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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성경장절분류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5). 성전 측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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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고난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5). 성전 측량

요한계시록 1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8-16

말씀내용
우리는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심판 사이의 막간에 등장하는 두 개의 환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째 환상은 지난 주에 상고한 10장 말씀으로,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먹음으로써 새로운 선교의 사명을 받는 환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11:1-13에 소개되는 둘째 환상을 볼텐데, 그것은 두 증인의 환상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첫째 환상인 작은 두루마리 환상과 둘째 환상인 두 증인의 환상을 연결해주는 부분이 1-2절입니다. 오늘은 이 짧은 본문을 살펴보고, 이어서 두 증인의 환상 본문인 11:3-13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썼다고 했습니다(10:10). 그 단 맛과 쓴 맛을 전제하고 11장 말씀이 주어진다는 것을 유념하고 이 본문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말합니다. “11장은 참된 교회가 구원의 단 복음을 전파하는데 견디어 내야 할 쓴 인내에 대하여 진술한다.”
그런데 오늘과 다음 주에 살펴보는 11:1-13은 요한계시록에서 그 해석이 가장 어렵다고 알려진 본문이고 따라서 해석도 분분합니다. 또한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요한계시록 전체 해석에 영향을 미칩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요한계시록을 보는지가 이 본문에서 가름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좀 자세히 보기 위해 두 번에 걸쳐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짧은 두 절의 본문은 이런 내용입니다. 작은 두루마리를 먹음으로써 새로운 선교의 사명을 받은 요한에게 하나님은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시면서 성전을 측량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지팡이 같은 갈대는 요단 계곡에서 자라던 대나무 같은 갈대로, 측량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길고 단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을 좀 더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성전 바깥 마당)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측량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시고 보호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본문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이방인에게 거룩한 성이 짓밟힘을 당하게 되는 마흔 두 달이 언제를 가리키며, 성전, 제단,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 성전 바깥 마당, 거룩한 성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해석을 설명함으로 시작하겠습니다.


1. 미래주의 해석—세대주의 (마 27:51; 엡 2:11-22; 마 24:2)
오늘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미래주의적 해석인데, 여기에는 대개 세대주의가 포함됩니다. 물론 이 안에도 세분된 해석들이 많이 있지만 일반적인 입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문자적 해석을 선호합니다. ‘마흔 두 달’은 그리스도 재림 직전의 환난 기간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요한이 측량해야 하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워지게 될 실제 성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다른 해석의 관점들과 동일한데 이 보호가 물리적인 보호라고 이해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방인에 의한 짓밟힘 속에서도 물리적으로 보호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절에서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바깥 마당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있을 것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보호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이방인은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불신 세상인데, 이들은 바깥 마당에 들어가 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박해하며 문자적으로 42개월 동안 거룩한 성을 짓밟아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 재림 전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다시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두 개의 모스크(알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돔 모스크)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성전이 세워지려면, 모스크들을 제거하고 성전이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무슬림과 피 흘리는 전쟁을 벌여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관점에 서 있기에, 이들에게는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과 1967년 이스라엘이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사건은 임박한 주님의 재림의 싸인이 됩니다.
특히 세대주의는 철저하게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를 구분하여 다루는데, 문제는 신약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믿는 유대인과 믿지 않는 유대인의 구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안소니 후크마(Anthony Hoekema)는 세대주의자들의 성경해석 원리를 이렇게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할 때 성경은 교회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며,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후원을 주장하고 그곳에 성전 재건을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은데, 이런 해석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졌는가? 바울 사도가 주님의 죽으심을 막힌 담을 허신 일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엡 2:11-22)? 왜 주후 70년에 하나님은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도록 허락하셨는가? 그리고 주님은 왜 그 일을 예언하셨는가(마 24:2)? 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제사를 폐하였다고 설명하는가?
사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위의 입장을 견지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2. 상징주의 해석 (요 2:21; 계 21:22; 고전 3:16-17; 6:19; 엡 2:21-22)
그렇다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른 이해일까요? 요한계시록이 속하는 묵시 문학을 해석하는 바른 방식은 문자적 해석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본문 외에도 대부분의 본문에서 상징들을 가지고 서술됩니다. 이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불신 세상이 교회를 박해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해석은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 그리고 성전 바깥 마당까지를 문자적인 성전으로 이해하는 대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에서 성전은 세 가지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입니다(요 2:21; 계 21:22).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두번째 용법은 그리스도인의 몸입니다(고전 3:16-17; 6:19).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세번째로 성전은 교회를 가리킵니다(엡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본문에서 측량 대상인 성전은 이 용례들 가운데 교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도 전체적으로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전 바깥 마당’도 교회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본래 솔로몬 성전에는 안 뜰과 바깥 뜰로 두 개의 뜰 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헤롯 성전은 제사장의 뜰, 이스라엘(남자)의 뜰, 여인의 뜰 등 세 뜰이 있었고 담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비록 이들은 ‘이곳을 넘어오는 이방인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가 써있는 담 밖에 있어야 했지만, 이 영역까지도 성전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바깥 마당도 하나님의 참 백성을 가리키는 긍정적 표현일 수는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전제에서 저는 두 가지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을 제시하겠습니다.
그 두 가지 해석의 차이는 측량하라고 하신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 그리고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신 ‘성전 바깥 마당’을 어떻게 구분하여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A. 참 교회(신자)와 거짓 교회(신자)의 구분 (2:14-15, 20; 3:1-3,16)
첫째는 측량 대상인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참된 교회인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고,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신 ‘성전 바깥 마당’은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참된 신자가 아닌 명목상의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그냥 두라(ἐκβάλλω)’는 말이 신앙 공동체에서 추방할 때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마 5:13; 눅 13:28; 14:35; 요 6:37; 12:31; 15:6). 결국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명목상의 신자들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여 결국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과 함께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해석은 앞에서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버가모 교회의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2:14),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2:15),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의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하고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은 자들’(2:20), 사데 교회에서 행위의 온전함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3:1-3),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자들(3:16)과 같은 자들을 지적하고 그들을 경고하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입니다.

