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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설교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 그리스도와 교회

요한계시록 1:12-20, 다니엘 10:6, 시편 67: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9-22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 요한이 본,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환상을 일부 살펴보았습니다. 영광의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실로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당신의 모습을 밧모섬의 요한에게 계시하여 주셨고, 이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 뿐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받아서 읽게 될 1세기 말의 소아시아의 성도들은 이 말씀 속에서 영광의 주님을 뵈옴으로써, 고난을 이길 힘과 위로를 넉넉히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1세기 말의 일곱 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영광의 주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주요하게 일어나는 것은, 공예배의 설교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주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제대로 잘 하려고 하신다면, 예배 그리고 예배 안에서 주어지는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이점에서 공예배와 설교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의 신앙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오늘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 영광을 입으신 주님의 모습을 상고할텐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그리스도 환상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잠깐 정리하고, 요한이 본 그리스도의 모습을 계속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이 제일 먼저 본 것은 12절에서 쓰고 있듯이, 일곱 금 촛대였습니다. 그리고 일곱 금 촛대는 1:20에서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한 말씀대로, 일곱 교회, 즉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요한이 본 주님은, 촛대 사이에 계셨는데(1:13), 2:1에서 보면 가만히 서 계셨던 것이 아니라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른손으로 일곱 별을 붙잡고 계셨는데(1:16,20; 2:1),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말씀합니다(1:20).
여기서 일곱 교회의 사자가 교회의 사역자들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교회의 수호천사와 같은 천상의 존재를 지칭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주님께서 교회와 가지시는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합니다. 주님은 교회의 목회자 혹은 수호천사들을 당신의 능력의 팔(오른손)로 붙잡고 계실 뿐 아니라, 일곱 교회들 가운데 임재하시며 그들을 방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극심한 박해 속에서 살아가던 성도들이, 말씀 속에서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의 영안을 열어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셨을 때, 그들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을까요?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많이 힘들어하는 가운데서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나를 안아주시는 것 같은 체험을 하고는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은혜로운 체험을 주시면 참된 성도들은 큰 위로를 얻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 중에는, 어떻게 하면 나도 그런 체험을 한 번 해보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일곱 교회의 성도들에게 네가 보는 것을 기록하여 보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요한이 보았던 영광의 주를 그가 보았던 방식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기록하게 하사,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영광의 주를 뵐 수 있습니다. 이 은혜의 기회는 주께서 모든 성도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날마다 나를 만나라고 하십니다. 영광의 주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며 불 속이든지 물 속이든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사 43:1-2).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환상을 통해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약속한대로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희 교회들 사이를 거닐며, 불꽃 같은 눈으로 너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의 지도자들은, 혹은 너희의 수호천사들을 내 능력의 팔로 붙잡고 있으니 너희는 아무 염려도 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여라.”
모든 시대의 교회,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 속에서 영광의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은행에 남아있는 잔고 때문에 힘을 얻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잠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기서 자신의 소망을, 위로를, 살 힘을 얻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우며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요 힘이요 위로이며 격려인지를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경험하고 사십니까? 이것을 구하면서 사시는가 말입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 주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을 묵상할 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십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9:13b)”이라고 할 때, 그 영광의 주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십니까?
요한이 본 환상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과 교회는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힘과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는 점을 유념하면서, 본문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주석 같은 발,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단 3:25; 10:6; 겔 1:24; 43:2)
먼저 15절 상반절을 보면,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습니다. 풀무불은 다니엘서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들어갔던 풀무불을 연상하게 합니다(단 3:25). 1세기 말 요한계시록의 첫번째 수신자들이었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성도들 역시 고난의 풀무를 지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단어는 그들의 주목을 끌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발은 그런 고난의 풀무,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연단된, 빛난 주석 같은 발입니다. 이 묘사도 역시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과 유사합니다. 이미 우리가 보았던 다니엘 10:6은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단 10:6).” 요한의 묘사와 얼마나 유사합니까? 팔과 발이 빛난 놋과 같다고 했고, 또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묘사,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도 거의 같습니다.
