에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특별히 설교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성화와 설교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출애굽기 32-34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그 구약 본문을 배경으로 고린도후서 3장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이 지쳤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촉구합니다(출 32:1). 결국 아론은 백성의 부추김을 받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무서운 우상숭배를 지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산에서 모세에게 이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이 목이 뻣뻣한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에게 큰 나라를 만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거절하지요.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에 하나님은 맹렬한 노를 그치시게 됩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죄의 문제를 무섭게 다루지만, 하나님께서는 본성상 거룩하지 않은 백성을 멸하실 수 밖에 없으므로 함께 가지 않으시고 대신 천사를 보내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합니다. 모세의 기도에 결국 하나님은 함께 가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심지어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구한 그 기도에도 응답하십니다(출 33:18).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으로 다시 올라오라고 부르시고 모세를 반석 틈에 숨기시고 당신의 등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호와 성품을 선포하시는 일로써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40주야를 보내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에게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광채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채 때문에 두려워서 아론과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백성들이 모세 얼굴 보기를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났고 모세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얼굴에 수건을 써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그 영광의 광채가 빛나도록 하나님을 닮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둘째, 금송아지를 섬긴 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아론과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비친 영광의 광채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써서 반사된 하나님의 광채를 가려야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하나님의 영광을 살짝이라도 봄으로써 누릴 수 있었던 은혜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4. 성화와 설교 (욥 42:5-6; 고후 2:17; 4:2; 행 17:11; 히 4:12; 딤후 3:16-17)
이 두 요점은 성화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제가 고린도후서 3:18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아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 목회의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40주야를 산에서 보내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부분적으로라도 대면하여 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그 얼굴에서 광채로 나타났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신약의 성도들에게 적용합니다. 여기서 수건이 벗어진다는 것은 중생을 의미하는데, 중생한 성도들은 계속해서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 주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간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 열쇠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거듭 거듭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이미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합니다. 이것은 주의 영 곧 성령께서 성도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역사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인데, 복음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을 보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죄인의 마음에 비추심으로 죄인이 거듭나게 된다는 내용이 제가 지난 주일에 전했던 말씀의 주요 포인트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은, 이미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를 들을 때, 주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많이 쓰는 종교적 표현, ‘은혜 받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설교를 듣고 좋았다거나,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흐르는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은 무한히 크시고 영원히 불변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그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티끌이나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각성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조금 힘이 들면 하나님이 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 그럼 말은 쑥 들어가고 도리어 욥 처럼 회개를 하게 됩니다(욥 42:5-6).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가 일어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 설교를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또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바랐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거부감이나 불편함 없이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에 물을 타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전하게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전했던 것입니다(고후 2:17; 4:2). 여기에는 물론, 우리가 베뢰아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태도 뿐 아니라(행 17;11) 성령님께서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우리 심령을 각성하게 해주시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깊이 있는 결속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지게 되고, 이런 사람은 결코 피상성에 머물 수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브리서 4:12).” 이런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제대로 믿음으로 듣는다면, 사람은 결코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살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6–17).” 결국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해줍니다. 이 강단에서는, 그 능력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온전하고 바르게 선포되는 거룩한 강단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근거에서 참된 복음 설교야말로 깊이 있는 성화와 깊이 있는 교회로 가는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은혜의 수단들이 사소하고 별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 성도는 영적 나태함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전과 다르게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행하는데서 나아가 간절한 심령으로 이 은혜의 수단들을 붙잡고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은혜 받는 심령으로 살아가게 되고, 그럴 때 깊이 있는 신앙, 깊이 있는 성화, 깊이 있는 교회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 사건에서 배우는 첫번째 포인트,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룩하게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5. 거룩이 낳는 거룩 (마 25:29; 히 12:14)
두번째 요점입니다. 아론과 백성들은 두려워서 모세의 얼굴에서 반사되는 하나님의 광채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왜 두려웠했습니까? 금송아지를 섬겨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이 범죄는 악순환을 낳았습니다. 두려움이 모세 얼굴의 광채를 볼 수 없게 했고, 그래서 아론과 백성들은 거룩함을 입을 수 있는 변화를 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화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사소하게 여기고 살아간다면, 모세 얼굴의 광채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룩의 기회 조차 박탈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죄를 가볍게 여기고 살아가신다면, 아무리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을 성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는 일을 막고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반영하는 원리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태복음 25:29).”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를 받는 사람은 더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리고 더 은혜를 받습니다. 반면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십년이 흘러도 여전히 은혜를 받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말입니다. 매주일 교회 좌석을 달군다고 해서,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브리서 12:14).” 거룩한 자들이 주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은혜를 받아 거룩한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을수록 더 많이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고 영광에서 더 나은 영광에 이르는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19세기의 거룩한 사람 로버트 머리 맥체인에게는 '용서받은 죄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거룩함'에 이르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화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이런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언제나 양심을 청결하게 하고,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며, 구속 받은 죄인이 이 세상에서 도달하기에 가능한 만큼 지·정·의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가장 큰 현재의 행복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복지를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하며, 영원 속에서 가장 충만한 보상을 얻는다고 확신한다…나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나는 내 꿈과 마음에 오가는 생각들, 좋아하는 것, 종종 반복하는 행동들, 원수가 내뱉는 참소, 그리고 친구들의 질책이나 심지어는 농담까지도 살펴야 한다.”
