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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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교회 - 영광스러운 교회 (2016 요한계시록 강해 1)

요한계시록 21:1~2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1-03

말씀내용
<영광스러운 교회> 계 21:1~22:5

벧샬롬교회에 목사로 부임하여 2016년 새해를 맞으면서 여러분과 어떤 주제 혹은 어떤 성경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눌까 생각하던 중, 지난 12월 요한계시록을 새벽마다 나누면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교회의 환상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합당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편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성경 본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부터 차례로 일곱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 설교 시리즈를 여는 말씀으로 성경 전체의 마지막이자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승리한 천상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눔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인지를 함께 상고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목사가 바라는 교회나 교우 여러분이 바라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고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고 섬기게 되는 복된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요한계시록 21:1~22:5을 함께 읽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교회는 개독교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부끄러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의 싸움은 물론, 여자 문제, 돈 문제로 넘어지는 목사들의 모습들 그리고 교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부도덕성들입니다. 더러는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죄악의 문제는 그렇다 치고 인간적으로 봐도 교회는 참 힘든 집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사회적 요인이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구성원 간에 동질성이 이렇게 없는 조직도 없습니다. 세상의 조직이나 기업이 가진 규모나 특성들과 비교하면 교회는 보잘 것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교회의 미래 영광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요한에게 보여주셨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으며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로 하여금 이 말씀을 읽게 하셨을까요? 당시의 고난 받는 교회, 로마제국이라는 반기독교적인 거대 정권아래서 신음하고 낙담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들에게 영광의 환상을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에스겔을 보십시오. 에스겔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거기서 예언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모든 유다 백성들은 망한 현실의 패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언을 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미래 성전의 영광의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환상은 에스겔의 영혼을 낙심에서 가슴 벅찬 감격과 영광으로 가득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환상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전 영광의 환상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개독교 소리를 듣는 교회,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교회가 아니라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때에 이 환상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만일 이 환상이 없으면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만일 이 환상이 없으면 저는 목회할 힘을 잃을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보는 성도들은 어떠한 조롱이나 비난, 고난이나 죽음도 이기고 설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환상을 보고 또 붙잡아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교회의 그림이 우리 가슴 속에 생생하면, 그런 자를 세상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2. 천상의(하늘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 그리고 승리한 교회와 전투하는 교회
본문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설명을 드립니다.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인데, 천상의 교회가 있는가 하면 지상의 교회가 있고, 천상의 교회는 승리한 교회라 부르고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라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천상의 교회, 승리한 교회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다음 주일부터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각각 볼텐데 그 교회들은 다 지상의 교회이고 전투하는 교회들입니다. 비록 지상의 교회는 문제도 많고 늘 전쟁터 속에서 고통하고 피 흘리는 교회지만, 언젠가 주님 오시는 날에는 그 교회가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말입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본문처럼 교회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3. 영광스러운 교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종말의 영광을 다루는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사실상 창세기 1~2장의 이야기와 놀라운 대조를 이루는 본문입니다. 이 마지막 두 장의 주제는 회복과 영광입니다. 마치 성경 전체를 한 사람의 저자가 쓴 것처럼 본문은 성경의 첫 두 장과 놀라울 정도로 대조를 보여줍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오늘 설교에서 다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2절에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한 아름다운 성이 내려오는 놀라운 환상을 봅니다. 그런데 이 성에 대해서 바벨론에 대한 묘사와는 달리, ‘큰 성’이라고 하지 않고 ‘거룩한 성’이라고 묘사합니다. 이 성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교회이고, 교회가 누릴 미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결혼식을 위하여 단장한 어린양의 신부(21:2,9~10)
첫째로 교회는 사람이란 것을 명심하십시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벧샬롬교회라고 할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예배 드리는 이 장소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21:2은 그 성의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거룩한 성을 신랑을 위해 단장하고 결혼식에 입장하는 아름다운 신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1:9~10절도 같은 것을 보여줍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보여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성령께서 사도 요한을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인 것이지요. 성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장소가 아닌 성도들 자신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마치 아담을 창조하신 후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시고 아담을 위해서 최고의 선물인 하와를 손수 지으신 후, 아담에게로 인도해주시는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단장하셔서, 어린양이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 신부를 인도해가시는 모습입니다. 또한 이 신부는 에베소서에서 말씀한 바,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친히 피 흘리시고 자신을 주심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하신 바로 신부인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엡 5:26~27). 그 신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새 예루살렘에 대한 단 하나의 묘사, 그것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결하게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신부에게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즉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보았던 점이나 흠이나 주름 잡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거룩한 신부입니다. 완전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것이 교회 즉 성도들의 장래 영광에 대한 성경의 묘사입니다.

