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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1). 두루마리와 어린 양

요한계시록 5:1-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4-19

말씀내용
두루마리와 어린 양 (계 5:1-14)
우리는 오늘로 요한계시록을 31번째로 상고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강해를 들으시며 따라오는 여러분에게 먼저 두 가지 주의 사항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요한계시록은 먼 미래나 종말에 일어날 특정한 일들의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 지극히 중요하고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5장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미래적이고 종말적인 광경을 보여준다기 보다, 천상의 실재를 보여주되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젠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미 그러하다는 관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요한계시록을 상고하는 여러분의 관심이 엉뚱한 데로 흘러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둘째로 강해가 자세하고 길게 진행되는 경우에는, 전체의 내용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전체를 종종 읽어 보시라고 권합니다. 주일 오후나 주일 저녁에 들은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읽으신다면 가장 큰 유익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요한계시록 전체를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60분 정도입니다. 오늘은 5장의 전반부를 강해하지만, 5장 전체를 읽는 이유도 여러분이 요한계시록 본문 전체에 더 익숙해 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럼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1. 일곱 봉인된 두루마리 (1; 3:5; 엡 1:11; 단 7:10; 겔 2:9-10; 단 12:4,9)
먼저 4장과 5장의 차이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장은 요한계시록의 열쇠에 해당하는 중요한 장이고, 하늘 보좌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장과 5장의 두드러진 차이는 4장의 중심에는 성부 하나님이 계시고, 5장의 중심에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하나님에게로 전환되는 장면의 중심에는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5장의 강해를 이 두루마리를 살펴봄으로써 시작하려고 합니다.
“내가 보매”라는 말은 독자의 주의를 끄는 말입니다. 요한이 뭔가 새로운 것을 봅니다. 그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한 두루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씨가 쓰여 있었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이심을 보았는데,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도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과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두루마리는 파피루스 조각을 이어 붙여서 둘둘 말 수 있게 제작된 고대의 책인데, 주전 3000년 경 이집트에서 개발되어 1세기 말의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파피루스 대신 양이나 염소 혹은 소의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든 양피지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세기말부터는 오늘날의 책의 형태인 코덱스(codex)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두루마리가 코덱스를 가리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두루마리는 헬라어로 ‘비블리온’(Βιβλίον)인데, 이것은 책을 가리키는 말이고 성경의 영어 bible도 여기서 파생되었습니다. 어쨌든 본문의 두루마리가 둘둘 말아놓은 책인지 오늘날의 책과 같은 코덱스를 가리키는지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루마리의 내용입니다. 안팎으로 글씨가 쓰여졌다는 것은 그 내용이 상당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일곱 인으로 봉했다는 것은 아무도 펼쳐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두루마리가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생명책이라는 견해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에게 “이기는 자는…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책은 이외에도 13:8과 20:12, 15 그리고 21:27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는 바로 이 생명책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는, 앞으로 이어지게 될 내용이 구원 보다는 심판의 내용이라는 점에서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이 두루마리를 구약성경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구약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이 봉인을 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두루마리를 구약성경으로 보는 것은 합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근거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다니엘 7장이나 에스겔 1-2장의 내용에 비추어볼 때,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셋째로 미래의 대환난에 대한 ‘특별한’ 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미래의 일만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충분한 설명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계획을 담은 ‘특별한’ 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장 이후의 내용과도 잘 연결되고, 하나님과 심판과 구원의 계획을 시행할 주권을 가지신 분이 주님이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7문에 비추어 봐도 합당합니다. 7문답은 이러합니다.
(7문) “하나님의 예정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예정은 그 뜻대로 하신 영원한 경륜이신데 이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되어 가는 일을 미리 작정하신 것입니다.”
두루마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작정을 기록해 놓은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곱 인으로 봉인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기록된 내용을 볼 수 없다는 의미를 넘어, 아무도 하나님의 작정을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에베소서 1:11).”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시행할 주권을 가지신 분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이점에서도 이 견해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두루마리에 대한 또 하나의 가설이 있습니다. 그 가설은 두루마리가 1세기 로마의 유언장과 흡사한 점이 많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유언장은 위조나 변조를 방지하기 위해서 뒷면에 내용을 요약해서 기록함으로써 안팎에 쓰여졌었고, 7명의 증인이 증언하고 각각 봉인했으며,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공개가 되고(봉인이 제거되고) 상속에 관한 법적 약속이 효력을 가지게 되고, 신뢰할만한 사람이 유언의 집행자로서 유언 내용을 시행하게 됩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당시의 유언장은 형식 면에서 두루마리와 비슷한 점들이 많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은 이제 일곱 인이 해제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사건들과 이어지는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심판을 포함하여 6장부터 22:5에 이르는 내용을 포괄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가 하나님의 작정을 담고 있고 그 인이 해제됨에 따라 그 내용들이 효력 있게 역사 속에서 시행될 것이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모두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루마리의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이 구약 성경에서 인유하는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군데를 볼 수 있는데, 다니엘 7장과 에스겔 2장입니다. 먼저 다니엘 7:10입니다.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다니엘 7:10).”
