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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

요한일서 1:9, 디모데전서 4: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1-03

말씀내용
2021년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는 [말씀이 이끄는 교회]로 주의 인도하심을 받아 세워져 가는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특별히 금년에 강조하고 싶은 신앙 훈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훈련입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기를 연습하고 훈련하는 2021년이 되길 바랍니다. 회개는 믿음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을 구성하는 두 기둥이고 또한 신자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이기도 합니다. 믿음과 회개로 교회에 들어오고 믿음과 회개로 신자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이중 회개는 믿음 만큼 강조되지 않은 면이 많고, 많은 오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끊임 없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를 배워야 하고 또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금년에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라는 타이틀 아래, 회개의 연습과 훈련에 초점을 맞출 텐데, 오늘 새해 첫 주일에 이 주제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1. 훈련이 필요하다 (딤전 4:8).
바울 사도는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디모데전서 4:8).” 경건을 ‘육체의 연단’에 비유했는데 연단이란 말은 ‘훈련, 연습’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 ‘김나지아(γυμνασία)’라고 읽는데, 체력 훈련장, 연습장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짐(gym, gymnasium)’이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경건을 육체의 훈련에 비유한 것은, 경건도 훈련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바로 앞 구절에서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훈련)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딤전 4:7). 그리고 경건의 훈련은 범사에 유익해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누릴 약속이 있습니다. 늘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는, 홀로 하나님을 독대하여 감당해야 하는 일들에 소홀했을 수도 있는데, 회개의 훈련은 이런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개의 훈련은 특별히 모이기 힘든 코로나 시대에 적절하고 유익한 훈련이 될 것입니다. 회개라는 경건 훈련이 여러분의 영적 근육을 단련하고 깊은 경건에 이르는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2. 회개는 신자의 교인 입회 절차가 아니다(막 1;15; 요일 1:8).
먼저 회개에 대한 오해들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데, 첫째 오해는 회개를 신자의 교인 입회 절차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교인등록카드만 작성하면 교인이 되는 시대에, 믿음과 회개를 교인의 조건으로 삼는 것만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예수 믿을 때 처음 한 번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막 1:15). 회개와 믿음,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일어납니다. 회개 없는 믿음, 믿음 없는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는다면, 그는 이전에 살아가던 삶의 방향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 믿음이 없이 회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신자가 된 사람은, 일평생 믿음과 회개를 반복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일평생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의 경향성은 신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욕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회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은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자백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앞 8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예배를 드릴 때, 참회기도 순서가 있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회개는 공예배의 순서에 한정될 수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회개는 신자가 평생에 행하는 일입니다.


3.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나 반성이 아니다(마 27:3-5).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나 반성도 아닙니다. 본래,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돌아간다’는 의미이고, 헬라어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마음을 고치다’라는 뜻입니다. 둘 다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인데, 하나님께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사실, 한자어인 ‘회개(悔改)’는 뉘우친다는 뜻의 ‘회(悔)’와 고친다는 뜻의 ‘개(改)’가 결합된 단어인데 마음으로 뉘우치고 행동을 고친다는 의미에서 성경적 회개의 의미를 잘 살린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뉘우치는 것만을 회개라고 하지 않고, 회개는 행위를 고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뉘우쳐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방향 전환입니다. 회개에서는 이 방향이 중요하고 아버지와의 인격적 관계가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져 정죄 받는 것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스스로 뉘우쳐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까지 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마 27:3-5). 회개는 돌이켜 고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4.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하는가?(시 19:12; 139:23-24)
어떤 사람들은 회개할 때 속죄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 말이 옳다면, 회개하지 않은 죄는 어떻게 됩니까? 죽을 때 미처 다 회개하지 않은 죄들은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모든 죄를 다 알고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이런 회개의 이해는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죄악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9:12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편 19:12).” 죄를 특정한 행위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뛰어난 은혜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인식하고 찾아낼 수 없는 죄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둘째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라는 할 때, ‘알고 지은 죄’라는 표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죄에 대한 인정과 자백이 없으므로 피상적이기 쉽고,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할 때, 죄가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특정한 죄들, 알고 있는 죄들을 자백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편 139:23–24).”
때로는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실 때가 있지만, 다윗처럼 신자는 그 전에라도 늘 자신의 죄를 찾아 회개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금년에 훈련하려는 것이 바로 그런 죄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회개하는 훈련입니다. 모르는 죄는 괜찮다고 안일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를 찾아내고 죽이는 일이 신자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절대로 중요한 의무인 것입니다.


