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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복음 - 그리스도를 믿을 참된 증거 (요한복음 강해 147)

요한복음 19:31-3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1-06

말씀내용
<그리스도를 믿을 참된 증거> 요 19:31~37



1.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일들

A.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렇게 일찍 죽으셨는가?
사실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숨을 거두시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6시간이 조금 더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찾아와 예수님을 장사지낼 수 있도록 시신을 넘겨달라고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벌써 죽었는가 의아하게 여겨 십자가형을 담당한 백부장에게 물었다는 말씀이 마가복음 15:4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죄수들이 길게는 9일까지 생명이 붙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너무나 빠른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지만,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특별한 설명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모든 저주와 진노의 무게가 그만큼 강력한 것이었으며 주님께서 구원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내려놓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B. 왜 군인들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고 성경은 이것을 중요하게 기록하는가?
두번째는 유대인들이(대제사장, 바리새인들) 빌라도에게 와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해가 지기 전에 죄수를 매장해야 하므로 빨리 죽도록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청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처형한 죄수를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아 둘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그 위에서 썩든지 새의 밥이 되게 하든지 그냥 두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방에서는 달랐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해가 지기 전에 시체를 매장하지 않으면 그 땅마저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유대인들이 매장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1:22~23을 봅시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매장함으로써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죽은 자라는 암시를 백성들에게 주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요구한 것은 뼈를 꺾어 죽인 후에 시체를 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형을 당한 죄수의 뼈, 다리뼈를 꺾으라는 말인데 대개 이것은 죄수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관습이었습니다. 죄수가 다리로 그나마 힘을 유지하고 버티게 되어 있는데, 쇠망치로 다리를 부러뜨림으로써 죄수가 팔의 힘으로 견디게 하면, 결국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숨을 쉬지 못하고 질식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죄수의 유골이 발견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무릎 뼈는 하나는 부러져 있었고 또 하나는 완전히 박살이 나있었다는 고고학적 자료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군인들은 먼저 예수님 양 옆의 두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볼 때 이미 죽어계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총독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성경이 왜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는 것을 특별히 주목하는지도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C. 왜 한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나온 것을 성경은 강조하는가?
세번째는 다리를 꺾지 않는 대신,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것도 특이한 일입니다. 이미 죽으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뼈를 꺾지 않았다면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쨌든 예수님의 허리는 창에 찔리셨고 거기서는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성경은 이것은 주목합니다. 왜 그럴까요?

2.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고전 5:7): 주님께서 죽으신 날은 유월절인가, 유월절 전날인가?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입니다. 31절에 ‘이 날은 예비일이라’고 했고 ‘그 안식일이 큰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 날이 유월절인가, 유월절 전날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신 것이 유월절 만찬이었다고 말합니다(마 26:17; 막 14:12; 눅 22:7).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 식사는 유월절 전날의 식사로 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시간이 바로 그 날 저녁에 시작되는 유월절의 식사를 위하여 양들이 죽는 시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몇 구절들에서 우리는 이것을 보게 되는데, 가령 13:1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한 것은 마지막 만찬이 유월절 전날임을 시사합니다. 18:28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날 저녁에 유월절이 시작되고 유월절 식사를 하게 될 예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19장에서 몇 구절을 더 볼 수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이 날은 예비일이요”라고 말한 것은 유월절의 전날이라는 의미로 쓴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의 날 개념이 저녁에 시작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31절에서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이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예비일은 안식일의 예비일을 의미하고 안식일이 큰 날이라고 한 것은 안식일이 유월절과 겹쳤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시점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이것은 학자들 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한 부분입니다. 어떤 학자는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요한복음서 기자가 서로 다른 달력체계를 사용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 그 시점이 어떻게 되는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살펴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시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중요한 도전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은 그날 저녁에 있게 될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 수많은 양들이 도살을 당한 시간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멀리 흩어져 사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64~65년 경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인파가 2백 7십만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당시에도 200만 명은 족히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먹을 수많은 유월절 희생의 양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고 계신 시간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요한복음의 기록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정확하게 드러내줍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의 종살이를 마치고 출애굽을 하던 그 날 저녁에 그들이 먹었던 유월절 희생의 양은 바로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그 양의 죽음으로 죽음의 사자가 유월절 양을 먹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갔습니다(pass over). 이것이 유월절이라는 이름의 의미입니다. 아담 이래로 죄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영감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b).”

3. 군인들이 주님의 다리를 꺾지 않다(31~33, 36; 출 12:46; 시 34:20)
여기서 우리는 이 십자가 죽으심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빌라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너무나 이른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이 전제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 외에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모든 면에서 유월절 양이심을 드러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출 12:46에 유월절 양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9:12에서도 이 규례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유대인들이 구하는 것은 의도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다는 것을 오늘 본문 31절은 보여줍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뼈를 꺾어 죽이라고 요구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대로 군인들에게 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군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죄수의 다리는 꺾었으나 주님에게는 그렇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영감으로 36절에 이렇게 씁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시편 34:20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예언을 봅니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만일 유대인들의 요구와 총독의 명령대로 무심코 군인들이 우리 주님의 뼈를 꺾었다면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은 서로 맞는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주님은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한 유월절 희생양으로 죽으셨습니다. 유월절 양으로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시면서 말입니다.