다니엘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고 거기서 또한 심판을 베푸는데 놓여있는 책들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에스겔서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에스겔 2:9–10).”
에스겔은 하늘 보좌를 본 후에, 안팎에 글이 있는 두루마리 책을 받게 됩니다. 거기 쓰여진 말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들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이 본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도 봉인하라고 명하십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다니엘 12:4,9).” 아직 그 계시의 말씀을 실행할 자격을 가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2. 두루마리를 펴고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 (2)
요한이 “또 본” 것은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그 힘있는 천사는 외쳤습니다. 이 힘센 천사는 일반적인 천사와는 구별되는 천사로 하나님의 대변인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10:1과 18:21에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봉함하라는 명령을 받은 다니엘과는 달리, 요한은 “그 인을 뗄 자”를 찾는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고, 이 마지막 때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계 1:18-19).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실행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고 그리스도만이 성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십니다. 힘있는 천사가 외친 말은 “창조 질서 속에서 이 계획에 대해 주권적 권세를 가지신 분이 누구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의 계획을 집행할 권세를 가진 그가 인봉된 두루마리의 인을 뗄 자격을 가진 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9-10절의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에서도,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라는 내용이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요한의 울음의 의미 (3-4; 출 20:4; 마 6:9-10)
힘있는 천사의 외침이 있은 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요한계시록 5:3).”
‘하늘 위, 땅 위, 땅 아래’라는 3중 구분은 우주를 셋으로 구분하는 고대인들의 방식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십계명의 이계명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나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애굽기 20:4).”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천사에게도, 하나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그룹이나 스랍, 혹 네 생물이나 이십사 장로들에게도 그것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의 수많은 천군 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위를 포함하여 온 우주에 그 인봉을 뗄 자격을 가진 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할 주권을 가진 자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3절의 침묵의 의미입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요한의 울음이었습니다. 4절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요한계시록 5:4).”
이 울음은 크게 통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크게 울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울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는 왜 울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 두루마리의 인봉을 뗄 자가 없다는 것 때문에 울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 말입니다. 단지 두루마리의 내용을 보고 싶은 궁금증 때문입니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요한은 이 두루마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루마리의 인봉이 해제되고 펼쳐져야 거기 기록된 하나님의 작정이 실현된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날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요한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9–10)”라는 간절한 기도의 심정으로 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이 기도는 노사도에게 절박한 간구였습니다. 인이 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자신은 물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아무도 이 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열 자가 없다는 사실에 요한은 절망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영광스러운 명령과 권세를 받았던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권세와 자격을 상실한 것을 요한은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과연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이 우는 이유를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ckson)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갈망과 비전이 우리에게도 항상 존재한다면, 우리는 요한의 울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루마리가 열리게 되면, 우주는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위하여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속의 목적이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고 두루마리의 내용들이 우주의 역사에서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두루마리가 열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쓰라린 시련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고, 교회를 박해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없을 것이며, 신자들의 궁극적 승리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도, 장래의 유업도 없을 것이다.”


4. 사자와 어린 양 (5-7; 창 49:9-10; 사 11:1,10; 출 12; 사 53:7; 마 28:18; 사 11:2)
이제 울고 있는 요한을 향하여 이십사 장로 중 하나가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요한계시록 5:5).”
장로의 말은, 구약 성경의 두 말씀을 인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 지파의 사자’라는 말인데, 이는 아들 유다를 향한 야곱의 예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세기 49:9–10).”
유다의 자손으로 왕이 나오고,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오실 왕, 메시아는 정글의 왕인 사자로 묘사됩니다.
둘째로, ‘다윗의 뿌리’는 이사야 11장 1절과 10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이사야 11:1,10).”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뿌리는 후손, 자손을 가리킵니다. 장로가 ‘다윗의 뿌리’라고 말한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는 모두 원수들을 심판하여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구속과 심판의 계획을 시행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장로의 말은, 유대 지파의 사자 곧 다윗의 뿌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기셨기 때문에 그는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장로가 말한 사자가 어디에 계신가 둘러봅니다. 그런데 사자는 보이지 않고, 한 어린 양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요한이 본 것은, 사자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표상인 어린 양, 그것도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었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5:6a).”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구약에서 적어도 두 개의 이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는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출 12:1-14, 21-28).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던 날,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랐고 그 밤에 그 어린 양을 먹었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그 피를 보고 그들을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유월절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구원을 기억했습니다. 둘째는,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 당하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말씀을 할 때, 주어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이미지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
왜 요한은 정글의 왕인 사자가 아니라 약하디 약한 그것도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보았습니까? 왜 승리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이 뿌리는 어린 양으로 등장을 합니까? 여기에는 성경에서 가장 큰 역설, 인류 역사 최대의 역설이 있습니다. 원수를 이긴 사자는 바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입니다. 요한이 보는 어린 양, 그가 사자입니다. 어린 양은 원수를 패배 시켰지만, 죽음이라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졌습니다. 뿔은 구약 성경에서 힘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일곱 뿔을 가졌다는 것은 어린 양이 전능한 권세와 주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는 말씀하신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아 가지신 분입니다(마 28:18). 그가 가진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일곱 영이더라”고 했습니다. 일곱 눈은 전지한 지식으로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주님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그대로입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
요한이 사자가 아닌 어린 양을 보았다는 것은, 복음의 역설, 십자가의 신비를 가장 놀랍게 보여줍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인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써, 죽음과 죄와 마귀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는 힘과 폭력, 칼과 군사력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시고 폭력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이기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자처럼 용맹하게 죄를 직면하셨고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을 향해 주저없이 걸어가셨습니다.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는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역설이자 신비는 하나님께서 군사력의 화염과 분노가 아닌 십자가의 약함을 통하여 승리를 성취하셨고 그 승리를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것이다.”