풀무불에 연단하였다는 것은, 도덕적 순결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로 주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들 역시 풀무와 같은 고난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요한계시록이 그토록 많은 내용들을 다니엘서에서 가지고 옴으로써, 바벨론 제국과 그에 이어서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 제국에서 때로는 풀무불을, 때로는 사자굴의 고난을 감당해야 했던 믿음의 선배들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였을지 모르겠습니다. 믿음과 가진 바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너희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너희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이런 고난의 풀무를 지나며 믿음을 지켰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셨다는 메시지가 요한계시록에서 구구절절이 암시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습니다. 어쩌면 도덕적 무력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너희 믿음의 순결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도덕적 권위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영원한 영광의 하나님이신 주님 자신이,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과 수치를 통과하여 영광의 자리에 이르셨으니, 여기에 믿음의 순결을 지키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 그 주님의 도덕적 기초가,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놋과 주석은 같은 개념으로 쓰이는데, 종종 심판을 상징합니다. 놋제단과 놋뱀과 같은 것들은 심판의 개념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님의 발이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놋) 같다’는 것은 모든 원수를 그 발로 밟아 심판을 행하시되 그 심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섭리로 진행될 것임을 보여주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발로 행하시며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묘사는,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라는 것입니다. 많은 물소리는 큰 음성, 큰 무리의 우레 같은 음성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다니엘서 외에도 에스겔 1:24이나 43:2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43:2을 보지요.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겔 43:2).”
한편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구원과 위로의 말씀을, 하지만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경고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큰 소리입니다. 그 음성은 실로 두려운 음성이 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권능과 모든 힘을 상징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3. 오른손에 일곱 별,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입(단 12:1,3; 요 15:5b; 살후 2:8)
그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라는 묘사입니다. 여기서 먼저 규명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일곱 별이 누구, 혹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20절에서 말했듯이,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여기서 ‘사자’는 일반적으로 천사를 가리키고 경우에 따라서 메신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요한계시록에서 이 단어가 총 77회 사용되는 중에(단수, 복수를 포함하여) 8번을 제외하면, 명백하게 천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8번이라는 이 예외는, 1:20을 포함하고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다고 하는 2-3장에서 일곱 번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8번의 용례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사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인간 사역자를 가리키는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만일 전체적 용례를 근거로 판단한다면 사자는 각 교회를 돌보고 지키게 하신 천사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가령, 수호천사와 같은 개념입니다. 다니엘 12장은 얼핏 이런 개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등장합니다(단 12:1). 천사장 미가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호위하는 존재로 소개됩니다. 이런 근거를 가지고, 주의 교회를 보호하는 천사들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일곱 별은 그런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2-3장에서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를 보면, 각각의 메시지는 각각 그‘교회의 사자에게’ 주어졌습니다(2:2,8,12,18; 3:1,7,14). 사자가 교회에 세워진 사람 지도자 즉 목회자들이라면 교회에 대한 책망을 당연히 받을 수 있겠지만, 천상의 존재인 천사들이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좀 어색하고 이상해 보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별이 의미하는 바, ‘사자’는 교회의 목회자들이거나 교회를 수호하는 천상의 존재인 천사를 가리킨다는 견해로 나뉘어집니다. 하지만, 각 교회의 정체성을 의인화하여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절충적 해석도 있기는 합니다. 2-3장은 정확하게는,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이 편지가 단지 인간 목회자나 천사에게 주어졌다기 보다, 그 교회 자신에게 보내진 것이지만, ‘사자에게’라는 식으로 정체성을 의인화했다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별 곧 사자가 인간 목회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구절을 우리는 다니엘 12:3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많은 사람을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는 약속입니다. 말씀의 종인 목회자들을 향한 최고의 칭송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그 종, 목회자들이 주님의 권능의 팔에 붙잡혀 있는 모습입니다.
사역자는 교회를 교육하고 깨우치시려고(회심과 교화)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이 사역자들을 별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게 큰 영예를 주셨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주님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반사체이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발광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별은 빛을 비추어 어둠을 몰아내거나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출 뿐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사역자들을 겸손하게 합니다.
