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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복음 - 믿음이 서고 넘어지는 근거 (요한복음 강해 151)

요한복음 20:19-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2-03

말씀내용
<믿음이 서고 넘어지는 근거> 요 20:19~20




1. 상황: 우리가 두려움, 실패감, 그리고 좌절감에 사로잡힐 때
오늘 본문은 첫번째 부활절 저녁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전해준 소식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과 세마포 수의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님의 부활은 그들 모두가 확인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전해주는 바에 의하면 여전히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그들의 주님을 잡아 죽였다면 이제는 자기들의 차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 있었는데 이 모인 곳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그 장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단지 도마를 제외한 열 명의 제자들만이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관계된 많은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잠가 두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단지 두려움 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마음은 계속 무거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잡히실 때 다 도망쳐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니 그들의 마음도 결코 실패감이나 좌절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서로가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실패자들의 모임, 좌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 안에서 무슨 선한 것들이 나올 수 있었겠으며, 그들 중 누가 과연 이런 상황을 감당하고 능히 위로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고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런 상황을 만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실패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아닙니까?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참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2. 믿음이 넘어지는 근거: 자신을 바라보라
이럴 때 우리가 종종 취하게 되는 태도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책에 점점 더 빠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실패와 배신과 부인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면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길이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여서 자신들을 보고 비판하고 반성하고 아무리 해도 여기에는 믿음이 설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스스로를 보고 반성을 하다가 결국에는 뿔뿔이 헤어지고 말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다가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았고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계속 보았고 자책했습니다. 결국 그가 택한 길은 스스로 목매어 죽는 일이었습니다(마 27:5). 자신을 바라보는 결과는 신앙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책과 죄성을 보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하는가? 성경은 자신을 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신앙은 서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느 때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하여 거기서 끝난다면 신앙은 세워지는 대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일이 정직하게 일어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구원받은 증거, 거듭난 증거를 찾아보려고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때로는 권장이 되고 바람직한 것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오직’ 이것만을 하느라고 모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여러분 안에서 진정한 확신과 기쁨에 이르게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혹 자신 안에서 거듭난 자녀의 증거와 열매들을 어느 정도 발견했다고 합시다. 내 안에서 발견한 증거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저는 이것이 자신의 내면의 증거로 주님을 대신하는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볼 때 거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어떤 신앙의 증거들을 발견하려는 태도가 확장되면, 우리는 이런 저런 자기 의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읽고 기도하고 교회 봉사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자기 자신 안에서 구원의 증거를 발견하려는 숨겨진 동기에서 행해진다면 사람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오직 자기 의일 뿐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내면적, 외면적 체험으로 주님을 대신하는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믿음을 만들어내지도, 믿음을 세우지도 못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를 마치 내적 성찰의 종교처럼 내적 성찰과 내적 성찰의 방법들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팔렸었습니다. 그런 류의 책들이 기독교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 위험이 적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신앙은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교인들이 그런 책들에 의해서 신앙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에 붙잡히게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가령 유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가 가르칠 수 있는 덕목은 자기 성찰과 같은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이상의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이고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점에서 종교들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3. 믿음이 서는 근거: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두려움과 실패감,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 믿음이 무너져내렸던 제자들의 믿음이 다시 서게 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서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이 전해주는대로, 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열쇠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믿음이 서는 근거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데서 세워지지 않습니다. 냉철한 자기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의 유일한 대상인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만 서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 점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모여 있던 그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던 제자들 가운데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기록하는데, 제자들이 처음에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눅 24:37). 말하자면 죽은 자의 혼령이 나타난 것으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져보라는 것은 영이 아니고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고, 특히 손과 발이라고 하심은 못박힌 자리를 확인하라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우린 여기서 주님의 부활하신 몸이 영화롭게 된 몸인데 왜 손발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여전히 가지고 계신가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부활할 때 삶에서 가졌던 상처들이 그대로 남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 이 손 발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은 영광의 상처요, 당신의 구속하신 백성을 사랑하신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계속해서 주님을 묘사하기를 “일찍이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함으로써 당신의 죽으심을 영광스러운 구속을 위한 죽으심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믿지 못했습니다(눅 24:41).”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셔서는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심으로 당신이 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 20절 하반절에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이 분이 바로 십자가에 제물되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구주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일어난 결과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자, 두려움과 실패와 좌절감이 물러나고 그들에게 다시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에게 기쁨이 임했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믿었다는 참된 믿음의 열매가 다시 맺어졌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다시 섰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들이 본 것, 이것이 믿음이 회복되고 서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의 논지도 동일합니다.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볼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자기들의 처지, 자기들의 마음 상태만을 뚫어지게 주목하였더라면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사 40:31). 앙망한다는 말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새 힘은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인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가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달고 누구든지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하셨을 때와 같습니다(민 21:8~9). 불뱀에게 물린 자신들의 상처를 깊이 바라보면 낫게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4.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는가?
제자들에게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들 모인 자리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사심을 친히 몸으로 보여주셨고 증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을 보았고 믿었고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들에게 부활하여 살아계시는 구주를 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오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에는 부활하신 몸을 가지고 이런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지만,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부활하셨고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이것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에 보면, 이 때에 주님은 구약 성경이 당신 자신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시면서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44~45을 봅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는 아니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5:39~4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성경이 없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 없이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근거 없는 신비주의이며, 이것은 어느 순간에라도 마귀의 미혹함을 받아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근거 없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성경이 중심이 되지 않는 신앙은 앞에서 말한 주관주의로 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 안에서 신앙의 근거들을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왜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는 것입니까? 왜 성경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까? 성경으로 들어가지 않고서 신앙이 생기기를 바라고,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거듭나고 회심하기를 열망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성경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정말 신앙이 성장하고 견고해지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성경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이해하고 깨닫고 구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그렇게 참된 믿음의 증거들을 결핍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성경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지라도, 정작 성경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볼 수 있는 것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 위해서 한 사람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목회자였던 존 에인절 제임스는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라는 명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증거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속죄의 충분성과 그리스도의 의의 완전성,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오라고 초청하시는 말씀의 보편성을 묵상하십시오.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근거들, 믿음의 정당한 이유를 살펴보십시오. 그렇게 할수록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믿음이 강화되면 될수록 여러분의 평안은 커질 것입니다.”

