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성경장절분류 > 성탄주일 2018 - 성육신의 영광

핵심단어별 설교모음 - 신론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성탄주일 2018 - 성육신의 영광

요한복음 1:14-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2-25

말씀내용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가장 신비하고 놀라운 본문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오셨다! 창조주께서 피조물 가운데 오셔서 피조물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성육신이 바로 우리가 기념하는 성탄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성육신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성육신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일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낮아지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사건을 영광이라는 단어로 묘사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복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 성육신의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1. 성육신은 영광이다.
먼저 본문이 성육신을 영광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A. “하나님께 영광,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눅 2:14)”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목자들에게 천사들의 계시가 임했다는 사실을 전해줍니다. 베들레헴 인근에 목자들이 자기들의 양떼를 지키고 있던 밤에 주의 천사(사자)가 저들의 곁에 섰는데 그 때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고 기록합니다(눅 2:9). 목자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어떤 형태로 나타난 것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목자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인줄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이것도 인간이 식별할 수 있는 언어로 된 찬송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는 노래였습니다(눅 2:14). 성육신의 낮아짐을 천사들은 ‘화로다! 비참하도다’라고 탄식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외친 것입니다.

B. 성육신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나타났다.
주님의 탄생, 성육신을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한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성육신이 왜 영광입니까? 14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육신을 입으신 그분에게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외양으로 판단하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아야만 그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볼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성육신 안에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의 오심, 성육신은 성경이 말하는 영광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는 성공과 높아짐과 성취와 빛남 속에서 충만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성육신은 분명히 성자 하나님께서 무한한 영광을 내려놓고 유한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 아기로 오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성육신에서 주님이 얼마나 많은 영광을 잃어버리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받으시는 모든 영광을 하늘의 보좌에 내려놓고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의 사이를 거리로 환산할 수 없듯이, 주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아무도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넘어 오신 사건입니다. 한 신학자는 주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던 그 순간부터 죄인을 향하여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는 긴 나선형 계단을 통해서 그 긴긴 시간 동안 인간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하늘의 영광을 떠나서 내려오고 계셨다고 말함으로써 주님이 잃어버리신 영광의 크기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군과 천사들은 이 사건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은 역설입니다. 성육신이 성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적 영광을 잃어버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또한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의 몸으로 사신 삶: 순종(요 17:4)
주님은 어디선가 홀연히 성인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여자의 몸을 통하여 오셨을 뿐 아니라 부모의 돌봄이 없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33년의 삶을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가난이라는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 땅에서 유대인으로 사셨습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당신께서 창조하신 땅에 오셔서 한 인간으로서 33년을 사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한한 영광을 잃어버리신 일인지 모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하늘과 땅의 창조자가 이로부터 겪었던 수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생각해보자. 약 30년 동안 그는 노동자 사이에 섞여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삶을 사셔야 했으며 그동안 다른 노동자들과 같이 무시당했으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주님의 성육신과 삶을 본다면, 그리고 거기서 주님의 낮아지심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비참하다거나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삶은 오직 성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스스로를 낮추사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는 순종, 인간으로 인생을 사시는 순종을 성부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빌립보서 2:5~8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또 하나의 낮아지심, 십자가

A. 십자가가 영광이다(요 12:23, 28; 13:31; 17:1, 4~5).
주님의 낮아지심은 성육신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의 극치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맞으셨고 침뱉음을 당하셨으며,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벌거벗기고 인간이 만든 가장 잔인한 형틀인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창조주는 더 이상 낮아지실 수 없는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드리실 때, 이것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잔혹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던 죄 없으신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와 진노를 받아서 끊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것을 누가 과연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에게는 순교자들이 누릴 수 있었던 영광스러운 기쁨과 같은 것들은 없었습니다. 아담 이래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범했던 모든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형벌과 저주를 한 몸에 받으신 것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십자가도 영광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2:23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28절에 보면,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내가 이미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십자가 사건이 주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사건이라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1도 보십시오.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식사 자리에서 나가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었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눈 앞에 두고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실 때에도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요 17:1).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영광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영광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낮아지는 것이고, 한 없이 낮아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광입니다.

B. 십자가, 하나님의 증명(롬 3:25; 5:8)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5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죄를 반드시 공의로 다루신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우심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하나도, 작은 것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셨고 그에게 진노와 저주를 부으셨습니다.
또, 로마서 5:8을 보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이 두 구절에서 보듯이, 십자가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벽하게 드러내고 증명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그냥 넘어가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십자가로써 증명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실 만큼 죄인을 사랑하셨다고 십자가에서 증명하셨습니다.
주님은 낮아지심의 극치인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창조주이셨고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으며 성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시는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18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어도 여전히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의 권리와 영광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의 낮아지심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도무지 보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설명하시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그것이 18절에 ‘나타내셨느니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인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소경입니다.

4. 적용
성육신을 통해 낮아지신 주님은 영광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네가 하나님을 순종하고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인하여 영광을 받었다고 하십니다.

A. 벽을 무너뜨려라.
세상에는 의외로 벽이 많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나누는 벽입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학벌, 교양, 지연, 혈연, 기타 많은 장벽들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며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면서 살아갑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이 벽을 허물었습니다. 주님이 비천한 인간이 되심으로써 이 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주님은 당시 보통 사람들이 업신여기던 창기와 세리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심으로써 그 벽을 허무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셨어도 존경받는 자들과 성공한 자들과 종교적 기득권자들과 함께 하시기 보다는 세상에서 낮아질대로 낮아진 사람들,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좀 잘 나가던 사람들 중에서 제자를 선택하시지 않으셨고 갈릴리의 어부들 중에서 그리고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사람이 세워놓은 벽들을 다 허물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허물어진 벽을 통해서 이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과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이 속해 있는 그룹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용감하게 더 낮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얻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보통은 천대받기 쉬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내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로 다가서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신앙 인격입니다. 신앙은 벽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값을 지불하라.
이 성탄절에 성육신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값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설명하시는 말씀으로 주님은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하나님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드러내기 위해 값을 지불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자신의 인격과 삶을 통해 남편과 아내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이웃들에게, 그리고 모든 이에게 반영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낮아짐을 경험할 수 있고, 모욕을 당할 수 있으며, 마음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도의 소명입니다.
입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과 성품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설명하는 일에 값을 지불하십시오. 여러분이 서 계신 모든 자리가 바로 여러분이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설교자로 서야 하는 강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낮아짐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은 실로 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