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성경장절분류 > 시편강해 - (46). 피난처

핵심단어별 설교모음 - 신론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시편강해 - (46). 피난처

시편 46:1-1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09-25

말씀내용
두려움은 의심이나 절망의 감정과 함께 인간의 실존이 경험하는 최악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환경 때문에도 주어지고,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은 처한 환경이나 미래의 두려움에 대하여 투사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와 연결될 때 우리를 더 깊은 두려움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46편은 그런 두려움의 문제, 그것도 최악의 시나리오와 연결된 두려움의 문제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을 보지요.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이것은 시인이 맞닥뜨린 현실에서 그가 그려내는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최악의 상황을 진술하면서도, 3절 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오늘 우리가 이 시편을 상고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시인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까?
두려움과 신앙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신앙은 인생에서 겪는 보편적 두려움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게 합니까? 두려움의 현실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믿는 우리는 시인의 이 고백을 충분히 이해합니까? 공감합니까? 그렇게 고백하고 살고 있습니까? 이 본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야 합니다.


1. 마르틴 루터의 시편
시편 46편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영감을 받고 그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 작곡한 시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제임스 보이스는 시편 46편 강해의 제목을 ‘마르틴 루터의 시’라고 붙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마르틴 루터를 로마서 1:17과 연결시키곤 하지만, 그는 시편을 특별히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전, 그는 이미 시편을 가르치는 신학교수로서 시편을 연구해왔습니다. 후일, 종교개혁의 선봉에 선 루터는 늘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동료 필립 멜랑히톤에게 가서 시편 46편의 찬송을 함께 부르자고 한 일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시편 찬송을 통해서 그는 힘을 얻곤 했던 것입니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결국 시편 46편에서 영감을 얻어 독일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는 찬송 중 하나인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만들었습니다. 이 찬송은 시편 46편처럼, 현실의 무시무시한 도전 속에서도 결국 하나님께서 이기실 것이라는 확신을 잘 보여줍니다.
또 하나 이 시편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7세기 초(1604-1611), 영국에서 킹제임스성경을 번역하던 당시, 학자들은 당대 최고 수준의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윌리엄 세익스피어(1564-1616)를 이 일에 참여하게 했는데, 어느 날 그가 46세 되던 날, 마침 46편을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시편의 앞에서 46번째 단어에 shake(흔들릴지라도, 3절)를, 뒤에서 46번째 단어에 spear(창, 9절)를 넣음으로써 이 위대한 시편에 shakespear라는 자기 서명을 넣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 시편 46편은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성을 노래하는 ‘시온의 노래’라고 불리는 7편의 시편(48,76, 84, 87, 122, 132)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온의 노래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영원히 당신의 안식처로 삼으신 곳이기에, 결코 흔들 수 없는 도성입니다. 루터는 이 시편에서, 종교개혁의 대의를 가진 참된 교회인 예루살렘을 원수가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떤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학자들은 유다 왕 여호사밧 때, 모압과 암몬 그리고 세일산 사람들의 연합군이 침략해왔던 사건이나(대하 20),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을 포위하고 모욕을 주던 사건(왕하 18-19)과 연결 짓기도 합니다. 물론 이 두 상황 모두, 너무나 황망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국가적 환난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어느 것을 이 시편의 정확한 역사적 배경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런 국가적, 군사적 환난 가운데서 쓰여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 [인도자에 따라 알라못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어에 있는 ‘알라못’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겠습니다. 알라못은 여인들이라는 의미인데, 이 시가 여성의 고음으로 부르는 찬송시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 구조
이 시편은 크게 두 연으로 나뉘어집니다. 7절과 11절이 각각의 연의 후렴구로 반복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앞의 1-7절은 시인이 겪고 있는 환난을 묘사하고 있다면, 8-11절은 환난이 끝나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승리가 주어질 것을 묘사합니다.
좀 더 자세히 나누어 본다면, 1-3절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을 신뢰하기에 모든 환난에서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내용이고, 4-7절은 두려워하지 않을 근거로,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의 성, 곧 예루살렘에 계시기 때문임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8-11절은 그분이 용감한 장수로서 나가 싸워 이기심으로 모든 전쟁을 끝내고 높임을 받으신다는 내용입니다.


