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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9).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시편 119:65-72, 히브리서 12:6-11, 시편 34:1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7-13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시편 119편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찬양하고 높이는 시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경험하고 인정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편 119편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다기 보다, 이 시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몇 차례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곧 주님 자신에 대한 사랑이고, 주님에 대한 사랑은 결국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본성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그 말씀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 말씀에 주의하지 않거나 순종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이 시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토록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72절입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시인은 그냥 말씀이나 율법이라고 표현하는 대신, ‘주의 입의 법’이라고 말함으로써 인격적이고 애정이 담긴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컨대, ‘당신의 언급에 따르면’이라고 하지 않고,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입술에서 흘러나온 꿀과 같은 말’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은 그 말씀이 ‘천천 금은보다 좋다’고 말합니다.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십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시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선하시다. (68,69; 시 34:19)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68절 상반절입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이 고백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고백이고, 노래도 많이 부릅니다. 어떤 미국 교회들에서는 목사가 “God is good.”이라고 외치면, “All the time!”이라고 회중이 대답하기도 합니다. 편안할 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All the time!’이라고 말했듯이, 극심한 고난이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그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고 고백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시인이 하는 이 고백은 고난이라는 상황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67절에서 시인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이라고 말하고, 69절에서는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둘러 치려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고백이 가지는 힘이 있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이 말하듯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to enjoy Him)입니다. 하나님을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항상 선한 분이셔야 합니다. 악하거나 변덕스러운 분을 기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는 고백을 해석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선을 행하심을 우리가 바라고 원하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이해하는 관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입니다. 이런 관점을 취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현재의 고난을 언젠가 하나님께서 일어나게 하실 인생역전의 차원으로만 이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방식의 문제는 인생역전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그분을 즐거워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관점을 번영신학 혹은 번영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두번째 방식은 내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난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베푸시는 최상의 은혜로 보는 관점입니다. 비록 내 지혜로는 지금 깨닫거나 헤아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지혜로 지금도 내게 선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설령, 죽음의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 고난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방식 안에서 신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게 됩니다. 언제나 말이지요. 이것은 고난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중세 로마 신학을 가리켜 영광의 신학이라고 불렀고, 성경은 십자가의 신학을 가르친다고 말했습니다. 루터의 구분도 여기에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번영 신학 혹은 영광의 신학이 가지는 시간의 범주는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서’입니다. 하지만 고난의 신학, 십자가의 신학은 ‘영원’이라는 시간의 범주를 상정합니다. 아침 안개 같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풀의 꽃의 영광에 지나지 않는 인생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런 인생에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영원을 바라보는 시야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신자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삶에는 고난이 없다고 약속하지 않고, 도리어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라고 말씀합니다(시 34:19).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에덴 동산의 바깥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관점, 어떤 신학을 가지는가는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고난을 해석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결정하기에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 해석 여부에 따라, 신자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할 수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고 자신이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있거나 버림 받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고난 자체에 더해지는 깊은 영적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번영신학은 나쁜 신학일 뿐 아니라, 사탄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학을 갖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 중에도 여전히 선하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덟 절 가운데 다섯 절이 ‘선하다, 좋다, 유익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토브’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체 여덟 절이 토브의 첫 자이며, 히브리어의 아홉번째 알파벳인 ‘테트(ט)’로 시작합니다.


2. 분별의 문제 (65,66; 빌 1:9-11)
65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대하셨다고 고백하는데, 그것은 ‘주의 말씀대로’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이 ‘주의 종을 선대하셨다’고 말하는 상황은 고난의 상황입니다. 그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대하신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주의 말씀대로’ 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틀림없이 자기를 선대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이 ‘주의 말씀대로’라고 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66절에서는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라고 말함으로써 이 신뢰에 스스로 인을 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해석하는 열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분별하고 있는 것입니까?
66절에서 시인이 무엇을 구합니까?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구합니다. 이것은 이미 시인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더 선명하길 바랍니다. 명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본래 ‘맛’이라는 뜻인데, 이 맛은 도덕적 선함의 맛을 아는 것이고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맛입니다. 좋은 명철은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아는 분별력을 말합니다. 그러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가르쳐 달라는 기도는 선한 판단력,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한 행실을 배우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오늘날 이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이지 선하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한 내용을 읽어보면, 성도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립보서 1:9–11).”


