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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교회 - (02). 깊이 있는 회심

고린도후서 4:4-6, 사도행전 2:47, 베드로전서 1: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2-14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깊이 있는 교회] 시리즈로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네 번에 걸친 이 설교 시리즈의 구성은 이렇습니다. 오늘 두번째 주제는 ‘깊이 있는 회심’입니다. 그리고 세번째와 네번째로 ‘깊이 있는 성화’와 ‘깊이 있는 사귐’이 이어질 것입니다.
지난 주일, 교회는 피상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명제를 전반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깊어야 합니다. 아니, 깊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가벼움과 피상성의 바이러스는 교회 안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도전에 대항하여, 우리는 계속 성경적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8). 우리는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께 연결되어 성령 안에서 지어져 가는 성전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1–22).” 사도는 우리가 지어져 가는 성전이지, 우리가 성전을 짓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몫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는 ‘회심’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회심은 성령님께서 거듭나는 은혜를 주실 때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믿음과 회개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주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회심과 관련하여 사람에게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상고할 주제입니다. 오늘 제목인 ‘깊이 있는 회심’은 회심이 바른 회심이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회심을 중요하게 여기고 회심이 일어나기를 간구하는 깊이 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드러내는 깊이 있는 말씀이 선포되는 깊이 있는 교회라는 개념을 의미합니다.


1. 회심이 없는 교회 (행 2:47)
교회는 회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세례는 교회의 회원이 되는 표이기에, 등이 떠밀려서 받을 수 없고 전적으로 수세자 자신의 신앙 고백에 근거하여 행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울타리는 이렇게 참된 믿음과 신앙 고백에 근거하여 선명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믿음과 믿지 않음의 차이는 중요하고 이 울타리가 허물어지는 것은 교회의 타락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울타리가 선명하게 세워져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 울타리는 신앙의 본질이 아닌 종교적 신분의 울타리로 변질되었고, 많은 사람은 교회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구원을 확정하는 것 같습니다. 회심 없이 교회의 회원이 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까닭에, 교회는 세상 같은, 혹은 세상 보다 도덕적으로도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 교회를 향한 헤르만 바빙크의 일갈(一喝)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향한 꾸짖음으로 들립니다. “종교적 생활에 관하여, 미국의 도덕적 낙관적 이원론적 문화, 경험이 이끄는 문화가 엄청난 피상성을 초래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죄와 은혜의 대조는 심히 약화되었습니다. 거듭남과 성령님의 사역은 그저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설교는 대부분 도덕만 다룰 뿐입니다. 선택과 칭의와 같은 전체 신앙적 요소는 부족하거나 아예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제임스 에글린턴,『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신호섭 옮김, 도서출판 다함).
제 개인적으로 가지는 좌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의 중생과 회심을 모두 다 알 수는 없지만, 회심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일이 교회에서 현저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회심을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처음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묘사를 볼까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2:47).” 이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읽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회심이 일어나고 있는가? 회심을 통해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많이 묻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도 크게 염려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한 시대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중생과 회심이라는 이 중요한 문제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쓴 열매의 맛을 혹독하게 보고 있는 중입니다.