5. 주께서 마음을 열어주셔야 한다(눅 24:45).
그렇다면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배울 때 그리스도를 보기 위하여 우리가 유념해야 할 중요한 원리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은 말씀이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는데 여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24:45을 다시 보면,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하지 않고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합니다. 마음을 여는 것, 이것은 여러분의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기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하는 일입니다(고후 3:14~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했습니다(고후 3:16). 이것이 중생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이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없이, 내가 내 지적인 능력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알아보겠다고 하는 정신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조명하여 주셔서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갔을 때 복음을 전하는데 이 때 루디아라는 비단 옷감 장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이 여인이 바울을 통하여 전해진 말씀을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들어갈 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성경 말씀, 우리 주님에 대해서 계시하신 이 말씀을 읽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듯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말씀을 청종하게 하셨듯이, 제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고 부활하신 주님을 환히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로써 저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성숙해지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대하셔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것도 동일한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 합당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을 열어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인용했던 존 에인절 제임스의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이해하고 깨닫고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된 신앙의 부재는 이런 태도의 결핍에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만일 제가 설교를 할 때, 늘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에 주목하고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신앙의 어떤 증거들을 발견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기를 애쓴다면 저는 거짓 교사로 판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주관성에 우리의 믿음의 토대를 두도록 말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늘 변하기 쉬운 우리 자신의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토대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에, 우리 신앙은 자기 안에서 어떤 근거를 찾는데 골몰하게 된다면 점점 더 혼란스럽고 흔들리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주목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은 너무나도 충분합니다. 나에게 어떤 체험이 부족해서 내가 못 믿는다고 말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풍성하고도 깊고도 충분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정진하십시오. 깊은 체험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더 견고한 확신의 터를 닦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만일 이것이 부족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수단들을 많이 더하여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여기에 어떤 느낌이 필연적으로 주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제가 다른 기회에 좀 더 상세하게 다루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증거들을 발견하려고 고민하는 대신, 은혜, 마음을 열어주시는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십시오. 읽으십시오. 나아가 그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씨름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는 정상적인 모든 자리에 참여하십시오. 이것만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사로잡는 두려움과 실패감, 혹은 좌절감들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했던 제자들과 같이, 그 참된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되고 그 안에서 견고해지는 길인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19:44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