만일 이런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아마 우리 대부분은 그를 불편하게 여기거나 피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우리가 그 형상을 닮아 거룩해지도록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의 형편은 맥체인의 바람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목사들 자신부터 그렇다고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 파이퍼가 2002년에 동료 목사들을 대상으로 쓴 책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좋은씨앗, 2005)는 점점 전문화, 직업화 되어가는 목회자들의 현실을 잘 지적하는 책입니다. 성도들 모두가 거룩을 추구하여야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고 성도의 모범이어야 할 목회자에게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강단에서 전문인으로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의 관계, 부모 자식의 관계 등 가정생활에서 목회자들이 거룩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모세와 같이,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솔직히 고백합니다. “제 사역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언제나 제 신앙과 고백을 이상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려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며, 기도와 감사와 권면과 위로하는 일에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너무나 자주 변화되는 상황에 제 자신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고된 일이며 불평을 일으키고 종종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저는 이제야 제가 영적으로 얼마나 불경하고 무정하며, 위선적인 마음이 동반될 수 있는지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 헤르만 바빙크, 신호섭, 제임스 에글린턴 저)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서서 기도를 시작하면 회중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는 목회자의 과업은 첫째는 좋은 설교, 둘째는 기도, 셋째는 심방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설교자의 과업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거룩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구호가 아니라 그가 강렬하게 추구하고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자와 설교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을 듣는 회중은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형상으로 변화되는 거룩한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날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왜 목사 자신에 대해서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금년 4월이면 목사로 안수를 받은 지 30년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10년 남짓의 시간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을 주 앞에서 좋은 목사로 살고 싶은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교회의 목사인 서목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6. 거룩한 목사, 거룩한 성도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거룩함은 목회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피 값으로 구원하신 모든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시대는 거룩의 기준이 바닥을 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죄를 심각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 않습니다.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을 불편하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런 깊이 있는 교회를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바랄 것은 깊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거룩을 추구하는 성도들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성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위한 거룩의 기준과 성도들을 위한 거룩의 기준이 별도로 있는 게 아닙니다. 위에서 제가 말한 거룩의 기준은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깊이 있는 교회는 거룩을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목사 자신도 한 사람의 성도이며, 모든 성도가 거룩을 추구하는 교회, 그 교회가 깊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는 가벼운 농담이나 재미있는 말들로 교제의 기쁨을 누리고 만족할 수 없는 교회입니다. 성도들은 그저 자신들의 지적 욕구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말씀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있는 교회는 성도들이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주의 영광을 보게하사 주의 형상을 닮게 하옵소서”라고 구하는 교회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강단에서 말씀을 잘 전하는 목사가 아니라, 거룩한 목사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의 목사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려는 간절한 기대와 열망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십시오. 우리 시대는 정말 거룩한 목사가 필요하고 거룩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경건한 어른들이 가득한 깊이 있는 교회를 보고 싶습니다.


7. 깊이 있는 회심과 깊이 있는 성화의 관계
지난 주일, 교회 안에서 회심이 현저하게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회심 없는 교회 성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다룬 주제인 깊이 있는 성화가 드물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실, 깊이 있는 회심과 깊이 있는 성화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회심이 일어났다면 깊이 있는 성화도 일어납니다. 물론 자동적인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깊이 있는 성화가 일어날 때, 참된 경건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게 될 때, 회심에 대한 열망도 커질 것이고 그것을 간구할 것이며 그 공동체 안에 있는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참된 경건을 보면서 회심하게 되는 역사가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회심과 성화는 이렇게 깊이 있는 교회의 두 날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회심과 성화, 이 두 가지 은혜를 구하며 깊이 있는 교회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