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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0). 일곱째 인과 성도의 기도

요한계시록 8:1-5, 하박국 2:20, 스가랴 2: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7-12

말씀내용
오늘로써 우리는 일곱 인 심판의 마지막인 일곱째 인 심판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네 인의 심판에서는 말들과 말 탄 자들이 등장하면서, 주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에 있게 될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으로 정복과 전쟁의 피흘림, 기근과 전염병이 가져오는 죽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섯째 인에서는, 무대가 땅에서 하늘로 옮겨지면서 하늘 제단 아래에서 순교한 영혼들이 신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무 종들과 형제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 수가 찰 때 심판의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섯째 인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주의 대붕괴, 곧 온 세상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늘이 말려서 사라지고 별들이 떨어지며 해가 흑빛이 되고 달이 핏빛이 되는 무서운 참사가 일어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세상의 잘난 자들이 하나님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에 대한 공포를 견딜 수 없어 산들과 바위들이 자기들 위에 떨어져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이 무서운 심판을 피하고 하나님 앞에 능히 설 자들이 있음을 7장은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144,000명은 결코 심판의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큰 환난에서 승리하고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어 깨끗하게 한 모든 성도들이 하늘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요한은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일곱째 인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일곱째 인을 떼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일곱째 인도 여섯째 인과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기도(다섯째 인, 6:10)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에서 일곱째 인 심판이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언급을 두 차례나 읽게 되기 때문입니다(8:3,4). 그리고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여섯째 인의 심판이나 일곱째 인의 심판은 모두 최후의 심판에 해당하는 내용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여섯째와 일곱째 인의 심판이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일까요? 비록 성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박해를 당하고 환난을 겪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1. 일곱째 인의 심판인가, 일곱 나팔 심판의 서곡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성격을 먼저 규명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분명히 1절은 일곱째 인을 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앞에서 우리는 인이 떼어질 때마다 어떤 심판의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일곱째 인이 떼어졌을 때 어떤 심판의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본문을 살펴보십시오. 6절부터는 분명히 일곱 나팔 심판 시리즈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인 1-5절 사이에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두드러진 현상은 ‘반 시간 동안의 고요함’입니다. 이 외에 일곱째 인과 관련되었다고 읽을 수 있는 것은 한 천사가 제단 옆에서 금 향로에 향과 함께 성도들의 기도를 담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제단의 불을 담아 향로를 땅에 쏟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일곱 나팔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인지, 아니면 일곱째 인 심판의 내용을 다루는 것인지에 대해서 성경학자들도 의견이 갈립니다. 특히 2절을 보면,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미 2절에서 일곱 나팔 심판이 시작된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일곱 나팔 심판이 시작되는 것은 6절부터 입니다. 저는 2절을 고려할 때, 이 본문이 일곱 나팔 심판을 소개하는 서곡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이 본문의 성격은 일곱째 인 심판의 내용을 서술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 열쇠는 1절에 ‘고요함’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달려있습니다.


