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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부활을 소망하며 산다는 것

고린도전서 15:50-58, 요한복음 11:25-26, 히브리서 11: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4-21

말씀내용
부활 주일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그저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특별한 주일에 불과합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부활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여러분도 장래에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여러분의 오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을 부활 신앙이라고 말할 때, 여러분의 신앙은 이생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어떤 근본적인 차이를 가집니까?
오늘 부활주일을 보내면서,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셨고 가지게 하신 부활을 믿는 신앙의 능력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절망의 문제—인생 최대의 난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수많은 난제로 가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100년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5년 전 세월호의 비극은 “살릴 수 있는 있었는데 못 살렸다”는 아픔이고, 그래서 이 사건은 사랑하는 아이들의 죽음을 넘어 자식들을 그렇게 떠나 보낸 많은 부모들을 절망으로 끌어내린 슬픔입니다. 이처럼 많은 인생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난제 중에서도 아마 인생 최대의 난제라면, 그것은 죽음이라기보다 절망이 아닐까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과연 죽음이겠습니까?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입니다.
“절망은 죽음과 싸우면서도 죽을 수 없는, 죽을 병에 사로잡힌 자의 상태와 비슷하다. 죽음이 희망이 될 정도로 위험이 클 때, 그 죽는다는 희망조차 없는 상태, 그것이 절망이다."
죽음이 희망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슬픈 비극적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희망이 되는 상태, 그것이 어쩌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망이 두려워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살아있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절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리고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인간 뿐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20세기 후반에는 동물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동물 행동학(ethology)이라는 분야가 발달하면서, 동물들도 스트레스나 우울증을 경험한다는 주장이나 자살 현상으로 볼 수 있는 행동을 하는 동물들이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과 동일한 절망과 낙심의 자리에 이르는 동물은 없을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를 무시해왔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독특성은 여전히 무시될 수 없고 경험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절망에 이르는 존재이기에,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실,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말했을 때, 그는 역설적으로 ‘절망이 구원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다양한 정도로 절망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또는 그와의 헤어짐, 경제적 실패, 명예의 실추, 공개적 수치를 경험하는 일, 치유되지 않는 질병이나 건강의 문제 등을 통해서 절망을 경험합니다. 절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독교 신앙은 무엇입니까? 이런 실망 속에서 절망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2. 부활이 없다면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가정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도 마지막에 부활할 소망이 없다면, 만일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부활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실제로 바울 사도는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고린도 사람들의 경향을 마주하면서, 부활 신앙의 실재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런 가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A. 절망은 정당하다.
부활이 없다면, 절망은 모든 인생에서 정당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즉,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다 망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5장의 전반부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3, 16절).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 너희의 믿음 모두 헛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14,17절).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 자신은 거짓 증인이 될 것입니다(15절).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17절). 또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죽은 사람들은 망한 인생들이 될 것입니다(18절). 그들은 철저히 속은 인생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그저 이 세상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19절).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만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한 인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부활이 없다면 말입니다. 절망이 우리 인생에서 정당성의 자리를 얻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모든 순간에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지 않습니까?

B. 순간을 즐겨라!(carpe diem)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 목을 매게 될 것입니다. 라틴말 그대로 많이 쓰이는 표현이 있습니다. Carpe diem! 직역하면 ‘이 날을 잡으세요’라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순간을 즐기세요’라는 말입니다. 우리 노래 가운데,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며는 못 노나니”라는 가사도 정확히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활이 없는 사람들의 정직한 인생관을 보여주는 표현들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최후의 심판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의 순간까지만 드러나지 않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가(可)할 것입니다. 지금을 즐기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도덕을 무시하는 수준으로 가지 않을 길이 없습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있는 젊은 연예인들의 도덕적 일탈이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부활이 없다면,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간이게 만드는 모든 고상함과 덕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타락한 인간에게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많은 종교들은 내세를 말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기대어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지금을 즐겨야 한다는 욕구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윤리의 최저선을 보장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럴 것입니다. 우리는 다 망한 인생이고, 기껏 이 세상에 숨이 붙어있는 동안을 즐기자는 인생에 모든 것을 걸게 될 것입니다.