5. 회개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19:30; 눅 15:11-32)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우리가 자백하는 특정 죄악들이 사함을 얻는 것입니까? 이것은 쉽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을 때,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택자의 죄를 사하시는 일을 성취하셨다는 선언입니다(요 19:30). 그렇다면, 신자가 자기 죄를 자백할 때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그의 보혈로써 덮여지고 사해진 죄악이 다시 사함을 받는다는 의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서 씻겨졌다면,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그 죄사함의 효력이 다시 우리 심령에 회복되고 역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죄사함의 은혜가 다시 새롭게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을 안고 나아가지 않고 다시 사죄의 기쁨을 가지고 감격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죄들을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속죄를 회개하는 자녀에게 적용하여 주심으로 그 심령을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끊어진 사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자백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양심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죄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강 넘기거나 모른 척하게 된다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편안함을 가질 수 없을 것은 자명합니다. 양심이 불편한데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에 들어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들을 자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사귐 속으로 다시 들어가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요, 그 방편입니다.
회개할 때 일어나는 일을 그림 같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입니다(눅 15:16-31). 탕자가 인생의 밑바닥에서 자기 죄악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결국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은 자기 죄를 아버지께 인정하고, 자백합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게 하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게 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입니다. 회개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불의는 죄로 말미암은 더러운 흔적 즉 오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들을 자백하는 신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서 죄의 흔적들까지도 남김 없이 말끔하게 씻어 주십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도 없는 것처럼, 마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듯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에게 해준 일입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거리낌도 없습니다.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가장 놀랍게 경험하게 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쳐놓은 죄의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다시 그 품에 안아 주십니다. 신자는 범죄함으로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거나 끊어짐을 당하지는 않지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함으로써 아버지와의 그 불편하고 힘든 관계를 청산하고 아버지께 안기는 감격을 누리는 것입니다.


6. 종교적 회개 대(對) 복음적 회개(롬 8:1)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종교적 회개로 오해합니다. 종교적 회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고 내 기도에 응답하게 하려는 동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 회개는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자기의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이 회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일 수 없습니다. 쓰디 쓴 경험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복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복음적 회개는 다릅니다. 이 회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신자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영적 열망을 불러일으켜 죄의 성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A. 형벌이 두려운가, 죄를 슬퍼하는가?
조금 더 종교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점을 살펴봅시다. 종교적 회개는 자신의 죄로 인해 받게 될 형벌이 두려워서 하는 회개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롬 8:1). 그래서 복음은 회개를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시킵니다. 불신자의 모든 죄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죄악이지만, 신자의 죄는 아무리 큰 죄일지라도 지옥에 가게 하는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죄를 미워하고 무서워합니다.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기쁘고 좋은 삶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적 회개는 죄의 형벌이 무서워서 하는 회개가 아니라, 죄 자체를 슬퍼하는 회개입니다.

B. 죄 용서의 근거는 나의 비참함인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인가?
뿐만 아니라, 종교적 회개는 자기의와 연결됩니다. 이때 회개는 단순히 죄 용서를 받는 형식이 되거나 내가 이만큼 죄 때문에 힘들어하고 후회하고 있으므로 용서를 받을 만 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로마카톨릭의 고행 같은 관습들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는 비하를 겪으셨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신자가 죄 용서를 받는 근거는 자신의 슬픔과 비참함의 정도가 아닙니다. 죄 용서의 근거는 오직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백하는 죄를 사하시는 근거를 하나님의 ‘미쁘시고 의로우신’ 성품이라고 말합니다.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심인데, 죄들을 자백하는 자들을 용서하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모든 죄들을 자백할 수 있습니다. 왜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나 긍휼하심이나 자비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용서의 근거라고 말씀합니까? 바로 앞 7절에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한 것이 그 대답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율법의 저주와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부으심으로 그 아들 안에서 택하신 백성의 죄들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미 당신의 의로우심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 용서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바로 십자가에서 나타났고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C. 쓰디 쓴 회개인가, 달콤하고 기쁜 회개인가?
종교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는 더 있습니다. 종교적 회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쓰디 쓴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도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부담이 클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완전하게 용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근거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입니다. 그래서 죄를 자백하는 것이 두렵고 어렵지 않습니다. 법정에서 판사 앞에서 죄를 인정하는 것과, 아버지 앞에서 자기 죄를 자백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법정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하지만, 아버지는 죄를 자백하면 죄를 탕감해 주실 뿐 아니라 아버지와의 상한 관계도 바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속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서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짐을 경험할 때보다 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때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를 통해,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깊이 경험하게 되고, 이 기쁨은 모든 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죽이는 강력한 힘이 될 것입니다.
종교적 회개는 할수록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할 수만 있으면 안 하고 싶지만, 복음적 회개는 그 결과가 너무나 좋고 감격스럽고 기뻐서 점점 더 회개를 하게 합니다. 근본적으로 회개가 죄를 자백한다는 점에서는 씁쓸하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달콤하고 기쁜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악순환과 선순환이 있는데, 회개를 하지 않을수록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누릴 수 없기에, 점점 더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할수록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누리게 되고, 이 기쁨은 점점 더 죄를 멀리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더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더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것들을 죄로 여기고 회개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죄악들 아래 있는 죄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의 결핍이기 때문입니다.”