2. 믿음 대 속함 (요 17:14; 6:37; 10:16; 마 19:16-22)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믿음이 먼저입니까, 속함이 먼저입니까? 믿음은 신앙과 고백을 의미하고, 속함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질문을 다시 하면,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교회에 속하는가, 아니면 공동체에 속하게 됨으로써 참된 믿음을 가지고 신앙 고백에 이르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입니까, 속함이 먼저입니까? 전통적으로 교회는 믿음이 먼저라는 입장을 고수해왔습니다. 교회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정의는 믿음이 속함 보다 먼저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소위 경계집합적 사고(bounded set thinking)를 반영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가르는 울타리(경계 boundary) 안과 밖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의 사고가 교회를 정의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중심집합적 사고(centered set thinking)입니다. 이것은 울타리 대신 샘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의 설명입니다. “어떤 농업사회에서 농부들은 울타리를 세워 가축들을 보호한다. 이것이 경계집합이다. 그러나 농장이나 목장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호주 같은 나라에서는 울타리를 치기가 불가능하다. 여기서 농부는 샘을 파서 물을 공급하게 되는데, 그러면 가축은 길을 잃더라도 죽지 않으려고 절대 샘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중심집합이다. 깨끗한 물이 공급되는 한 가축은 샘 근처에 머문다.” (『새로운 교회가 온다』지성근 옮김, ivp). 샘은 그리스도입니다. 울타리는 물론 중요하지만, 샘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고 그 중심을 향하여 움직이며 살아가려는 태도 역시 중요합니다. 심지어 울타리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사람은 사실 그가 울타리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스스로가 울타리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도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거듭났지만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이런 울타리 사고방식(경계집합적 사고)은 우리가 거저 받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 그들’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어낼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만들어낼 수 있는 전형적 결과이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보여주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울타리, 경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세리와 창기,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환대하셨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울타리 안에 들어온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경계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우리와 그들을 대립적 구도로 이해하게 하기 보다, 그들에게 우리가 거저 받은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고 보여주고 싶어하는 관대함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입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중심집합적 사고는 도움이 됩니다. 중심집합적 사고는 우리가 일단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으니 영원히 울타리 안에 있을 것이라는 나태함과 방종을 경계하게 합니다. 내가 지금 샘에서 물을 길어 마시지 않는다면 나는 주님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내가 이 울타리 중심에 샘이 되시는 주님을 늘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울타리 밖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간절히 샘에 와서 물을 마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그들이 이 마르지 않는 샘에 와서 물을 마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마시고 있고 그 샘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 중에서 샘을 향하고 있고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환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중심집합적 사고는 소위 우리끼리 좋고 즐거운 삶을 향유하는데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이런 경계집합적 사고와 중심집합적 사고를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믿음이 속함보다 먼저다라고 말하는 것은 원리는 맞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더 유연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두 가지 사고가 같이 가야 할 필요가 있고, 성경은 이 두 가지 점을 함께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울타리-경계는 중요합니다. 교회는 교회이고 세상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4).”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과 교회는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내게로 오는 자’는 지금 울타리 밖에 있습니다. 거기서 샘이신 주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환대하십니다. 또 주님은 양과 목자의 비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한복음 10:16).” 주님은 아직 ‘이 우리(울타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에 든 양들은 그 양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에 아무나 들어와도 좋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주님께 왔던 부자 청년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태복음 19:16).”라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스스로 십계명을 잘 지킨다고 여겼고 어쩌면 주님의 칭찬을 바라고 주님께 왔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이렇게 청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 주님은 청년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샘이신 주님께 나아오려는 것인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근심하며 갔습니다(마 19:22).’ 주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단지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샘을 버린 것입니다. 그는 샘이신 주님께 오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 오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주님께 오는 자는 주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인정을 얻거나, 주님을 이용하여 더 나은 종교적 삶을 보장받거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 청년을 교회 안으로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적용해봅시다. 우리는 교회의 멤버십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새가족과정 6주 동안 다루는 여섯 가지 주제 가운데 하나가 멤버십(교인됨)이고 또 하나는 자기 영혼 점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싶다고 하는 분들을 교회로 영접합니다. 그분들은 새가족과정을 통해서 교회에 속하게 됩니다. 물론 분명한 회심과 신앙 고백에 이르기까지는 준교인에 머물게 되겠지만, 교회에서의 삶에는 어떤 제약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없거나 샘이신 주님께 나아와 샘물을 마시고 싶어하지 않는 분들까지 영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회심하지 않았을지라도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예배와 교제를 경험하면서 회심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돕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교회에서 세상이 보여줄 수 없는 삼위 하나님과 그 안에서의 사귐을 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정한 영적 공동체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영적 사귐을 드러내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이땅에 소위 혈연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외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소위 가족교회라는 게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3. 깊이 있는 말씀 (롬 10:17; 약 1:18; 벧전 1:23; 롬 1:16)
