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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단어별 설교모음 - 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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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5). 높이시고 낮추시는 하나님

시편 75:1-10, 베드로전서 5:6, 누가복음 14:1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2-03

말씀내용
1. 75편의 성격
A. 시편 73,74편에 대한 응답(시 74:22; 75:2-5,8)
우리는 믿음의 싸움이 깊어지는 경우들을 시편 73편과 74편에서 보았습니다.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의인의 실패와 악인의 번영이라는 사실을 놓고 씨름을 했습니다. 그리고 74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 같은 현실 상황 속에서 바라는 응답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는 씨름을 감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시편 75편은 시편의 배열의 맥락에서 보면, 앞의 두 시편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75편은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자가 건강과 번영을 누린다는 사실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리고 기가 막힌 현실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없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74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시편 74:22).” 하나님은 보셨고 아셨으며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정한 기약이 이르면 바르게 심판하실 것입니다(75:2).
이점에서, 시편 75편에는 신자들을 위한 통쾌함이 있습니다. 이것을 데렉 키드너는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반전을 기뻐하는 시편”이라고 말했습니다(75:8).
75편은 어떤 역사적 정황에서 기록되었는지 특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위기의 때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는” 때인 것 같고(3), 오만한 승리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는 때였던 것 같습니다(4-5). 그래서 이 시편은 하나님의 교회가 고통을 당하는 모든 때에 적절하다고 크리스토퍼 애쉬는 말합니다.
B. 예배의 원리를 보여주는 시편
75편을 해석하는데 한 가지 어려움은 각 구절의 화자(話者)를 결정하는 일인데, 저는 리처드 필립스의 구분에 기초하여 이해하려고 합니다. 1절은 1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5절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자기 백성에게는 돌봄을 확신시켜 주시고 교만하고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경고하십니다. 6-8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시편 기자가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백성에게 권면 혹은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9-10절은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백성의 반응입니다. 이 구성은 이 시편 자체가 하나의 예배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배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그 말씀을 들은 백성은 다시 반응합니다. 이점에서 75편은 참된 예배의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2. 감사와 찬송(1; 마 6:9; 롬 10:6-8)
본문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1).” 시편 기자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그 이유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고 하반절에 설명됩니다. 백성들은 문제가 없고 평안하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시편은 위기의 때, 악인들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쓰여진 시로 보입니다(3-5). 그럼에도 백성이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이름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임재, 그리고 언약의 약속들과 그가 행하신 모든 기이한 일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했을 때(마 6:9), 정확하게 같은 의미입니다. 상황은 하나님의 임재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의 이름이 가깝다’고 고백합니다. 시인과 백성은 믿음의 눈으로 그렇게 느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라는 말은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재진술함으로써 그들 마음에 감사함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깝다는 말은, 그들이 어떤 신비 체험을 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항상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명기 30:12-14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로마서 10:6–8).” 주의 백성은 주의 말씀을 통해서 주의 가까우심을 경험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3. 하나님의 말씀(2-5; 벧후 3:9; 창 15:16; 갈 6:9-10; 출 5:2; 단 4:30; 행 12:23)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2-3).” 하나님의 심판이 정한 때에 바르게 행해질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위로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위로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들을 듣습니다. 이 말씀도 일차적으로는 1세기 말 신앙과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던 성도들을 위로하는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모든 시대, 참된 믿음과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려는 모든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정한 기약이 이르면’ 바른 심판, 공평한 심판이 행해질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심판의 때가 늦지도 이르지도 않을 것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종종 늦다고 느낄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느끼기에 더디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를 발견합니다. 첫째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임하기까지의 기간은 교회가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악이 차기까지, 악이 그 결과를 보기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시면서 사대가 지나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창 15:16).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악이 심판을 받아야 함과 당신의 심판의 정당성을 온전하게 나타내십니다.
실로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오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크게 유익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인애를 구하면서 살아가도록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낙심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라디아서 6:9–10).” ‘때가 이르매’ 거둘 것입니다. 헛된 수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수고를 보셨고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한 기약이 이르면 최종적인 정의를 시행하실 것입니다.
3절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3).” ‘소멸된다’는 말은 ‘낙담하다, 녹아내리다’라는 의미인데, 온 세상과 사람들이 다 녹아 내려도, 내가 세상의 기둥을 붙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보다, 섭리와 통치 사역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 예수님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씀합니다(히 1:3). 역사의 모든 위기의 때에 땅이 흔들리고 모든 사람이 낙담하고 녹아내릴지라도, 하나님께서 땅의 기둥을 붙들고 계시니 성도들은 온 세상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그 순간에도 결코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제 세상의 모든 오만한 자들, 악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4–5).” 뿔을 높이 든다는 말은 스스로 자기 힘을 키우고 그 힘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인물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입니다. 그는 오만방자하게 하나님께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5:2).”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어떻습니까?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다니엘 4:30).” 이것이 오만하게 행하고 뿔을 드는 것이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헤롯 아그립바 왕을 볼 수 있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사도행전 12:23).”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스스로 영광을 취한 헤롯 아그립바를 하나님은 쳐서 죽이셨습니다. 이외에도 역사에서 우리는 이런 인물들을 많이 만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왕이나 대단한 존재들만이 해당된다고 여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이런 오만함을 드러내고 뿔을 높이 들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목은 멍에 지기를 거부하는 목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경건과 거룩의 멍에를 지지 않고 무례한 말을 일삼튼 자들입니다. 반대로, 성도들은 경건과 거룩의 멍에를 지고 절제된 선한 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렇습니까?


