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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성경장절분류 > 요한복음 강해 (140) -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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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구원 - 두 사람 (요한복음 강해 140)

요한복음 19: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2-11-04

말씀내용
<두 사람> 요 19:18



1. 이 사람의 구원: 왜 성경은 이 두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가?(마 27:38; 막 15:27; 눅 23:33)
A. 두 종류의 인간을 대표함
네 개의 복음서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양 옆에서 두 강도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도 네 복음서에 흩어져서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두 강도가 주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이 필시 상당한 의미를 지닌 일임에 분명한 듯 합니다. 성경이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 한 구절을 통해서 상고하려는 바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 이 구절을 해석하고 넘어지곤 합니다. 가장 많이 보이는 반응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회개하고 구원을 보장받은 한 강도의 구원은 너무 거저 얻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너무 거저 얻었다(?).' 사실 이 표현이야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사건을 설명하는 너무나 적절하고 압축적인 표현입니다. 자신이 얻은 구원이 '너무 거저 얻은 것'임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반응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체로 구원의 도리를 모르고 그러기에 구원을 어느 정도의 신인 합작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얻은 구원이 바로 이 강도가 얻은 구원과 동일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말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하다가 죽은 또 한 사람의 강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아무런 동정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워낙 십자가 형을 언도받은 강도였기 때문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까지도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구원하지 않으신 것을 보고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멸망은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여기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출합니다. 그 사람의 평생에 행한 악행이 있는데 마지막 한 순간에 한 마디 말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멸망받아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자연적인 반응은 둘 다 죽을 사람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구경군의 입장에서 그들을 그리고 주님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의 입장인 것이지요. 결국 작가는 모든 판단을 시청자들에게 맡기게 됩니다. 시청자가 재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건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사건을, 이 기록을 읽은 모든 인간은 이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볼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이 두 사람과 다르지 않고, 여러분은 이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B.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함(사 53:12): 강도(마태, 마가), 행악자(누가), 사람(요한)
성경이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처한 입장을 보여주려는 의도라는 것이 첫번째라면,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긋은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언의 성취라는 점을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서 무서울 정도로 보게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700년 전에 예언할 때,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고 한 것을 기록했습니다(사 53:12). 그의 죽음을 보게 될 많은 사람들이 강도와 같은 범죄자의 죽음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형에 대해서 제가 이미 몇 차례 설명드렸듯이, 이게 보통 죽음이 아닙니다. 노예와 같은 신분이거나 아주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그런 자로 헤아림을 입으신 것입니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라 양 옆에 강도들이 매달렸다는 것도 그 사실을 더욱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들은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은 공히 이 두 사람을 강도라고 말했고 누가복음은 행악자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그냥 두 사람이라고 기록했지요. 이들은 강도이고 행악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이 두 사람이 모든 인류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700년 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두 사람의 강도 사이에서 그들과 같은 범죄자로 여김을 받으시는 죽음을 죽으신 것이라고 복음서들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모든 인간은 저주의 죽음 아래 놓여있다는 현실(마 27:44)
그렇다면 이런 전제에서 이 사건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이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대표된다고 할 때, 거기에는 우리 자신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이 죄인이었듯이 우리도 죄인이고, 이 두 사람이 십자가 형을 언도받은 사형수였고 사형 집행을 당하고 있었듯이 우리도 전능하신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그리고 그 사형 집행을 당하고 있는 중인 사형수이며, 이 두 사람이 나무에 달려 저주의 죽음을 죽고 있듯이 우리 모든 인간은 저주의 죽음 아래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선포입니다. 이 두 사람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27:44에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욕했고 비난했고 조롱했습니다. 이것이 처음에 강도들이 보였던 똑같은 반응이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좀 더 착했다고 성경은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죄인이고, 똑같이 하나님을 조롱한 자들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주님께서 그 인생에 찾아오시기 전까지는 다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인이고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법이고 재판장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그 삶에는 하나님이란 존재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고, 죄인이 처해 있는 곤경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사실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사형을 집행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생 중에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늙어가고 상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이라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 형을 당하고 있는 이 사람들 처럼 말입니다. 오랜 시간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어떤 이들은 스스로가 그 죽음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서 자살이라는 수단을 택하기도 합니다. 절망. 정직하게 우리의 인생을 보려고 하면 절망이라는 단어외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습니다. 적지 않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절망의 실존을 여러 형태로 설명했습니다. 인생에는 아무리 살펴봐도 출구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출구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달려서 사형 집행을 당하고 있는 이 두 사람에게 무슨 출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달렸는데 말이지요. 이제는 시간이 해결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의 영적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18-19)." 이 두 사람이 자신의 ㅈ구음에 대해서 핑계를 댈 수 없었듯이 하늘 아래 사는 어떤 인간도 자신의 죽음과 영원한 심판과 멸망에 대하여 핑계를 댈 수 없고,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두 사람이 다 강도요 행악자였습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인정했듯이 그들은 "(그들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었고 당연한 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눅 23:41). 우리는 바로 이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죽음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 사람은 마땅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꺼지지 않고 쉬지 않는 악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죽습니다.