7. 회개의 실제—복음적 회개의 훈련
이제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가 무엇인지 조금 이해하셨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적 회개의 훈련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한 편지에서 자기가 어떻게 자신을 살피면서 복음적 회개를 실행하고 있는지를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깊은 겸손과 불타는 사랑, 바른 방향의 열정 그리고 나뉘어지지 않은 마음을 주시면, 사람들이나 마귀가 아무리 못되게 해도 나는 상관없다.” 이것은 복음적 회개가 주는 놀라운 열매요 자신감입니다. 마귀나 그 어떤 악한 자들도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를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남긴 이 자료는 복음적 회개를 훈련하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A. 교만에서 깊은 겸손으로
첫번째 회개의 주제는 교만과 겸손의 문제입니다. 스스로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오늘 나는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았는가? 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내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 때문에 나는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꼈는가?” 내가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깔보았다면 그것은 회개할 일이지만, 나에 대한 비판이나 내가 무시당한 일들에 대해서는 내가 무슨 회개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복음적 회개는 여기까지 미칩니다. 자, 어떻게 회개할 수 있습니까?
나도 내가 무시한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므로 나의 오만함을 회개하고 그것이 줄어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칭찬이나 비난에 너무 크게 반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더 소중히 여긴 것을 회개하고 남들의 비판으로 인한 고통이 줄어들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보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더 구했던 것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 아래서만 자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떠나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 따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용납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평안한 기쁨을 경험할 때까지 주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며 회개하십시오.

B. 무관심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두번째 회개의 주제는 무관심과 애정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불친절하게 말하거나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마음 속에서라도 누군가를 풍자함으로써 나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참을성 없고 조급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자기에게 몰입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인간은 다 자기중심적인데, 이 자기중심성은 죄의 두드러진 성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회개할 수 있습니다.
차가움이나 불친절함을 회개하고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급함을 회개하고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나를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회개하고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내가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애정을 보이기까지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로 나를 무한히 참으셨고 나를 주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 안의 차가움과 불친절함, 조급함,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회개할 수 있습니다.

C. 불안에서 지혜로운 용기로
세번째 회개의 주제는 불안과 용기의 문제입니다. 날마다 이렇게 자문해보십시오. “나는 직면해야만 하는 줄 알면서도 직면해야 할 사람이나 할 일을 피하지 않았는가? 나는 불안해하고 염려하지 않았는가? 나는 신중하게 행하는데 실패하거나 조급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는가?” 불안은 불신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주제가 됩니다. 단순히 용기를 구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회개의 기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악을 직면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어려운 일을 회피하려는 두려움, 불안함, 조급함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그 두려움과 불안과 조급한 행동이 없어지기까지 나를 돌보시며 사랑하시며 나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증명하시려고 죽으신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불안해하는 것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만큼 지혜롭지 않습니다. 차분함과 고요함, 그리고 전략적 지혜와 담대함을 주시기까지 주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며 불신앙을 회개하십시오.

D. 경건한 동기
회개의 마지막 주제는 경건한 동기와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했는가 아니면 두려움, 인정받으려는 욕구, 위로와 편안함에 대한 사랑,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 갈채와 권력에 대한 굶주림, 또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움직였는가? 나는 누군가를 시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욕이나 폭식의 욕구에 순응하여 첫 발을 떼도록 허용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이런 무절제한 욕구 때문에 내 시간을 중요한 일이 아니라 급한 일에 낭비하지는 않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우리 자신의 동기를 살피게 하고 잘못된 동기를 회개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 잘못된 동기들을 회개하고, 우리가 그 잘못된 동기들 속에서 찾고 있는 모든 만족을 주님께서 어떻게 내게 제공해 주셨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오 주 예수님, 제가 죄를 피할 수 있도록 주님 안에서 저를 충분히 행복하게 하여 주시고,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제가 주님 안에서 충분히 지혜롭게 해주셔서 언제나 주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8. 회개, 거룩의 길
이제, 여러분은 조지 휫필드의 회개의 기도를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겠습니까? 이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여러분은 어떤 결과를 기대하시겠습니까? 회개의 열매는 거룩입니다. 여러분은 회개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성품으로 빚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건한 어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거룩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경건의 훈련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 4:8 새번역).”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