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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교회 - (01). 피상성을 넘어서는 교회

마가복음 12:28-34, 마태복음 13:20-21, 창세기 3:7, 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2-07

말씀내용
1. 주제 설명: ‘깊이 있는 교회’ (계 21:2; 계 2-3)
오늘부터 네 번에 걸쳐 여러분에게 전할 설교의 큰 주제는 [깊이 있는 교회(Deep Church)]입니다. 이 용어는 C.S.루이스가 자신이 속해있던 영국성공회 교회가 저교회(Low church)와 고교회(High church)를 통틀어 초자연주의를 아우르는 이름으로 선택한 용어로, 짐 벨처(Jim Belcher)가 쓴 책, 『깊이 있는 교회』(2009)의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깊이 있는 교회’라고 할 때, C.S.루이스나 짐 벨처가 말한 의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용어가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고 제가 갈망하는 교회의 한 요소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해서 이 용어를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여정에 있는 교회입니다. 완성된 교회나 이미 목적지에 이른 교회가 아닙니다. 지어져 가는 교회이기에 부족함을 많이 경험합니다. 완성된 교회는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완성된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고,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계 21:2).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지상의 교회는 빌립보교회 처럼, 시기와 질투가 있고 다툼의 문제도 있습니다. 또 고린도교회 처럼 추종하는 지도자나 은사로 의한 분열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본 일곱 교회도 거짓 가르침, 도덕적 탈선, 배교 등 문제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물론, 책망 없이 칭찬만 받은 서머나교회나 빌라델비아교회가 있지만 그들도 아무 문제가 없는 교회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도 그런 교회 가운데 하나로 더 온전하고 거룩한 교회로 지어져 가는 중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온전한 교회로 지어져 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우리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교회에 대한 어떤 갈망이 있으십니까? 저에게는 교회에 대한 깊은 불만족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불만족은 대학생 시절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지금도 여전합니다. 저는 성향상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래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갭 때문에 괴로움을 많이 겪는 편입니다. 성경이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는 점에서 이상주의적으로 읽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이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사는 자들을 위한 말씀이기에 현실주의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저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만족을 불평이 아니라 갈망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 중 다수는 오랜 세월에 걸쳐 ‘교회 생활을 하는 법’에 익숙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결속이 없어도 소그룹에 속해서 살아가는 법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교회 생활을 문제 없이 잘 하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만족 되지 않는, 그런 갈망이 있지 않습니까? ‘깊이 있는 교회’에 대한 바람이 저만의 갈망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깊이는 관계의 깊이입니다. 하나님 그리고 형제들과의 깊은 결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주셨고 성령님을 통해서 경험될 수 있는 일종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과의 결속과 형제들과의 결속은 구별되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결속을 누린다면, 사람들과도 깊은 결속을 바라고 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의 깊이는 결국 우리 자신이 가지는 영적 깊이와 무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깊이 있는 교회] 시리즈에서 주의 말씀을 토대로 이런 질문, 갈망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3년 전인 2008년, [결속을 막는 죄의 성향]이라는 주제로 네 차례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금 이 시리즈를 들으시면서, 홈페이지에서 그 설교들을 찾아서 함께 들으신다면, 교회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큰 유익을 얻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 피상성을 부추기는 시대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저주거리이다”라는 인상적인 말로 1장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그는 1978년에 이 책을 처음 출판했는데 4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상황은 여전합니다. 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알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미국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께 편지를 쓰면 도착하는 데만 꼬박 두 달이 걸렸습니다. 볼펜으로 편지를 써서 완성하는 일은 대개 한 번에 끝나지 않았고 며칠이 걸리곤 했습니다.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치면, 두 달 쯤 뒤에 도착했고, 그 편지를 읽고 또 일주일 걸려 편지를 써서 보내면 두 달 후에 답장을 받습니다. 두 세 번 편지가 오가면 1년이 갔습니다. 그래서 행간을 읽었고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소위 묵상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메일이라는 신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놀랍게도 전세계 어느 곳이든 전화선으로 인터넷만 연결할 수 있다면, 한 순간에 편지를 쓰고 지구 반대편에서 바로 그 시간에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혁명적 변화였습니다. 지금은 이메일도 구시대의 산물이 되었고, 문자 메시지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마저 내가 보낸 문자를 읽었는지의 여부도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기다림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SNS의 유행은 생각하고, 기다리고, 묵혀서 뭔가를 내놓는 일들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주 목회서신에 썼듯이, 유튜브는 우리 시대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정보를 얻는 사람들은 차분히 기다릴 수 없어서, 1.5배속, 심지어 2배속으로 돌려 보며 정보를 얻어냅니다. 이런 기술들이 가져온 순기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현상들은 행간을 헤아려 읽을 필요가 없고 읽을 능력도 없는 피상적인 사람들로 우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3. 피상성과 영적 거리두기(마 13:20-21)
세상은 그렇다고 칩시다. 문제는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고 교회가 피상적인 교회들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묵상이 없고, 깊이 읽고 깊이 들으며 깊은 결속의 관계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문화적 현상들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려해야 할 역기능과 악영향은 생각보다 크고 또 깊습니다. 그것은 영적 거리두기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과 교회 즉 영적 가족들과의 거리두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거리두기가 나타났습니다. 영적으로 피상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대하여 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깊이가 얇다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을 깊이 꿰뚫고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 비유 가운데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 이런 경우를 언급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태복음 13:20–21).” 이는 피상적인 사람의 전형입니다.