3. 한 강도의 전향/회심(conversion)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한 강도가 이 마지막 순간에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출구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절망의 수렁에 빠진 인간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 줍니다. 마음의 변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 말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회심은 단순한 마음의 변화나 전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이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가지를 하나로 말하는 방식입니다. 회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회심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마다 그 방법과 때가 다릅니다. 어떤 이는 아주 어린 시절에 3~4살에 회심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이 강도 처럼 임종의 순간에 회심을 하기도 합니다. 또 방법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회심은 참된 회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거짓된 회심이 있습니다. 또는 반쪽 자리 회심도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 믿음이 따르지 않는 회개가 가능합니다. 이것은 참된 회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강도의 회심이 참된 회심이라는 것을 특별히 누가복음을 통해서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A. 회개: 자신의 존재가 죄인임을 인정하였다(눅 23:41).
이 강도가 참으로 회개한 것일까요? 물론 요한복음의 기록은 그 상세한 내용을 전달해주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3:40~41을 봅시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는 자신이 받는 정죄와 그 형벌이 마땅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사람의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부당하다고,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는 십자가 형벌과 죽음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행한 어떤 죄악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회개라고 잘못 이해하면 그다지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 더러 있을 것이고 대개는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이결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핵심은 어떤 특정한 죄, 그것도 인간적인 기준에서 죄라고 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존재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심판을 하시기 전에 사람에 대해서 하신 평가가 나옵니다. 창세기 6:5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것, 이것이 존재적으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내가 살아온 모든 선한 삶 조차도 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를 섬기는 악을 행하였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행하고 살아온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의 죄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인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이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회개한 적이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 강도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예수님께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비록 다른 한 편에 달린 강도에게 말을 하고 있지만, 자기가 죄인이고 마땅한 형벌을 당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다룰 것이 있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필요에서 나오는 구원 요청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나는 구원이 필요하다. 그러니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자." 단순히 이런 깨달음과 기도는 성경이 말하는 마음의 변화, 회심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사실 다른 한 편에 달린 강도가 보여준 태도가 이런 것입니다. 물론 그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우리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누가복음 23:39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는 만일 당신이 스스로 주장하는대로 그리스도라면, 나를 구원해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회개는 이런 식의 추론에서 나오는 요청이 아닙니다. 회개는 자신의 존재적 죄인됨을 알고, 받는벌심판과 형벌의 마땅함을 알고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B. 믿음: “예수여, 당신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회심의 두 번째 요소는 믿음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어떻게 자기의 믿음을 예수님께 나타냈습니까? 단순히 "나 좀 살려주십시오"하는 요청이 아니라는 것이 특이하고도 주목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누가복음 23:42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이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주님의 제일성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그리고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많은 비유는 다름아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실 때에도 주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리이 임하옵시고"라고 그 시작을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정확하게 '당신의 나라'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자기와 똑같이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지금 여기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하나님의 나라에 임하실 분임을 저는 믿습니다"하는 고백입니다. 그의 소망은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품었던 꿈과 기대를 이루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그의 인생은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믿음이 지금 그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는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 이 사람은 지금 손에 쟁기를 잡고 있지도 않고, 이 세상 일에 마음이 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소망입니다. 이것이 이 최후의 순간에 구원받은 강도가 주님께 고백한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압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는 이 기도의 의미를 압니까? 우리는 이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이 세상의 염려와 이 세상의 필요와 이 세상의 허영을 위해서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원하는 것을 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끊어지고 썩어지고 영원하지 않을 가치를 더 누리고 살아가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얻는 참된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강도가 주님께 피력했던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4.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구원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순간에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부탁하는 강도를 향하여 자비로운 말씀으로 위로하고 확신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이보다 자비롭고 이보다 감미롭고 이보다 복된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 그리고 그 어떤 말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을 그 극악한 고통의 시간에, 아무런 출구도 없는 인생을 막연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에게 이보다 자비롭고 감미롭고 복된 위로는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목을 걸고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 위로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도리어 그들을 향하여 경고하고 위협하셨습니다. "화있을진저"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다루셨습니다. 