3. 명철과 지식을 배우는 환경, 고난 (67,71,75; 히 12:6-8; 애 3:33)
우리는 어떻게 이 명철과 지식을 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시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우리가 명철과 지식을 가장 확실하게 배우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입니다. 물론 이론으로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운 이론이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입니다. 67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인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기가 ‘겸손해지고 비천하게 낮아지도록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전에는’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한 말이거나 완벽주의저인 말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자신을 신실하게 만들어 주셨고 주님만을 붙들도록 해 주셨기에 이제 주의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산다’는 고백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마다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히 12:6-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가장 고귀한 증거입니다. 또 징계를 넘어, 하나님의 영광과 자녀들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그 의미 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에 찾아옵니다. 경제적 실패와 같은 재정의 압박이 있고 때로는 도덕적 실패로 공개적인 수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예상치 못한 심각한 질병으로 인한 고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고통도 빼놓을 수 없고, 관계의 고난도 일어납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저버리기 쉬울 텐데 도리어 그 반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한 순간에 당장 일어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꽤나 걸리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더 깊이 배우게 되고(71),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67).
그들은 시인이 고백하듯이,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고 고백하고,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75)”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백에 동의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좋은 명철과 지식’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한(66) 시인은 고난을 통해서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러므로 고난이 빵과 포도주보다도 더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압시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칼빈의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은 ‘좋은 명철과 지식’을 배우기를 그만큼 원하십니까?


4. 고난의 유익 (69-72; 히 12:11; 사 38:11a; 신 8:16; 빌 3:8-9)
시인이 처한 고난의 환경은 69-70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교만한 자들, 그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 같은 자들이 거짓으로 시인을 모해하는 상황입니다.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 같다는 표현은 그들이 사람들의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한 냉담함과 완악함을 가진 존재들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입니다. 하지만 찰스 브리지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교만한 자들의 악의에 찬 대적으로 보이는 징표들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징계하시는 사랑의 매로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징계의 열매는 매일 죄를 죽이는 일로 나타납니다. 징계의 때에 우리는 고난을 이기게 하는 복음의 은혜의 역사를 맛보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자랍니다 .징계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사랑으로 충만한 영원한 나라의 합당한 자로 점진적으로 자라게 됩니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수 있다면, 성도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말은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런 상황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신실한 다니엘을 사자 굴 속에 던져 넣으셨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 속에 집어넣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탕자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고생할 것을 훤히 내다보셨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주어 내보내실 수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비록 시인은 이런 잔인한 자들의 틈바구니에 떨어져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켰고, 주의 법을 사랑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71절에서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유익은 그가 ‘좋은 명철과 지식’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던 대로(66)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브리서 12:11).” 또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사 38:17a).”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신 8:16).
이 복된 진리를 깨달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칼빈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망치질로 본성적인 우리 완악함을 부드럽게 만드신다.” 그리고 신학자의 3대 조건을, 기도, 말씀 그리고 고난이라고 말했던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안 적이 없었다. 그 이후 나는 항상 고난이야말로 내 가장 훌륭한 몽학선생들 중 하나라고 여겨왔다.”
저는 임종을 앞둔 한 무명의 프랑스 성도가 고백했다고 전해지는 말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찾아오신 이 열흘 동안에, 주님께서는 제가 살았던 이전 50년 동안 제가 행한 일 보다 더 큰 일을 하게 하셨나이다.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나이다.” 이것이 고난이 하는 일입니다.
고난이 주는 유익, 고난을 통해서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 보다 좋으니이다”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72). 바울의 고백도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8–9).”


5. 교훈과 적용 (시 34:19; 히 5:8; 벧전 4:1-2;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아무도 나를 위로할 수 없을 때, 성도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위로자가 되심을 경험합니다. 당신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 무엇도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벗어나게 해줄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능력으로 자신을 건져 주시는 것을 성도는 경험합니다. 그리고 의인에게 고난이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시되(시 34:19), 당신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성도는 압니다. 이렇게 성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는 고백은 고난을 통과한 시인의 고백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맙시다. 그래서 이 고백은 힘이 있습니다. 저는 이 고백을 읽을 때마다 기도응답의 사람이었던 죠지 뮬러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에서 이 구절로 설교를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죠지 뮬러의 기도를 거절하셨고 그의 아내를 데려가셨습니다. 그때 죠지 뮬러가 고백한 말은 바로 이 고백이었습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고난은 우리를 이런 고백을 하는 자리까지 데려갑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죄를 알지도 못하셨던 주님이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썼습니다(히 5:8). 하물며 죄인인 우리들이겠습니까? 죄를 그치고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벧전 4:1-2).
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축복의 개념에 연연해 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나는 고난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명철과 지식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고생만 할 뿐, 어떤 유익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고난은 낭비되는 고난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인에게서 기도를 배웁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66)…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68).”
하나님만이 당신의 자녀들을 이런 고난 속에 던져 넣으실 수 있으신 자비하신 아버지이심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수치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인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실 만큼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심은 독생자를 사랑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독생자를 사랑하셨고, 그 영광을 구하셨으며, 결국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아끼셨기에, 그것을 위하여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여 행하신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고난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고 말씀 안에 거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고 말씀을 지키고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깊어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음도 끊어낼 수 없는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하십니다. 인생에서 겪는 모든 고난을 통해서 이런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