B. 성도들의 궁극적인 처소(21:3~4; 요 14:2~3)
그런데 여기 ‘새 예루살렘’이란 은유로 표현된 교회는 또한 성도들이 궁극적을 거하게 될 장소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요 14:1~3). 그 처소는 모든 성도가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입니다. 새 예루살렘이란 은유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인 성도들 자신일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거하게 될 처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완성된 교회의 그림은 성도들이 영원히 살게 될 세상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 처소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무엇보다 이 처소는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가 성취되는 곳입니다. 21:3은 보좌에서 나오는 큰 음성을 기록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해서, 성막과 성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통하여 누린 모든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하게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분적이거나 희미한 하나님의 임재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완전히 함께 거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때의 하나님의 임재는 완전하고도 충만한 임재이고, 성도들은 그 감격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방해거리들의 제거) 또한 성도들이 누리게 될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더욱 가능하게 하는 것은 모든 방해거리들이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1:4에서 그것을 설명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세상을 살면서 모든 사망, 애통함과 곡함 그리고 아픈 것들로 인한 눈물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을 주님께서 씻어주신다고 하신 것은 우리로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모든 슬픔과 고통의 문제들을 제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점점 더 놀라운 장면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요한이 본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빛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은 것이었습니다(21:11).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핍박 가운데 있는 연약한 교회 속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그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완성된 교회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을 요한은 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성에 해나 달이 없다는 것입니다(21:23).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기 때문이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이 없어서 깜깜한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22:5). 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비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왜 하나님이 빛이신지를 경험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이 빛을 드러내시고 영광을 우리에게 비추실 것입니다.

(성곽) 본문은 새 예루살렘의 성곽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설명을 주고 있습니다. 옛날 성들이 성곽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안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적들이 다 멸해진 후에, 성곽이 왜 필요할까요? 이것은 적들의 존재를 상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성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성곽의 두께가 144규빗인데 이것은 65m입니다. 지상 최대의 성벽이라 할 만리장성의 두께가 4~8m라고 할 때, 이 정도 두께의 성벽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성의 안전함을 이런 수치로 표현한 것인데, 단순히 65m가 아니라, 완전수인 12x12=144 규빗이라는 것, 완전에 완전을 곱한 완전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또 성곽 자체가 그냥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벽옥으로 되었으며, 여기에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3개씩 문이 있는데 그 문이 거대한 진주 하나로 만들어진 문들입니다. 그러니 이 진주의 크기는 얼마나 거대하겠습니까? 진주 문에는 각기 구약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곽에는 각종 보석들로 만들어진 빛나는 12기초석이 놓여져 있는데 이 기초석에는 각기 12사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12지파의 이름과 12사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는 것은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연합된 완전한 교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본문은 성곽에 대한 묘사와 함께 성 자체에 대한 묘사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만들어진 성이며 그 길도 정금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 정금이 얼마나 맑으면 유리 같은 정금일 수 있을까 상상만 할 뿐입니다. 그 정금은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반사하니 더욱 빛나는 형상이었을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그 성은 정육면체로 된 성입니다. 정육면체는 구약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가 정육면체였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처소가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성, 거룩한 예루살렘이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즉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새 예루살렘은 바로 지성소의 확장입니다. 이 성은 완전한 성입니다. 이 성은 길이, 넓이, 높이가 각각 12,000스다디온, 환산하면 2,221킬로미터입니다. 정육면체로 된 성의 한 쪽의 길이가 2,221킬로미터가 되니 얼마나 큰 성입니까? 미국 대륙의 동서 길이의 절반이나 되는 길이가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이 12,000 스다디온이란 단위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완전수 12에 1000이라는 무한이 곱해지는 거대하고도 무한한 공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성의 정중앙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좌에서부터 큰 길 한 가운데로 유유히 흘러나오는 강물이 보입니다. 그것은 생명수 강입니다. 그 수질은 수정같이 맑습니다. 이 생명수는 영광스러운 교회와 성도들을 영원히 만족하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무한히 흐르는 성령님의 은혜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초막절 끝날에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로 선포하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이 생명수강가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12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케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죄지은 먹고 영생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막으셨던 그 생명나무가 이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징으로서 존재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징으로 성도들에게 나타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어린양 보좌가 성 중앙에 있듯이, 이제는 성도들이 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22:4). 오, 이런 영광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죄인들에게는 그렇게도 무섭고 공포스러워서 산이나 바위라도 자기들을 덮쳐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려달라고 했던 바로 그 하나님의 얼굴을(계 6:16) 성도들은 기쁨과 감격과 영광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주가 없기 때문입니다(22:3).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으니 이제 성도들을 향한 저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갈 3:13).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는 두려운 명령도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시는 영광의 성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바로 성이고, 성도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이자, 성도들 자신이며 교회의 완성된 모습인 것입니다.