3. 부활이 있다면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모든 것은, 가정일 뿐입니다. 부활은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는대로, 우리 모든 신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 모두가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의 부활은 신자들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이제 우리는 부활이 있다면, 우리가 부활을 믿는 신자들이라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결코 관념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우리의 삶의 내용을 바꾸지 못하는 무력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있고,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며, 우리가 다 주님 재림하실 때 부활할 것이 분명하다면, 적어도 우리 삶에서 두 가지 차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A. 끝이 끝이 아니다.
첫째는 끝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젠 망했다.” 또는 “이젠 모든게 끝났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끝이 끝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세상에서 정말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은 이 조차도 끝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끝을 선언하는 절망은 부활 신앙 앞에서 결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절망적인 순간들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 앞에서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절망하지 않을 힘을 가집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들의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의 죽음을 마주하며 절망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주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야 그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정말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며칠만 일찍 오셨어도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안타까움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말에 묻어납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라고 말했고,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32)”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나사로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부활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임계 점 너머로 갈 것을 요구합니다.

B. 절망을 마주할 용기—아브라함(히 11:19)
이것은 달리 표현해서, 절망을 마주할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자는 절망을 마주할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세상에 그 누가 절망을 마주할 만큼 강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절망을 마주할 용기를 가집니다. 가령,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창 22).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정말 절망적 상황에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내 사라와도 상의를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홀로 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그 상황을 회피하지 않았고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 모리아 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젠 정말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만류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순간 아브라함의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 명령을 회피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지 않고, 이 절망의 순간을 마주하게 한 것은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절망을 마주하게 하는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다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C. 한시적인 것을 사소하게 여긴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한시적인 것을 사소하게 여기게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기쁘게 하고 때로는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한시적인 것들, 그저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점에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낙담하게도 되지만, 결국은 사소한 것으로 여길 힘을 가지게 됩니다. 단지 그 일들이 사소하기 때문에 사소하게 여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들이 한시적인 일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영원에 이르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일들이 아무리 크고 심각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다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여기에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삶에 유익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더해집니다. 이런 신앙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일희일비하기 않게 합니다.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를 바라보게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4. 부활의 소망이 믿음을 강화하고 지지한다.
이와 같이, 부활을 믿는 신앙은 끝처럼 보이는 상황을 끝이라고 선언하지 않게 하고, 절망을 마주할 용기를 가지게 하며, 한시적인 것을 사소하게 여기게 합니다. 만일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이 뗄 수 없는 관계로 복음을 온전하게 하는 요소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사실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은 본질적으로 소망으로 충만해 집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주님 오실 때 자신이 부활할 것도 압니다. 이 소망은 믿는 자의 믿음을 강화하고 지지하고 받쳐줍니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의 믿음을 죽은 믿음이 되게 하지 않고 믿음을 따라 행하고 살게 하는 힘이 되게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신앙이 힘이 없고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절망을 마주하게 할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신앙이라면, 여러분은 부활을 믿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말하는 세상의 거짓말을 간파하게 합니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의 믿음을 확신으로 인도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순교의 제물이 되면서도 믿음을 타협하지 않았던 믿음의 선배들을 그토록 견고하게 만들어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의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받아 주신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육체의 죽음을 지나면 그들은 영광의 주님께 이르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에 그들은 아멘이라고 응답한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5. 바울 사도가 설명하는 부활의 소망