2. 우주적 고요함 (1; 합 2:20; 슥 2:13)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드디어 일곱째 인을 떼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때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고요함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설명은 이러합니다. 이 고요함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탁월한 장치인데, 이제 땅에 임할 심판을 더 인상 깊게 만들어주는 극적인 장치라는 것입니다. 푹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요함의 해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이 고요함 혹은 침묵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보통 고요함이나 침묵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계시킨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입니다. 가령, 하박국 2:20을 보면,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하박국 2:20).”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곧 임하게 될 바벨론의 공격 전야의 잠잠함입니다. 바벨론의 예루살렘 공격은 물론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스가랴 2:13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스가랴 2:13).” 이 잠잠함도 하늘의 법정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고요함입니다. 그런데 이 고요함의 뉘앙스를 비일(Beale)이 잘 설명합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어마어마한 공포가 바로 고요함이 전달하려는 요점”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요함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우주가 붕괴되는 최후 심판 곧 여섯째 인 심판에서 연결됩니다. 이 고요함은 원시적 고요함으로서 여섯째 인의 심판으로 땅의 모든 거민이 죽고 최후의 심판 직전에 발생하는 고요함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인에서는 우주의 종말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7장에서 하나님의 인침을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찬송하는 다소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일곱째 인이 떼어지자 고요함이 임합니다. 우주의 종말이 일어난 후의 장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장면이 고요함입니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닙니다. 일곱째 인의 심판—최후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고요함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고요함이 ‘반 시간쯤’ 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반 시간은 보통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 오전에 향을 피우는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이 분향의 시간 동안 경건한 백성들은 성전 밖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을 위해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것과 연결시켜서 ‘고요함’을 설명하려고 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 온 하늘을 조용하게 하신 것이라 설명입니다. 사실, 이 설명은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을 강조하는 3-4절과 관련해서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고요함에 대한 두번째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요함의 성격을 이해한다면, 1-5절은 단순히 일곱 나팔 심판 시리즈의 서곡으로만 볼 수 없고 일곱째 인의 심판을 설명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버려지지 않는 성도의 기도(3-4)
그러면 이제 우리는 3-4절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2절은 일곱 나팔 심판을 다룰 때 함께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3-4절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요한계시록 8:3–4).”
3절과 4절에서 ‘성도의 기도’라는 말이 각각 한 번씩 사용되었습니다. 성도의 기도가 여기서 중요한 개념임을 보여줍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선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는 장면을 보았는데, 3절에서는 또 다른 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 천사는 제단 곁에 서있습니다. 이 제단 곁은 이미 우리가 다섯째 인의 장면에서 본 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제단 아래에’ 있었다고 했습니다(6:9). 이것은 일곱째 인의 이 본문이 그 순교자들의 기도와 연관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요한은 하늘 보좌 환상에서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더 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천사는 제단 곁에 서 있는데, 금 향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로는 제사장이 놋제단에서 불을 받아 담아서 성소에 있는 금향단에 향과 함께 드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그릇인데, 사슬로 느려뜨려진 형태였습니다. 모세의 성막에서는 놋으로 만들었는데(출 27:3),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금으로 만들었으니(왕상 7:50), 요한이 본 것은 솔로몬 시대의 금 향로와 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제단 곁에서 금 향로를 가진 천사는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 천사는 그 향을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잘 보면, 향과 성도의 기도가 구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8에서는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구별이 됩니다. 이것을 헨드릭슨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천사에게 주어진 많은 향은 하늘에 계신 구세주께서 지상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는 그의 교회를 위하여 행하시는 중재와 화해를 나타낸다.” 헨드릭슨의 설명에 의하면, 성도의 기도는 주님의 중재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 내용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그것들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말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기도를 이메일에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기도는 정크메일함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 말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시시하고 사소하게 여겨 귀를 기울이지도 않으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하고 흠 많은 기도가 우리 주님의 손을 거쳐야 온전하게 되고 그 상태로 하나님께 올려지게 되며, 그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도 버려지지 않고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신실하게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하겠습니까?
4절에서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도하지만 우리를 향한 저들의 박해는 꺾이지를 않아. 하지만, 우리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거야. 그러니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지 말자.” 이런 식으로 그들은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4. 기도의 응답과 심판 (5)
이제 우리는 모든 성도의 기도가 버려지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다 들으셨다면, 그 들으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5절에서 보게 됩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요한계시록 8:5).”