영적 거리두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교제와 사귐도 일반적으로 피상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성인 100명이 좀 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누가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남남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경험되는 현실입니다. 피상성이 가져온 영적 거리두기는 결국 ‘나 홀로’ 신앙의 바이러스를 교회 안에 뿌려놓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감염이 되고 말았습니다. 피상적 세상의 문화는 성경 읽기와 묵상, 예배와 설교, 영적 독서, 신앙의 성화와 성숙, 성도의 교제와 같은 교회의 거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쳐서 피상적인 교회들을 낳은 것입니다.


4. 피상성은 죄의 성향이다(창 3:7,10).
하지만, 피상성은 단순히 시대나 문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성향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경험한 것은 수치감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세기 3:7).” 부끄러울 것이 없던 부부 사이에 숨기고 가려야 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부부관계 또는 인간관계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아담을 찾으시자, 아담은 숨어서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창 3:10).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왔습니다. 죄가 가져온 두려움과 수치감은 범죄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지닌 DNA가 되었고, 인간은 가슴 깊은 곳에서는 결속을 바라면서도 자신을 숨기고 가려야 하는 죄의 본성 아래 머물게 된 것입니다. 남이 들어올 수 없도록 자기 성을 쌓고,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도 안에서만 움직이며, 문제가 보여도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 그저 좋은 말만 하면서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만 지내려고 합니다. 이런 죄의 성향이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 안에서 우리가 깊이 결속된 관계로 나아가는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5. 죄의 결과를 뒤집는 구속
하지만 모든 인간 안에는 결속에 대한 갈망이 다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속은 죄가 초래한 결과를 뒤집고,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한 것입니다. 구속은 죄의 성향인 피상성—영적 거리두기—을 죽이고 하나님과의 결속과 형제들과의 결속을 회복하게 한 것입니다. 구속 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찢어진 성소의 휘장 안으로,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무너진 장벽을 넘어 성령 안에서의 하나됨, 형제들과 깊은 영적 결속을 누리게 된 사람입니다. 이 구속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물론 여전히 죄의 성향과 싸우면서 이 결속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6. 주님이 가르치신 신앙의 중심은 관계와 결속이다(마 22:40; 5:23-24).
이제 본문을 살펴봅시다. 한 서기관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8)?” 주님의 대답이 29-3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사실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40).”고 하신 것입니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가 달려있다는 뜻이고, 구약 전체가 이 두 계명으로 정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라. 이것이 율법이고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 지혜,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대충 알고 대충 좋은 관계를 맺고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기독교 신앙은 관계인데 이 관계는 깊은 사랑으로 맺어지는 깊은 결속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율법과 하나님의 뜻이 이 관계와 결속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는 이런 사랑으로 결속된 관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2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속의 관계가 제사 보다 중요하다는 말이고, 교회는 예배 드리는 곳이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결속된 관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질문을 했던 서기관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33).” 구약 신앙에서 제사보다 우선시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그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 보다 결속의 관계가 더 낫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을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이상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매일 매순간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내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했는가? 우리 교회는 진짜 사랑하는 교회인가? 그 대답은 ‘아니오’ 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로 나아가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임을 확인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나는 잘 살고 있는 신자라고 착각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날마다 회개함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날마다 회개하며 날마다 더 사랑하기를, 더 깊은 결속의 관계를 위해서 수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7. 깊이 있는 신앙(고전 13:1-3)
하나님과 이웃과 깊은 사랑의 결속을 이루는 것은 깊이 있는 신앙입니다. 깊이 있는 신앙은성경을 깊이 알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사랑의 결속이 없다면, 그것은 얄팍하고 피상적인 신앙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13:1-3). 참된 신앙은 결코 그런 피상적인 자리에 안주하며 만족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불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더 깊은 결속을 이루고 싶은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깨어져야 할 장애물은 피상성, 피상적 관계들입니다. 하나님과 형제들과 더불어 점점 더 깊은 사랑의 결속으로 나아가는 신앙은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일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배와 헌금과 기타 종교적 의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얼마든지 위선적이고 이중적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에는 언제나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성장하지 않는, 피상적 신앙에 머무를 위험이 상존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지난 교회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사랑과 결속의 관계에 신앙이 달려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고백과 삶이 같이 가는 사람입니다. 깊이 있는 신앙을 가진 깊이 있는 성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정말 깊이 있는 신앙을 갖춘 깊이 있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8. 깊이 있는 교회가 가지는 세 요소 (롬 11:33; 히 4:12)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절대로 피상적인 수준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상적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깊고 그의 지혜와 지식도 헤아릴 수 없이 깊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탄성을 터뜨렸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로마서 11:33).”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깊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과 맺는 사랑의 결속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있는 교회는 자연히 깊이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있는 교회에는 그들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와 공동체가 경험하는 죽음과 고난의 사건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코이노니아, 즉 깊은 사귐입니다.