이 사역자들의 빛이나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라는 말씀은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그들 사역자들의 힘과 능력과 빛남은 모두 그들을 붙들고 계시는 그리스도께 달려 있고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 자기 능력으로 빛을 비추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목회자, 그런 설교자는 없습니다. 그는 타락한 지도자일 뿐입니다.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5b).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는 무엇입니까?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라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심판의 상황을 암시하는 묘사입니다(살후 2:8). 교회의 능력은 설교를 잘 하고 목회를 잘 하는 탁월한 목사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좌우에 날 선 검은 단검이 아니라, 자르거나 찌르기도 하는 장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선 묘사를 보충해주는 면이 있습니다. 일곱 별인 주님의 사역자들은 주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런데 주님 자신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옵니다. 설교자들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 선 검을 드러내야 합니다. 설교자와 주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도 있습니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설교자의 입에서 나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간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히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평생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목사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한 순간, 여러분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4. 해가 힘있게 비치는 얼굴(시 67:1-2)
이어지는 묘사도 봅시다.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교회의 사역자들(혹은 천사들)을 별이라고 했고 교회를 금 촛대에 비유했습니다. 이들 모두는 빛을 발하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해가 힘있게 비치듯 주인의 얼굴이 한 번 빛을 발하면, 별이나 촛대는 다 사그러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주님의 영광의 얼굴을 한 번 지나치면서라도 본다면, 이전의 모든 영광과 빛남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의 사역자들의 모든 비침은 전적으로 그 얼굴이 해같이 비치는 그리스도께 의존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그 빛을 강렬하게 그리고 힘있게 비추어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시편 67편에 기록된 시편 기자의 기도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해같이 빛나는 그 얼굴 빛을 주께서 교회에게 환히 비추어 주실 때, 교회는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교회의 소망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5. 주의 오른손에 붙잡힌 신실한 설교자들
오늘 우리는 여기까지 주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요한이 본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특별히, 주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에 주목하여 교훈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주께서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 선 검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주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종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당신의 오른손에 붙잡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참된 말씀의 사역자들을 말입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말씀의 사역자들이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많은 물소리 같이 큰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교회를 쩌렁쩌렁 울리게 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주님은 고난의 풀무를 지나는 주의 백성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힘을 더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이런 신실한 말씀의 사역자들을 교회에 더 많이 허락하여 주시고 그들을 권능의 손으로 붙들어 주셔서 주님의 교회의 모든 강단에서는 언제나 생명의 복음이 쩌렁쩌렁 울려 선포되는 날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 속에 부흥을 허락하셨을 때에는, 이런 말씀의 사역자들의 사역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벧샬롬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덕적 개혁도 아니고, 건물도, 돈도, 더 많은 교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권위를 입고 힘있게 전하는 신실한 말씀의 사역자들이 필요합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의 전기를 썼던 루크 타이어맨(Luke Tyrem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휫필드 같은 사람 대여섯 사람만 있으면 어느 시대라도 한 나라를 움직이고 그 나라의 교회들을 흔들고, 그 나라의 도덕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휫필드의 능력은 그의 재능에 있지 않았고, 그의 웅변술에 있지도 않았으며 오직 그의 경건에 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는 후계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에서, 믿음에서, 영적 체험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서, 그는 많은 후계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교회의 창고에 쌓여있는 모든 금은보화와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세상은 지금보다 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휫필드의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일으켜주시고 보내어주시기를!”
18세기의 영국은 이 사람, 조지 휫필드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유럽 대륙이 혁명의 불길에 사로잡혔을 때, 정작 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의 설교 사역을 통해 부어주셨던 부흥의 역사 때문이었다고 말한 세속 역사가의 평가는 주목할 만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지 휫필드 같은 설교자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 부어주심은 영국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신대륙 아메리카에까지 그의 설교가 미치는 곳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큰 부흥의 역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별들 말입니다. 신실한 복음의 설교자들이 필요합니다. 주일 아침에 이 땅의 어느 교회의 예배당에 들어가든지 그곳에서 영광의 복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죄인들이 회개하며 거룩한 주의 성도들이 영광의 주를 뵈옵는 일들이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스펄전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맺고 싶습니다.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전하는 설교자들이 더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더 많은 설교자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회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런 사람들이 나오기는 것을 조금 두려워합니다. 자기들이 그들 때문에 빛을 잃게 될까 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른손으로 교회에 주시는 선물 가운데 목사와 복음전도자 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여기저기에, 오십 군데에,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전하되 모든 진리를 오직 진리만을 전하는 우렁찬 목소리를 지닌 사람들을 보내시기 전에는 교회가 조금이라도 위대한 전진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대의 풍조에 굴복하지 않고, 그런 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만군의 주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고 성령께서 자기들 위에 계시므로 결코 굴복하지 않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주장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 시간 여러분이 그리스도께서 일곱 별을 손에 쥐고 계신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다시 주님의 손에 별을 가득 쥐소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불타는 설교자들로 이 시대의 어둠에 빛을 비추어, 주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