바울 사도는 이런 부활의 소망을 고린도 사람들에게 주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이 긴 편지를 마치기 전에 15장에서 부활에 대한 논의를 길게 쓰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50). 우리가 얻을 부활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을 가지고 받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이 몸을 가지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썩어질 몸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는 부활과 관련하여 한 가지 이슈가 있었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은 부활하여 영광의 몸을 입게 된다고 하더라도, 만일 살아있는 상태에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썩어질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문제를 다루어야 했는데, 그것이 51~55절입니다. 사도는 한 가지 비밀을 말한다고 하는데, 그 비밀은 다름 아닌, 이 문제, 살아있는 상태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때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살아있는 자들도 부활의 영화로운 몸으로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51). 여기서 사도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주목해보면 사도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순식간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atomos’라는 말인데, 여기서 원자를 의미하는 atom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더 이상 쪼개어질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홀연히’라는 단어는 직역하면 눈을 깜빡이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마지막 나팔은 그리스도의 최종적 승리를 선포하는 승리의 나팔 소리를 의미할텐데, 그 나팔이 울려퍼질 때, 살아있는 신자들의 몸은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우리를 영광스럽게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할 때 믿었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아들을 순식간에 다시 살리실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그토록 우리를 괴롭혔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고 종종 절망과 낙심으로 인도하던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썩을 몸을 영광의 몸으로 순식간에 홀연히 영광스럽게 변화시키실 그 때에, 그 모든 일들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안고 살아야만 했던 그 일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속에서 영광스러운 일들이었음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부활의 날에 변화의 핵심은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는 것이며,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53). 그날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대로(사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실 것입니다(54). 죄는 죽음을 초래하는 독침이 되어 우리를 찔렀고, 율법은 죄가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었습니다(56).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승리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의 죽음의 순간에 설지라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는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부활 신앙을 설명한 뒤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만일 부활이 없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고 말했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전도도, 믿음도, 모든 수고가 다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존재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보증이 되셨습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모든 죽은 자가 다 일어나고 살아있는 자들도 다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옵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수고한 모든 일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왜 이토록 열매가 없는지, 왜 이토록 눈에 보이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지 고민하며 낙심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했던 우리의 모든 수고, 우리가 흘린 모든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없이 믿음과 불신 사이를 오가면서도 주님을 붙들었고, 주님께 소망을 두었던 그 모든 일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이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눈에 보이는 결과를 즉각적으로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십시오. 주님이 아시며 주님이 갚아주실 것입니다. 모든 일을 행하되 주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신실한 믿음으로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이 땅에서 믿음으로 행한 모든 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날,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지는 날에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6. 적용과 교훈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두 가지로 적용적 교훈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A.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과 싸워라.
첫째는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과 매일 매순간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다소 과장된 표현입니다. 조금 완곡한 표현으로 고쳐 말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믿지만, 부활의 직전까지만 바라보고 부활을 기대하지 않는 믿음과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활은 반드시 먼 미래에 일어나게 될 우리의 부활 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매일 매순간 우리는 삶에 일어나는 절망의 그림자와 싸워야 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에덴 동산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관계의 상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정서적 슬픔, 경제적 곤경, 자녀들이 처한 곤경, 거듭되는 실패 또는 너무나 길어지는 고난이 주는 좌절감, 질병이나 건강의 상실로 말미암은 낙심과 절망…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삶의 현실 앞에서, 그것들을 피하거나 도망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하면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분의 믿음의 수고를 멈추지 마십시오. 이 모든 삶의 조건들 속에서 여러분을 위협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하려는 마귀를 향해서 말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이라는 시간에 마주해야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앙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홀로 싸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 믿음의 싸움의 줄을 결코 놓지 마십시오.

B. 날마다 그날을 바라보라.
그리고 날마다 그날을 바라보십시오. 그날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십시오. 아침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것을 하십시오. 저녁에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에도, 그날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한낱 인생이라는 잠깐 있다 지나가고 마는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시오. 우리가 인생 중에 누리는 행복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듯이,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게에 비하면 잠시 누리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고후 4:17). 단지 인생에서 어떤 상황을 역전시켜 달라는 것이 여러분이 하나님께 아뢰는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아뢸지라도, 여전히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주님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온 세상에 온전하게 이루어지고, 또한 내가 거룩하고 영화로운 존재,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아뢰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날마다 그 날을 바라보는 신앙에 우리를 머물게 하고 날마다 더 가까이 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