B. 영적 보호와 물리적 보호
상징주의적 해석으로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좀더 본문의 의도를 잘 드러내준다고 보는 또 하나의 해석은 측량 대상인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과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성전 바깥 마당’을 동일한 하나님의 참된 교회로 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말하자면, 성전과 바깥 마당 모두를 두 개의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는 동일한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것은 보호하신다는 것을 영적 보호와 물리적 보호를 구분함으로써 설명합니다.
측량 대상인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보호하신다는 의미는 영적 보호를 의미하고,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신 ‘성전 바깥 마당’은 물리적 보호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측량하라고 하신 것은 자기 백성을 모든 환난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데, 그들의 영혼을 지켜주시고 그들이 믿음과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게 지켜 주신다는 의미이고,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이 물리적 영역에까지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부는 측량하고 일부는 측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영혼)는 지켜 보호하시고 일부(육체)는 보호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해석은 7장에서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속하며 모든 환난에서 그들의 영혼을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9:4에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이 해석은 ‘그냥 두라’는 단어는 추방을 의미하지 않고, 믿지 않는 세상이 하나님의 참 백성에게 행하는 배척과 박해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 21:33-46; 막 12:1-12; 눅 20:9-18)에서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과 심지어 아들까지 ‘내쫓았던’ 데서 박해적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주님이 설교를 하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낸 경우나(눅 4:29), 예루살렘 사람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쳤다고 할 때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행 7:58).
이 해석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큰 환난 속에서 당신의 교회를 영적으로 보호하시지만 물리적인 보호를 약속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물리적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쓴 맛입니다. 이것은 두 증인 환상에서도 계속 이어질 주제입니다.
교회는 겉으로만 보면 종종 패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참된 임재가 함께 하기에 영원한 사망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될 것이고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3. 거룩한 성 (단 8:13; 계 10:7; 단 12:7)
이제 이 두 구절의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하셨을텐데, 2절 하반절에서 “그들(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한 말씀을 봅시다. 여기서 이방인에게 짓밟힘을 당하는 ‘거룩한 성’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성이라고 묘사되는 것은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바깥 마당을 측량하지 않고 내준다는 것이 세상의 다양한 해악으로부터 물리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였듯이, 이방인에게 마흔 두 달 동안 짓밟힐 거룩한 성도 문자적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박해를 받을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8:13을 보지요. “내가 들은즉 한 거룩한 이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이가 그 말하는 이에게 묻되 환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단 8:13).” 이것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마치게 될 것입니다(10:7). 성소와 백성의 짓밟힘은 마흔 두 달 동안이라고 본문의 지적은 지난 주에 읽었던 다니엘 12:7과 맥을 같이합니다.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단 12:7).”