3. 혼란 중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1-3).
먼저 1-3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2-3절의 묘사들은 고대 근동의 혼돈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들입니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바닷물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이런 묘사들은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한 묘사들이지만, 얼마든지 군사적, 국가적 재난에 대한 은유일 수 있습니다. 산처럼 안정적이고 변함없는 것이 흔들리는 공포적 상황을 시인은 묘사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바다는 혼돈과 위험, 그리고 죽음과 두려움을 상징하곤 했습니다. 그 바닷물이 솟아오르고 뛰놉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이 정도로 혼돈과 처참함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지라도, 시인은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이 고백이 3절 끝에 붙어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2절 맨 앞에 시작하는 말로 나옵니다. 우리 말 어법상 뒤로 가게 되었지만, 그 뉘앙스를 살려서 읽으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말입니다.”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1절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46편은 이렇게 멋진 선언적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어떤 학자는 하나님께 대한 급진적 신뢰, 철저한 신뢰라고 표현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몇 가지 상징으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피난처입니다. 피난처는 푹풍이나 전쟁의 때에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사실, 피난하다, 도피하다는 동사는 신뢰하다, 의지하다는 뜻을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편 7:1은 [우리말성경]에서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믿습니다. 나를 쫓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를 구원해 건져 주소서(시 7:1 우리말성경).” 이것은, 우리 믿음은 결국 모든 환난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줍니다.
둘째로 시인은 하나님을 힘으로 묘사합니다. 피난처가 외적으로 주어지는 방편이라면, 힘은 내적으로 주어지는 방편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서 허물어질 때에도 하나님은 내 힘의 근원이 되시고, 그 힘은 흔들릴 수 없는 견고한 산과 같습니다. 피난처는 안전한 장소라면, 힘은 공급원입니다. 이 힘으로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환난 속에서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시인은 하나님을 ‘큰 도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단지 돕는 분(a helper) 정도가 아니라 도움(help) 그 자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모든 도움이 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때에 당신의 임재를 우리에게 입증하십니다.
‘환난 중에’라고 하는 것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고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바로 2-3절이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피난처와 힘, 그리고 큰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탁월한 작가인 엘리자벳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20대 초반에 남편 짐 엘리엇(Jim Elliot)과 함께 에쿠아돌에 선교사로 갔다가, 정글 오지에 사는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나간 남편이 다른 네 명의 젊은 선교사들과 함께 창에 찔려 죽는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30세 때였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두번째 남편 애디슨 리치(Addison Leitch)가 암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런 충격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의지할 만하다고 여긴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렸다. 산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깊은 위로는 비록 모든 것이 다 흔들릴지라도 한 가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었다.”(제임스 보이스의 시편강해에서 재인용)
시인의 위로, 그리고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은 바로 이런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4. 도우시는 하나님의 임재(4-7)
4-7절은 이 혼돈스러운 상황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성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무엇이 변했습니까? 무섭게 솟아나고 뛰놀고 넘치던 바닷물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는 시내가 됩니다. 죽음을 삼키는 바닷물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강으로 변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이 이 성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4절은 낙원 곧 에덴 동산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성에 흐르는 한 시내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고대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물, 샘 또는 강은 필수 요소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다윗 성 아래로 흐르는 기혼 샘에서 흘러내리는 시내가 있는데, 여기서 물이 흘러 실로암 못을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기혼 시내로 인해 포위를 당해도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이 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렸다’고 책망합니다(사 8:6). 이 말은 하나님의 공급을 하찮게 여겨서 버렸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덮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사 8:7).
본문에서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라는 말은, 한편 에스겔이 본 성전 환상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겔 47:1-12).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큰 강을 이루게 되고 바다로 흘러가게 되는데, 이 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로부터 생명이 공급되는 것을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이와 같이, 그 시내는 끊임없이 공급되므로 하나님의 도성을 즐겁게 합니다. 여기서 ‘성’(도성)은 사실, 장소 개념을 넘어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기뻐하는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여전히 2-3절의 상황 속에서 머물러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신뢰는 이런 소망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서 이어진 소망은 다시 확신으로 인도합니다. 5-6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5-6).”