깊이 있는 교회에는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브리서 4:12).”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각 사람의 심령에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피상성에 머물러 신앙 생활을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매주일마다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를 구해야 합니다.
둘째로 깊이 있는 교회는 공동체가 경험하는 죽음과 고난의 사건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공동체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죽음은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모두는 그렇게 죽음을 경험합니다. 작년에 우리는 ZOOM으로 데이비드와 낸시 거스리 부부가 쓴 『상실의 아픔을 딛고 서다』라는 책으로 독서 나눔을 했습니다. 어린 두 아이를 연이어 잃은 부부가 상실의 아픔을 믿음으로 견뎌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공동체 안의 한 가정이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경험하게 될 때, 그 경험이 공동체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경험은 비단 죽음의 경험만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 겪게 되는 고난의 사건들 또한 공동체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인생을 결코 희희낙락하는 가벼운 태도로 바라볼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죽음 같은 상실의 아픔이나 통과하고 있는 고난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교회 공동체를 깊이 있게 해주는 요소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헬라어는 사귐,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과 마음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물질 까지 나누는 사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단어를 ‘깊은 사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볍고 피상적인 사귐을 코이노니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 교회 소그룹 명칭이자, 이상입니다. 우리의 사귐이 깊은 사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이름인 것입니다. 교회의 멤버에게 예배가 선택이 아니듯이 코이노니아도 선택이 아닙니다. 이 사귐 속에서 교회는 깊은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에 여러분의 사귐은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깊은 사귐이 있어야 교회는 깊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 성질 혹은 자기 성향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속성에 정렬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 깊이, 그 사랑, 그 결속에 정렬된 성도들은 깊이 있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9. 무엇이 다른가?(요 13:34-35)
우리는 교회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땅 끝까지 그리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서 철저한 실패의 쓴맛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와 있는 것 같이, 돈 냄새가 풀풀 나고, 권력 다툼이 있으며, 강자에 대한 아첨과 약자에 대한 멸시도 보입니다. 세상에서 보는 것들이 다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는 입으로 전하는 복음 만큼이나, 우리의 존재로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피상적인 세상에서 교회는 깊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에서 깊은 사랑과 결속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고 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의 기쁨이 더 사랑하게 하는 동기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알지 못합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들은 깊이 있는 교회입니다. 얄팍하고 피상적인 세상에 존재하는 깊이 있는 교회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갈망하면서도 찾을 수 없는 깊은 결속, 사랑 어린 관계를 교회 안에서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새계명을 이렇게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합니다. 이들은 피상성을 넘어서는 교회입니다. 이렇게 깊이 있는 교회가 될 때, 세상은 놀랄 것입니다.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죄로 말미암아 철저한 소외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해, 여기 참된 결속이 있다고, 여기 깊은 사랑으로 맺어지는 관계들이 있다고, 우리 영혼 깊은 곳을 만족시켜 주는 만남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말입니다.
최근에 어떤 사람이 오늘날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교회놀이’라고 냉소적으로 쓴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교회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교회놀이에 지친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을 지치게 하고 실망하게 한 것은 어쩌면 교회놀이가 아니었습니까? 진짜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은 채, 진짜를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리로 가도록 은혜를 구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는 그런 교회입니다. 우리는 자비하신 하나님께 그런 교회를 세워주시기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