하지만, 이 강도, 최후의 고통스러운 순간에 처해 있는 이 강도에게 주님의 말씀처럼 복되고 자비한 말씀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이 처해있는 입장이 바로 이 강도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깨달으신다면 여러분에게 주님의 이 말씀은 그만큼 위로와 달콤함이 될 것입니다. 강도는 "당신 나라에 임하실 때"라는 어떤 미래를 가리켜 말하였지만, 주님은 불특정한 미래의 어떤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오늘'이라고 말씀하시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풍성한 생명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말입니다. 지금 이 고통의 순간이 곧 지나고 죽음이라는 지점을 넘어서면 너는 낙원에서 내 품에 안겨서 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사형 집행을 천천히 당하고 있는 사형수들일지라도 지금 당장에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금 여전히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늘은 어떤 미래의 죽음의 시간을 넘어서는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오늘입니다. 우리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간다면, 주님은 바로 오늘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그의 품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은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 주님의 이 말씀이 여러분 모두에게 위로와 감미로움 그리고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에 구원받은 이 강도의 구원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해주는 최고의 사례라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이렇게 구원을 받습니다. 거저 얻는 것이지요. 평생에 한 것이라고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 멋대로 산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불경건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 "내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살아온 죄인이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 당신의 나라에 내가 서게 해세요"라고 구하면서 주님의 자비와 은혜 밖에는 내가 살 길이 없다는 믿음을 고백할 때, 주님께서 이 강도에게 하셨듯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것,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방법만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인 것입니다. 여기에 저와 여러분이 기여할 수 있는 구석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의는 누더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나를 구원해달라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에게 주님이 하실 말씀은 "화있을진저"라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의 대표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마지막 그 놀랍고 귀한 은혜의 기회를 날려버린 또 한 사람의 강도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순간에서도, 당신께서 왜 이 땅에 오셨고 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지를 양 옆에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을 통해서 놀랍게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5. 모든 인간은 두 사람 중의 하나다.
이 구원받은 강도는 사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이전에 얼마나 가까이서 예수님을 만나보았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고 본 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사람의 행한 것을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고 한 것을 볼 때 말입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거나 본 사람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였을 때,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는 날 동안에 많은 기회가 주어졌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는 그 기회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구원받은 강도만의 경우는 아닐 것입니다. 똑같은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그 옆에 계신 주님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다른 강도, 그도 주님을 알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우리도 일반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지구상에는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다 주님께 드립니다. 또 교회는 그 일을 위해서 재정을 드리고 기도를 합니다. 그들을 미전도종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자리에 와 앉아계신 여러분은 그들과는 다릅니다. 여러분은 벌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복음을 들은 분들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복음을 들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은 아직은 내가 결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시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불현듯 찾아왔습니다. 이 강도들에게 말입니다. 그 시간이 왔다고 해서 사람이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한 사람은 그 죽음의 시간에 비로소 마음의 변화 곧 회심을 하였지만 말입니다.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가 한 말을 유의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그것을 삶에 적용할 만큼 실제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 진리가 삶 속에 반영되지 않는 것을 보면 깨닫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르게 말해서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이 강도로 하여금 그동안의 삶의 수많은 기회를 그냥 지나치게 했던 이유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사 그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 옆에서 죽게 되는 기회를 다시 주셨습니다. 하지만 나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기지는 마십시오. 지금 살아있는 순간에,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삶과 영원한 운명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이 세상 나라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고, 어떻게 하면 자식 잘 키우고, 어떻게 하면 돈 좀 벌고 살아갈까 하는 고민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구원받은 강도가 비로소 죽음의 순간에 눈을 떴던 '당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눈을 뜨십시오. 여러분은 다 사형 집행을 당하고 있는 사형수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둔다 한들 그것은 헛된 꿈일 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현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마주 대할 것입니다. 잠시 후에 말입니다. 아침 안개가 걷히듯이 인생이 다하게 되면 말입니다. 풀이 마르듯 우리 인생이 노쇠하고 죽음을 마주 하게 될 것입니다. 현실은 세상의 허영이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남은 모든 인생을 의탁하십시오. 지금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은 강도처럼 '거저 얻은 구원'의 수혜자가 될 것이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녀로서 사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죽음으로서 끝나는 축복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더 놀랍게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될 복 말입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18:57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