모든 것이 흔들려도, 엘리자벳 엘리엇이 말한대로, 흔들리지 않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이 흔들리지 않는 결과를 보장합니다. 하나님의 성은 견고합니다. 시인은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자신의 믿음을 피력합니다. 왜 새벽입니까? 해가 뜨고 어둠이 물러가는 시간, 새 날이 시작되는 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라고 말합니다. 뭇 나라가 떠들고 왕국이 흔들렸다는 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와 세력들이 군대를 일으키고 대적 행위를 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물소리 같고, 우레같은 소리를 한 번 발하시면, 자연 만물이 복종하고 모든 대적들이 잠잠해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이 녹았다는 말로써, 시인은 그들이 모두 파멸을 당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소리 하나로 이렇게 그들을 이기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첫번째 연의 후렴을 이렇게 씁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지금 이 상황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군대들과의 전쟁이라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표현은 주로 군사적 행동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의 모든 군대의 왕이심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시인은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피난처는 1절의 피난처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높은 고지에 있어 접근 불가능한 안전한 망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주로 ‘요새’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이 성을 넘볼 수 없고 이길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5. 승리하시는 하나님(8-11)
이제 두번째 연으로 가게 되는데, 시인은 여전히 혼돈 속에 있고 포위된 것과 같은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것이니 그것을 바라보라고 독려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라, 일어나 싸우시는 용감한 장수의 이미지로 등장하십니다.
“와서 볼지어다”라는 말로 시인은 두번째 연을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운명이 승리로 마칠 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고, 원수들은 자신들이 파멸 당할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라는 말 뒤에, 이어지는 일들에 대한 묘사들이 나옵니다. 이 묘사들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 ‘활을 꺾으심,’ ‘창을 끊으심,’ ‘수레를 불사르심(9),’ 그리고 그 끝은 ‘뭇 나라(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10)’입니다. 이 동사들은 모두 현재형으로 보이지만, 사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가리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라는 말은(8) 예언적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성’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고 했듯이, ‘땅’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적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황무지로 만든다는 것은, 멸망시키고 놀라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용사, 장수로서 일어나사,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시고, 모든 활과 창, 전쟁의 도구들을 버리게 하실 것이며, 수레 즉 전차들을 불사르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승리와 심판을 암시합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해야할 일이 명확해졌습니다. 만군의 왕으로 모든 대적을 꺾으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여기서 시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가만히 있는 것과 하나님 됨을 아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시끄러운 세상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해보려고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며, 마음에 안식을 누릴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감정적으로 소용돌이칠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입니다. 엘리자벳 엘리엇은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아는 것이, 우리 마음이 소용돌이칠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아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결국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시고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의 모든 전쟁을 끝내시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이유와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온 세상 위에 높이심으로써 역사의 목적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에 기도해온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이 온 세상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1절은 다시 한 번 후렴구를 반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이 말은 우리가 듣고 또 들어야만 할 말씀입니다. 반복해서 들을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수없이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이 안식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때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스스로에게 설교하고 들려주어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6.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이 시편은 마르틴 루터에게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땅에 마귀들 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우리의 참된 안전은 하나님과 그 어떤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돈, 하나님과 성공, 하나님과 안정된 직장, 하나님과 인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참된 안전은 오직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흔들릴 것입니다. 돈, 성공, 직장, 인맥 모든 것이 흔들리는 날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그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순간에,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아십시오. 이것이 정녕 우리의 위로와 안식과 평안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