4. 창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을 쏟으시다(34~35,37; 슥 13:1; 12:10)
우리는 그 다음에 한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피와 물을 흘리신 일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군인들 중 하나는 그저 지나쳐 가버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천성이 잔인하여 그랬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는 창을 들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서 의아하게 여깁니다. 이 일에 대하여 의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은 그 창이 예수님의 심장을 싸고 있는 심낭을 함께 찔러서 심낭에 있는 물과 심장의 피가 한꺼번에 흘러나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설명은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해석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과 피는 두 가지 성례 곧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인데, 여기서 그런 유추를 끌어내는 것은 성경의 의도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아담의 옆구리 갈비뼈에서 이브가 나왔듯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나왔다는 신비적 해석도 하는데 이것도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으로 사도 요한이 한 사람의 목격자로서 이것을 쓰던 1세기에 가현설(Docetism)이라는 이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죄악된 몸을 입을 수 없으므로 그저 몸처럼 나타나셨을 뿐(거짓으로 나타나셨다) 실제로는 영으로만 계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죽은 몸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함으로써 이런 가현설 이단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처음부터 있어왔던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자들 중에 예수님이 그저 며칠 기절하였다고 깨어난 것이지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아니었다고 소위 기절설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한 반박이 되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진실로 몸을 입고 계셨고 주님은 진정 죽으셨습니다.

여기서 피는 제유법적으로 쓰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생명은 피에 있다고 가르칩니다(창 9:4~5; 레 17:11,14). 예수님의 피가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온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다 쏟아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 유월절에 일어났던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출 12:6~7 그리고 13절입니다. “(6)이 달 십 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유월절은 단지 유월절 어린양을 먹는 날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날에 그들은 유월절 양의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치실 때 그 피가 표적이 되어서 그 집을 넘어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다는 이 분명한 증거는 중요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는 효력이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은 그를 믿는 자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서 속해주는 효력과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2000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보혈을 그토록 찬송하고 노래해왔던 것입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주소서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됩니다.
내 기도소리 들으사 다 허락하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주소서

물이 주님의 몸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반석을 치므로 물이 솟아나와 먹은 것(출 17:6; 민 20:11)을 생각하게 하고 주님께서 초막절에서 생수의 강에 대해서 하신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요 7:37~39). 스가랴 13:1을 봅시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 어느 때를 가리킴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 사건에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다윗의 족속, 예루살렘 거민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 십자가에 달려 죽으사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을 위해서 터져나오는 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피에 적심을 받고 이 피로 죄를 씻은 자들입니다. 하늘의 장로가 하늘 보좌에 둘러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찬송을 돌리는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그리스도를 믿는 자,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다 이 샘에 와서 죄와 더러움을 씻은 자들입니다. 이것은 실로 어린양의 생명수 샘이기도 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7).”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죽으심을 통해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져나오는 것을 한 군인의 예상치 않은 행동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종교를 믿어서가 아닙니다. 교회를 다녀서가 아닙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에 자기의 죄를 씻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이것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찬송하는 이유입니다.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라고 찬송시를 썼고, 어거스터스 토플레이디(Augustus Toplady)는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라고 찬송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제 본문 37절에서 구약의 또 한 예언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스가랴 12:10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구절이 성취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훗날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7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것은 일어나게 될 일입니다. 마지막 때에 모든 자,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자도 부활하여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었든지 믿지 않았든지 여러분은 두려운 위엄의 보좌에 앉으신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선한가, 교양있는 삶을 살았는가로 주님은 여러분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한 가지, 주님이 흘린 피로 자기 죄를 씻은 자들인가를 주님은 보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준비가 되셨습니까?

5. 그리스도를 믿을 참된 증거(35):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가 아니면 인간의 죄는 씻겨질 길이 없다!
주님은 이 모든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게 하시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죽으시기 위해서 그 모든 점에서 유월절 양의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완벽한 구원을 다 이루시고 너무나도 빨리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로써 다리 뼈를 꺾이는 대신 옆구리를 찔려 피와 물을 쏟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목격자로서 힘있게 증거합니다. 35절입니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물론 이 구절에서 ‘저’가 의미하는 것이 누구인가? 하나님 자신인가, 요한인가 논란이 있지만, 문맥과 특별히 21:24을 참고하여 보면 이것이 요한이라는 점은 자명한 듯합니다. 그는 목격자로서 말합니다. 자신의 증거가 참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으로 믿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썼고 이 참된 증거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참된 증거를 그는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에서 말해왔던,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최고의 절기로 알았던 유월절의 주인공 바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셨다는 증거를 치밀하고 분명하게 증거했습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이 그렇게 두 번이나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6).” 그리스도를 믿을 참된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가 아니면 인간의 죄는 씻겨질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없습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19:23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