요한이 본 어린 양은 서 있었습니다. 왜 그는 서 있었을까요? 조엘 비키(Joel Bekee)의 설명입니다. “그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서 계신다. 그가 승리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 모두가 당신과 함께 하늘에서 영화롭게 되기 까지는 자기 백성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바쁘게 서 계신다. 성령을 보내시고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며 당신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하시고 나아가 그들을 구원하신다.”
이제 요한은 그 어린 양이 나아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것을 봅니다(7). 두루마리를 취하셨다는 동사는 완료형시제인데, 이는 그 책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 그 책을 당신의 손에 갖고 계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지금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라고 묻는다면 성경을 믿는 우리는,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바로 그리스도시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코로나19로 멈추어 버린 세상을, 그리고 수 없이 병들고 죽어가는 이 세상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두루마리의 인을 떼신 주님께서 세상 역사를 주관할 권세를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5. 교훈과 적용 (롬 11:36; 마 26:53; 고후 13:4; 계 14:4)
이제 말씀을 맺기 전에, 두 가지 적용적 교훈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의미요, 열쇠요, 주관자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은 여러분이 만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역사에 어떤 바른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1:36).” 이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어린 양이 인을 떼기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포함하여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F.F.브루스의 말대로, “하나님의 목적에 성취를 가져오는 것은 새로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도래”입니다.
두루마리의 인봉을 뗄 자가 없어서 울었던 요한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심정으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십니까? 역사에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모든 작정을 이루고 성취할 열쇠를 가진 분을 우리는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재앙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께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마땅합니다. 주님은 모든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십니다.
둘째로, 유대 지파의 사자이신 주님께서 이기신 방법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 하늘의 열 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마 26:53). 주님은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 폭력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심으로, 정복이 아니라 정복 당하심으로 이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린도후서 13:4).”
이것이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요한은 부활하신 사자 대신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본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그 모습을 보이셨을까요? 왜 부활이 아니라 죽음입니까? 그리스도의 이김은 부활 이전에, 주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미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1세기 말, 환난과 박해 가운데 있던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밧모 섬에 유배당한 노사도 요한은 어떻습니까? 신자는 고난과 환난 중에 믿음으로 인내함으로 이미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상을 받기 전에, 이미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주신 편지에서도,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을 언급하셨습니다. 그 이김은 부활을 해야만 주어지는게 아닙니다. 병에서 치유를 받고, 환난에서 벗어나고, 궁핍에서 풀려나야만 일어나는게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질병 가운데에, 환난 중에, 궁핍 가운데,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문제들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인내하고 살아간다면 그는 이미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이기신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께 붙여진 칭호 중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어린 양입니다. 사자가 아닙니다. 이 ‘어린 양’(ἀρνίον)은 신약 성경에서 30회 사용되었는데 29회가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그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입니다(계 14:4).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부활하신 어린 양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보이신 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승리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은 너무나도 분명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십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말하고 부활을 강조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부활을 강조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병에서 치유 받고 고난과 어려움에서 놓임을 받는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좀 위험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1세기 말의 성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들이었음에도 여전히 고난과 박해와 환난의 자리에 머물러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그랬습니다. 치유와 해방, 건강을 통해서만 이기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로 이기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진정한 승리의 방식, 십자가의 방식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격렬한 싸움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긴 자로다.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 같이 내가 네게 나와 함께 앉게 하여 주리라(계 3:21).”
마르틴 루터는 16세기 로마 카톨릭교회를 향해 그들의 신학은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능력과 힘을 강조하고 인간을 높이는 승리주의적 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의 신학’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루터는 알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비천하고 낮아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우리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16세기의 로마 카톨릭교회처럼 승리주의의 기독교, 영광의 신학으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정치적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고 물질의 힘을 의지하여 행동하며 크기를 추구하는 경향은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타락의 명백한 징후입니다.
성도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일평생 신실하게 그 길을 따르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