그러나 교회 자체의 경험이 훌륭하다고 해도 교회의 경험이 회심을 만들어 내거나 새 생명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믿음이 발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롬 10:17). 또 야고보서는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8).”고 말씀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어떻게 말씀했습니까?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23).”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입니다. 우리가 위의 세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십니다. 이렇게 거듭남은 성령님의 단독적 사역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불신자들이 처해 있는 영적 상황은 이 세상의 신인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상황입니다(고후 4:4).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 종된 것을 전파한다고 말씀합니다(고후 4:5). 복음을 전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쓴 대로, 복음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6).”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고린도후서 4:6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죄인의 마음에 비추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중생 곧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마치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시자 흑암 속에 빛이 비추었던 것처럼(창 1:3), 칠흑같이 어두운 죄인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추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요 주님으로 보고 믿고 고백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눈 어두워 구주를 보지 못하는 죄인이 이렇게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서 영안이 열려 주님을 뵙게 되고 주님께 나아와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인을 자기 자녀로 낳으시는 진리의 말씀이고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4:6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말씀은 사실, 설교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바울 사도는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마귀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온전한 복음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포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죄인의 영혼 안에 비추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고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은, 이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언제나 선포되게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거듭나고 회심하는 역사들이 매주일 마다 일어나도록 말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엡 6:19; 살후 3:1)
교회는 주님이 세우십니다. 그러나 우리 몫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의 몫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고 듣는 것입니다. 목사의 직분을 말씀의 직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목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고 바르게 전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목사들은 이 일을 대충 할 수 없습니다. 목사에게 이 일보다 우선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목사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정도의 능력과 은사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찰스 스펄전이나 로이드존스와 같은 목사들이 있는가 하면, 평범하지만 영광스럽게, 무명하지만 능력 있게 쓰임 받은 목사들이 역사상 적지 않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는 설교자가 더 큰 은사를 지니지 못했다는 데 있다기보다, 그가 받은 은사를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언제나 두려움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어도, 그 한 달란트를 제대로 충분히 온전하게 사용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여러분의 영혼이 배불리 먹지 못함으로 주리고 야윌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 이 일은 그저 목사가 열심히 하고 성실히 하기만 하면 되는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았던 바울 사도는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에베소서 6:19).” 사도는 종종 이렇게 자신과 자신의 말씀 사역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그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데살로니가후서 3:1).”
강단 사역에 대한 문제는 다음 주일에 좀더 많이 말씀하겠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서목사와 저에게 말씀을 주시기를, 말씀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해주십시오. 주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서는 물론이고 온 세상에 널리 영광스럽게 퍼져 나가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저희들은 사도 바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더 여러분의 기도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 두렵기 그지 없습니다. 그저 공부하고 연구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찬연하게 빛나는 말씀을 매주일, 수요기도회와 새벽기도회에서 깊고 풍성하게 전할 수 있도록 그 말씀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주십시오. 또 그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성령의 능력에 붙잡혀 선포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렇게 말씀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가운데 비추사, 죄인들이 거듭나고 회심에 이르게 되며, 믿는 자들은 더욱 깊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기대함으로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신실하고 바르게 전하고 말씀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믿음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듣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고 책임입니다. 존 파이퍼는 이런 예화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깊고도 맑은 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가? 그 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큰 두레박을 가지고 물을 떠다가 샘에 옮겨 붓는 것이 아니다. 그 샘을 영화롭게 하려면, 그 샘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또 마심으로써 즐기고 만족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가벼운 회심이 아니라, 깊이 있는 회심, 진정한 회심이 일어나는 깊이 있는 말씀이 거침없이 선포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회심이 다만 교회의 몇몇 사람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온 교회의 관심사이고 온 교회의 기도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더해지는 교회 말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교회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교회를 새롭게 하사, 조롱을 칭송으로 바꾸시고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 주시는 날을 주시기를 간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