4. 마흔 두 달의 짓밟힘 (단 7:25; 눅 21:24; 눅 4:25; 약 5:17; 계 11:6).
이제 이 말씀에서 연결해서 ‘마흔 두 달’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바로 위의 다니엘 12:7에서는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7:25도 볼까요?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다니엘 7:25).”
여기서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나오지요? 이 기간은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는 기간(단 12:7)이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작은 뿔에게 성도들을 넘겨주시는 기간(단 7:25)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지는 3절에서는 ‘천 이백 육십 일’이 나옵니다. 이것은 두 증인이 예언을 하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묶어서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이 세 기간은 모두 동일한 기간을 가리킵니다. 42개월은 날수로는 1260일이고 해수로는 3년 반(한 때 두 때 반 때)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방인이 교회를 박해하는 환난의 시간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세상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기간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때’라고도 불립니다(눅 21:24).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누가복음 21:24).”
다니엘서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 표현된 것은 악이 맘껏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된 환난의 기간에 대한 표준적 상징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사실, 엘리야가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여 그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가 오지 않은 기간인 삼년 반과 관계가 있습니다(눅 4:25; 약 5:17; 계 11:6). 그래서 3년 반은 심판의 전형인 셈이고, 그것이 ‘한 때 두 때 반 때’로 표현되는 42개월, 1260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은 주님의 재림 직전의 문자적 3년 반을 의미하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는 시간, 즉 전체 교회 시대이고 복음의 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 마흔 두 달은 첫째 나팔에서 여섯째 나팔이 불려지는 모든 시대를 포함하는 기간입니다. 이 짓밟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박해의 정도와 방식은 달랐을지라도 세상의 박해를 받지 않은 때가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 직전에 이런 특성을 가진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에게 해당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5. 적용과 교훈 (딤후 3:12; 1:8)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짧은 본문에는 성전, 제단, 경배하는 자들, 바깥 마당, 거룩한 성이라는 개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모두가 다 교회를 수식하는 개념들이라는 것과, 교회가 이방인 즉 적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불신 세계에 의해서 박해를 당하는데 그 기간이 마흔 두 달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교회인 성도들의 영혼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 보호하시지만, 이것은 성도들이 물리적 보호를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보듯이, 신실한 성도들이 그들이 가진 믿음과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하고 물리적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박해와 환난도 그들의 구원을 흔들 수 없었고 그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증거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승천에서 재림 사이, 교회의 모든 시대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느 특정한 시대에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죽임으로써 박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특정한 지역에서는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도 성도가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할 때, 고난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디모데후서 3:12).”는 말씀이나,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8).”는 말씀은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모든 신자들에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삼켰을 때 그 배에서는 썼다고 말한 말씀의 쓴 맛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단 맛만 누리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단 맛이 있는가 하면 쓴 맛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이제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두 가지 해석 가운데 첫번째는, ‘바깥 마당’을 명목상의 신자들 결국에는 신앙을 버리는 배교자가 될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단 맛만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쓴 맛을 볼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의 교훈을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이며, 매우 위험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해석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측량한 자기 백성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사탄이 신자의 육체적 생명을 앗아갈 수 있고 온갖 물리적 위해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승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영혼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한계시록은 무서운 책이 아니라 위로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책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내가 참으로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고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가 질문해 보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자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우리 형제들에게 오늘과 같은 이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될까요? 그렇지 않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과 비할 수 없이 편안한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그리고 1세기 말의 성도들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이 말씀은 동일하게 들려져야 하고 동일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과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살고자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우리의 믿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