4. 영광에 이르는 자와 이르지 못하는 자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성,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는 동안 교회에 속했다는 것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는 자가 유업을 얻을 것입니다(21:7).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 숭배자들,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못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21:8).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듭난 자들이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이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자신입니다. 천상의 교회는 싸움이 끝나고 승리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 오늘 우리가 속해있는 벧샬롬교회는 여전히 전쟁터에서 싸움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는 싸우는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마틴 루터는 자기 전 생애를 걸고 거룩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우리 믿음의 선배입니다. 우리 시대는 조금도 그의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루터는 전투의 한복판에서 이런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그는 싸움의 한복판에서 영광스러운 교회의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을 그에게도 보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영광스러운 교회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려서 이 싸움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진리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도들이 알았고, 아타나시우스가 알았고 어거스틴이 알았던 그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싸움이며, 우리가 이기는 길은 진리로 싸워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벧샬롬교회의 부르심입니다. 왜 이 땅에 벧샬롬교회가 존재해야 합니까? 교인수를 좀 불리고 큰 교회 소리를 듣고 성공한 교회의 명예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그저 우리들끼리 인생살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입니까? 주님의 교회는 오직 진리의 싸움을 싸웠던 교회들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선명하고 분명하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평생 교회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교회, 진리를 적당히 타협한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로 싸우고 이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5. 영광스러운 교회를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육체 속에 가리워졌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고, 그저 한 사람의 목수나 랍비 정도로 알았고, 심지어는 그분을 때렸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분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별로 주목할만한 어떤 매력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고 영광을 입으신 주님의 모습은 제자들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요한이 다시 영광을 받으신 주님을 보았을 때 사도는 죽은 자와 같이 땅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계 1:17). 저는 교회도 감히 주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변화를 경험할 것을 압니다. 이 땅에서 교회의 영광은 가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승리한 교회는 영광을 입게 될 것이고, 그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될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그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원을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에 드리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전쟁터에서 싸움을 싸우면서 받은 모든 상처는 영광의 상처가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싸움의 한복판에서 흘린 눈물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 모든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이 싸움을 싸우면서 지칠 때, 낙심하게 될 때, 소망이 흔들릴 때 주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셨던 그 영광스러운 교회를 바라봅시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이고 장래 우리가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벧샬롬 공동체의 교우 여러분, 예외 없이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 영광의 자리에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22:28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