4. 시편 기자의 설교(6-8; 눅 14:11; 22:42)
이어지는 6-8절은 시인이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기초하여 설교를 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6-7절입니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6–7).” 사람들은 높아지는 이유를 자기 자신이나 혹은 다른 요인에서 찾거나 혹은 우연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일은 동쪽, 서쪽, 남쪽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동쪽, 서쪽, 남쪽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우리가 찾는 모든 이유들을 가리킵니다. 내 실력, 운, 우연, 인맥 등 내가 높아진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남쪽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광야’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남쪽에 위치한 브엘세바와 이집트 사이에 위치한 광야를 보통 남쪽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남쪽이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높이는 일은 어디서 말미암습니까? 그것은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낮추시고 어떤 사람은 높이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를 높임으로써 결국에는 비참하게 낮아지게 하시고, 경건한 자를 낮추심으로 후일 높임을 준비시키십니다. 높아짐과 낮아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그것은 최고 인사권자의 몫입니다. 주님은 혼인잔치 비유를 이렇게 결론지으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11).” 스스로 높은 자리를 추구하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네가 할 일이 아니고 내가 주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신자들은 스스로 높아지기를 바라고 주장하는 이 새상에서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은 이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8).” 심판의 메시지는 악인들, 오만한 자들에게는 언제나 경고이지만, 다시 말씀드리건대, 성도들에게는 언제나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우리는 주님에게서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무서운 진노의 잔을 우리를 대신하여 다 받으셨다는 사실은 성도들에게는 무한한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모든 오만한 자들과 악인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미워하는 자들은 그 진노의 잔을 찌꺼기까지 다 마시게 될 것입니다.


5. 은혜 받은 백성의 반응(9-10)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설교자를 통해서 다시 그 말씀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먼저 9절입니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9).” 물론 여기서 1인칭 단수 대명사인 ‘나’는 백성들을 인도하는 시인이 백성을 대표하여 하는 고백임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그들이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리라는 고백은 증인의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또 그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자가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10절을 보지요.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10).” 10절은 화자(話者)가 누구인지 논란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번역본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번역을 하지만, 시인 자신이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70인경, NRB).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면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시인의 말이라고 이해한다면, 백성을 대신하여 시인은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 말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행동하고 살겠습니다”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성품에 정렬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H.C.류폴드(Leupold)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들은 할 수 있는대로 악인들의 영향력을 제어하고 의인들의 성공을 증진시켜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단순히 내면의 종교로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신앙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관계, 그리고 제도와 법률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뿌리 없는 행동주의가 아닙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 이것이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존재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낙태나 차별, 갑질과 동성애 등 모든 종류의 부도덕과 불의에 저항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10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의 이런 고백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6. 교훈과 적용(벧전 5:6; 삼상 2:7,10; 눅 1:51-53)
말씀을 정리하지요. 그리스도인은 예배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오는 모든 선한 것은 참된 예배의 열매입니다. 시편 75편은 예배라는 정황에서 드려지는 고백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정의 곧 심판과 구원으로 정한 기약의 날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교만과 악함을 견뎌내야 하고 또한 저항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높이시고 낮추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고, 그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경쟁을 하게 되면, 그들은 신앙과 마음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높이고 낮추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베드로전서 5:6).”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시편에서 한나의 노래(삼상 2:1-10)와 마리아의 송가(눅 1:46-55)의향내가 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한나는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사무엘상 2:7,10).” 또 천사 가브리엘이 메시아의 수태를 알려주었을 때 마리아는 어떻게 찬송했습니까?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누가복음 1:51–53).”
이런 고백은 모든 시대, 모든 참된 신자들의 고백입니다. 높이시고 낮추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마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며 자족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