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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5). 관대하신 하나님

시편 65:1-1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0-07-08

말씀내용
하나님 없는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성경을 따라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은 어떨까요? 상상 할 수 없는 혼돈과 무질서, 지옥 같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제하고 조정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코로나 팬데믹 현상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두려움 뿐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반 은총의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 창조 세계는 상상할 수 없는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해는 종종 떠오르지 않고, 비는 세상이 잠겨버릴 만큼 내리거나 수 개월 동안 내리지 않아 온 세상을 가뭄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 매순간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에서 누리고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들이 끊어지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일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시편 65편은 우리의 이런 정신을 일깨워 하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들을 다시 인식하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 65편은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영적, 물질적 축복들에 대한 감사시입니다.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죄로부터의 구속으로부터 땅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에 이르기까지 넓고도 큽니다. 아마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의 3대 절기 가운데 감사와 기쁨의 절기인 초막절에 불려졌을지 모릅니다. 한 해 동안의 모든 추수를 마친 뒤, 거둔 곡식을 창고에 다 들이고 나서 일주일 동안 천막을 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고 감사하는 초막절의 절기 내내 그들은 다른 시편들과 함께 특별히 이 시편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이 시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1-4절은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5-8절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그리고 9-13절은 물과 풍요를 공급해주시는 관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1. 은혜의 하나님(1-4; 시 62:1; 미 4:1-2; 사 2:2-3; 롬 4:5)
먼저 1-4절의 무대는 성전이 있는 시온산입니다. 1절에서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라고 할 때, 시온은 성전이 세워진 산으로 종종 성전과 동일시되곤 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도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고백함으로써, 그 중심 무대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보여줍니다.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는 표현을 직역하면 “주께 대한 찬송이 (시온에서) 침묵입니다”가 됩니다. 하지만, 이 침묵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말할 때처럼(시 62:1), 언제라도 하나님을 향해 터져나올 찬송을 기다리는 침묵입니다. 그래서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라고 번역한 것은 그 의미를 살린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등장하는 개념들을 살펴 보십시오. 찬송, 서원, 기도, 사하심, 택하심과 가까이 오게 하심, 뜰에 살게 하심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성전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이것들을 특정한 사람들만의 특권으로 여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가령, 2절에서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나의 기도만 들으신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보편주의적 개념인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편주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거나 결국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는 말은 회개하고 믿으려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제공된다는 것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이런 구약의 보편주의 사상은 나중에 미가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표출되었습니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가 4:1–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이사야 2:2–3).”
성경이 계시하는 이런 보편주의 사상을 우리가 잘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우리끼리의 잔치, 축제가 되기 쉽습니다.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이, 우리가 누리는 복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첫 단락에서 가장 충격적인 구절은 3절입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편 65:3).”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라고 할 때, 이것은 죄에 빠져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채 죄책감에 쌓여있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때, 좋은 소식이 이 상태를 깨뜨리고 등장합니다.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길 때,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 복음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5).”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범죄를 이기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4). 그래서 이런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라고 선언합니다(4). 이런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 행복은 4절 하반절에서 부연됩니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은 사람은 이제 주의 집, 주의 뜰에 들어와 모든 은혜를 누릴 자격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성전의 아름다움, 곧 주님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 당하고 그 아름다움에 만족할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들려줍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시편 65편을 통해서 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2. 능력의 하나님(5-8; 수 2:9-10)
첫번째 단락이 하나님의 백성이 받아 누리는 영적 축복을 찬송했다면, 두번째 단락은 능력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은혜로우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이 땅끝에 거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가 되십니다(5). 땅 끝에 있든지, 바다 끝에 있든지 사람들의 참된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 즉 놀라운 일로 응답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기대가 5절에는 충만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 놀랍고 극적인 모습들이 6-7절에 묘사됩니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편 65:6–7).”
산과 바다 그리고 자연 만물이 다 주의 권능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열 번의 재앙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일들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민족들, 사람들이 일으키는 폭동까지도 온전히 잠재우십니다.
이런 능력의 하나님을 본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분께 찬송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8절입니다.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시편 65:8).”
땅 끝에 사는 자도 주의 징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말씀은, 여리고 성의 라합의 고백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던 라합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여호수아 2:9–10).”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와 주의 징조에 관한 소문을 들은 자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주의 징조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구원을 행하시는 역사, 자연을 의도대로 주관하시는 것, 땅에 풍요로움을 공급하시는 일,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다 여호와께 이끌리게 하는 모든 긍정적, 부정적인 일들을 다 포함합니다. 여기에는 지진이나 돌풍, 폭풍이나 전염병과 같은 것들이 다 포함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온 세상이 겪고 있는 코로나19 감염병과 같은 문제들은 다 주의 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하고, 전세계에 퍼진 바이러스로 인하여 전세계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게 되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8절 하반절에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 아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창조주에게 반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 자연 질서를 움직이고 당신의 행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3. 관대하신 하나님(9-13; 신 8:17-18)
자, 이제 우리는 마지막 단락으로 왔습니다. 마지막 단락은 그야말로 관대하신 하나님의 면모를 풍요롭게 보여줍니다. 먼저 9절에서 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편 65:9).”
이것은 단순히 비를 가리키는 말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강에 물을 가득하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도한 말씀이겠습니까? 이것은 자연적인 축복을 넘어 성령의 역사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 축복의 끊이지 않는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10절은 하나님께서 비를 보내심으로써 땅이 곡식을 생산하게 하시는 은혜를 말해줍니다. 식물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추수는 생명을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여줍니다. 내 실력과 내 조건이 내 부요함을 가져오는 원인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17–18).”
하나님께서는 해마다 이 일을 반복하여 행하신다고 11절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관대함으로 그 해에 왕관을 씌워 주셨다는 말인데, 모든 해가 다 그런 축복의 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대하심은 풍성한 수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는 산들이 기뻐하고 초장과 골짜기가 양 떼와 곡식으로 가득하고 마치 축제 때 처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은 13절 하반절에 썼듯이,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하는 것입니다. 자연 만물들이 말입니다. 곳곳에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풍요룝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증거들이 가득합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말씀이 아닙니까?


4. 교훈과 적용(요 6:44)
시편 65편은 시편 제2권(42-72편)에서 가장 흥분되고 즐거운 시편이라고 어느 학자는 말합니다. 백성들이 추수의 즐거운 축제 속에서 하나님의 모든 축복에 초점을 맞추어 함께 외치고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신나고 만족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시편은 단순히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물질적인 부요함과 풍성함을 넘어섭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범죄하고 넘어지는 인생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복을 부요하게 부어주시려고 그 조건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편 65편은 복음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3절입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편 65:3).”
본래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밖에 받을 것이 없던 대상이었던 우리의 모든 허물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다 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자녀된 자들에게 당신의 모든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여 사랑과 축복 밖에 베풀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 관대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비와 곡식에만 그치겠습니까? 4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종말론적 소망을 전망하게 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65:4).”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선의(善意)나 선행(善行)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 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한복음 6:44).”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복락은 ‘주의 뜰에 살게’ 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죽어야만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주의 뜰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맛을 이 땅에서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4절 하반절에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했는데, 성경은 믿는 자인 우리가 곧 주의 성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이 거하시는 주의 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를 보면서, 행복을 누리고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과분한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비가 없어서, 추수할 곡식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여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무한히 큰 모든 영적 복락을 보여주고 증명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가시적 예시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자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최상의 자리임을 알고 13절에서 시인이 말하듯이, 우리 모두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합시다. 그런 복된 은혜가 우리가 걸어가는 천로역정의 모든 순간에 넘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