여러분, 이게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보십시오.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지자, 향로를 가진 그 천사는 이제 그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아냅니다. 그러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보여주는 싸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현상을 여섯째 인의 심판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여섯번째 인 심판에서 천체와 피조세계가 붕괴되는 최후의 심판 현상이 나타났는데, 일곱째 인의 심판은 그것에 이어지는 최후 심판의 현상을 보여줍니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하나님의 심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싸인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암시하는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여섯째와 일곱째 인 심판은 최후의 심판과 주님의 재림을 보여주는 내용이며, 이 심판들은 모두 성도들의 기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섯째 인 심판이 하늘의 제단 아래서 교회를 박해한 세상을 심판해 달라는 순교한 성도들의 기도의 결과였듯이, 일곱째 인 심판도 역시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최후의 심판과 주님의 재림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자,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교훈을 얻을 차례입니다. 최후 심판과 주님의 재림이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면, 그러면 이제 어쩌라는 겁니까? 이 말씀이 21세기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본문은 분명히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기도의 본질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질문을 해봅시다. 기도하면 달라집니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십니까? 이것들은 사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중요한 질문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며, 영원한 작정을 세우시고 그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에서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하면,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계획과 작정을 바꾸어 달리 행하십니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명하셨다는 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영원한 작정을 변경하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기도할 때 상황이라도 바뀌게 됩니까? 여기에는 그렇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좀 복잡한 문제일 수 있지만, 잘 들어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섯 개의 청원 중에 하나가 이것이니 이 간구는 모든 성도에게 중요한 기도 제목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간구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이것을 욥의 경우에 적용해봅시다. 어느날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욥의 종들을 죽이고 가축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사탄이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서 행한 일입니다. 이것은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의 마음과 뜻에 역행하여 강제로 그렇게 하게 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못되고 잔학한 습성에 따라 그렇게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이 주님이 가르쳐주신대로 매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물론 그래도 욥의 가축들이 약탈 당하는 일은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악한 일에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이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겠지만, 상황은 좀 다르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면서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놓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되는 행동입니까? 가령,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에서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난 일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병의 상황이 사라지기를 기도할 수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작정 속에 우리의 기도를 포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과를 정하셨지만, 그 수단도 당신의 작정에 포함시키셨습니다.
우리 중에 암이라는 질병 혹은 다른 심각한 질병으로 고난 중에 계신 지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허락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질병을 고쳐주시기를 기도할 수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 조차 하나님의 작정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의 지체들의 연약함을 온전하게 하시는 일 뿐 아니라 더 큰 일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지만, 누군가 그에게 복음을 들려줄 사람을 통해서 또 누군가 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므로, 이 모든 수단이 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수단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맺기 전에, 기도와 관련해서 두 가지 교훈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겸손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팔을 비틀어서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시게 하는 무기가 아닙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말은 제한적으로만 옳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실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을 바꿉니다. 그의 생각, 그의 뜻, 그의 계획이 하나님의 것과 일치하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정치적, 외교적 이슈 등을 놓고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100%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나친 확신에서 한 걸음 물러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하게 기도하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범사에 그러합니다. 내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지나치게 확신을 가지게 될 때, 자칫 우리는 기도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분열시킬 수 있으며 형제를 사랑하기 보다 정죄하는 태도로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한 기도는 결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둘째,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핵심을 이해하고 그것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저 신자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수단이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작정을 이루시기 위해 정하시고 사용하시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주님은 물론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기도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적 성장이 없고, 성품은 여전히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이유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기도가 전부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는 열심히 눈물로 드리는 기도가 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을 그리스도를 닮도록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기도하면 할수록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거짓된 자기 확신에 빠져서 자기 주장만 강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한다면, 그 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변화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작정을 따라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로 마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계 22:20b). 주님은 그 기도의 응답으로 아버지의 정하신 때에 오실 것입니다.
조엘 비키가 들려주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하나를 나누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조엘 비키 목사님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아들아, 하나님의 자녀는 불신 자녀들이 가지지 않은 것을 언제나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그리고나서 아버지는 어린 조엘의 마음에 철필로 새겨주고 싶은 말씀을 그 대답으로 주셨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지…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언제나 열려있어서 그곳으로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사실 보다 더 귀중한 것은 세상에 없단다. 그래서 기도는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지. 만일 기도를 무시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최고의 특권 중 하나를 무시하는 셈이지.”(Beeke, J. R. (2016). Revelation. (J. R. Beeke & J. D. Payne, Eds.) (pp. 251–252).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이 말씀, 이 교훈을 성령님께서 우리의 가슴에 철필로 새겨 주셔서, 우리를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하는 자녀들로, 또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자녀들로 세워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