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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성경장절분류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1). 네 나팔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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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심판과 회개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1). 네 나팔 심판

요한계시록 8:6-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7-19

말씀내용
이제까지 6장부터 8:5까지의 본문에서 우리는 일곱 인의 심판 내용을 상고하였고, 이제 두번째 심판 시리즈인 일곱 나팔의 심판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일곱 나팔 심판의 내용은 8:6부터 11장까지 이어집니다.


1.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심판의 비교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일곱 인의 심판과 일곱 나팔의 심판은 유사한 패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4+2+1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네 개의 유사한 심판들이 나오고 이어서 두 개의 심판이 나온 뒤에 막간이 있고 마지막 일곱째 심판이 행해지는 패턴입니다. 처음 네 인의 심판이 각각 말들과 말 탄 자들의 심판이었는데, 처음 네 나팔의 심판도 자연 세계의 여러 영역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나팔(다섯째와 여섯째) 심판 이후, 막간이 등장하고(10:1-11:13) 그 뒤에 일곱째 나팔 심판이 시작됩니다. 이 패턴을 4+2+1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패턴을 좀 더 설명하자면, 처음 네 나팔 심판이 땅(자연계)에 대한 심판이라면,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 심판은 땅에 거하는 자들 즉 짐승의 나라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나팔 심판은 최후의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곱 인 심판과 비교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더 있습니다. 처음 네 인 심판에서 나타나는 정복과 전쟁의 피흘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 등은 인간의 죄로 인해 생기는 불가피한 결과들이라고 설명될 수 있지만, 나팔 심판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악한 세상을 처벌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점에서 나팔 심판은 인 심판이 더 심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팔 심판의 직접적 대상은 하나님께 지독한 적개심을 가진 세상입니다. 심판의 강도가 세질수록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맹렬함도 강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번의 재앙을 주실 때, 바로의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지던 것과도 비슷합니다. 심판의 강도가 세질수록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맹렬함도 더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곱 인 심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섯째 인에서는 하늘 제단 아래서 기도하는 성도들의 영혼을 보았고, 여섯째 인이 마친 뒤의 막간에서는 인침을 받은 144,000명과 구원받은 큰 무리(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보았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그 큰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기에 능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곱 나팔 심판에서는 교회의 존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땅에 거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잘 간파한 데렉 토마스(Derek Thomas)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 심판은 인침을 받은 주님의 백성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구속 목적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있다면, 나팔 심판은 인침을 받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의 관점에서 동일한 실재를 보고 있다. 인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큰 위로로 시작한다면, 나팔 소리로 시작하는 나팔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을 향해 부어지는 큰 화를 가져온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심판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하나 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곱 인의 심판이 발생한 뒤에 일곱 나팔 심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곱 인—일곱 나팔—일곱 대접 심판의 환상이 순서대로 이어지는 것은 요한이 본 환상의 순서이지, 역사 속에서 심판이 일어나는 시간 순서가 아니라는 점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이미 여섯째 인의 심판에서 천체와 피조세계가 붕괴되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보았는데, 어떻게 그 이후에 자연계 그것도 1/3에 대한 심판이 새롭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인과 나팔 그리고 대접의 이어지는 세 심판 시리즈의 환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양상을 오버랩시키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최후의 심판을 포함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주지하면서, 오늘은 일곱 나팔 심판 중에 처음 네 나팔 심판의 내용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2. 일곱 천사에게 주어진 일곱 나팔(2,6; 9:20-21)
일곱 나팔 심판에 대한 언급은 8:2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8:3-5이 일곱째 인의 심판 내용을 보여주는 동시에 일곱 나팔 심판의 서곡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잠시 끊어졌다가 6절에서 제대로 시작하게 됩니다.
2절에서 요한은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는” 것을 환상 중에 보게 됩니다. 여기 일곱 천사가 등장하는데, 아마 이들은 특정 집단의 천사들로서, 천사 중에서도 높은 계급에 속하는 대천사(archangels)들이라고 보여집니다. 유대의 외경에는 이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잠시 소개하자면 우리가 들어본 미가엘과 가브리엘 외에, 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사리엘, 르미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들 천사의 존재 보다 이들에게 주어진 나팔입니다. 일곱 나팔이 일곱 천사에게 주어졌고 그 나팔들이 하나씩 불려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팔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나팔이 등장하는 본문들을 종종 만납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불려지는 나팔 소리는 온 백성을 향한 하나의 신호로 여겨졌습니다. 가령, 나팔은 백성을 소집하는 일에(민 10:3), 지파들을 행진하게 하는 신호로서(민 10:5-6), 전쟁의 때를 알리거나(민 10:9) 거룩한 절기를 기념하기 위하여(민 10:10; 레 23:24; 민 29:1) 그리고 왕의 즉위식에서(왕상 1:34,39; 왕하 9:13) 불려졌습니다.
그리고 하나 특별히 주목할 본문은 에스겔 33장인데, 나팔이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하라는 말씀하십니다(겔 33:3). 여기 언급되는, 나팔의 경고 기능은 요한계시록의 나팔 심판 해석에서 논쟁점이 되기도 합니다. 일곱 나팔 심판에서 나팔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함으로써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는 신호인가 아니면 죄인을 향한 최종적 심판의 나팔 소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나팔이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가 아니라, 최종적 심판의 나팔소리라는 주장의 근거는 주로 여리고 성 함락의 본문에서 발견됩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 성을 돌 때 일곱 제사장이 각각 일곱 양각 나팔을 들고 그것을 불면서 행진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 돌기를 마치고 일곱 제사장이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의 외침과 함께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됩니다(수 6). 이 나팔 소리는 여리고 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팔 소리는 회개하라는 경고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일곱 나팔 심판의 나팔의 기능은 죄인들을 향하여 회개하라는 경고의 나팔인지, 이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인지는 여전히 논란이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단서는, 9:20-21입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요한계시록 9:20–21).”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하는 자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거하는 자들은 무서운 심판 속에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나팔 심판의 나팔은 ‘주로’ 심판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에서도 나팔에 대한 언급들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자신의 언급과 바울 사도의 언급인데, 주님의 재림과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신호로서 나팔이 불려집니다. 그 말씀들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태복음 24:30–31).”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린도전서 15:52).”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데살로니가전서 4:16).”
나팔이 불려지는 신구약 성경의 배경들을 고려하면서 살펴볼 때, 요한계시록의 나팔은 회개를 촉구하는 나팔이라기 보다는 종말의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알리는 신호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제 6절을 보십시오.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요한계시록 8:6).” 일곱 나팔 심판이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적을 물리치시고 심판하시기 위하여 역사 속에 개입하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3. 네 나팔 심판의 의미(7-12)
우리는 7-12절에서 처음 네 나팔 심판의 내용을 보게 되는데,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자연계에 임하는 심판입니다. 첫째 나팔 심판은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땅에 쏟아져서 땅의 삼분의 일을 태우고 수목의 삼분의 일과 각종 푸른 풀을 태워버리는 내용입니다(7). 둘째 나팔 심판은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져 바다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의 생물들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선된다는 것입니다(8-9). 셋째 나팔 심판은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강으로 떨어져 강들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져 그 물을 먹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입니다(10-11). 그리고 넷째 나팔 심판은 해와 달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져서 낮과 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12).
심판은 땅과 각종 과실수와 채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바다와 강으로 이어지고 어둠의 임함으로 연결됩니다. 특징은 그 심판의 대상들의 삼분의 일이 심판을 받아 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회개의 기회가 있다는 의미이고 진노 중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히 쏟아지지 아니하고 억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내용들이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재앙들과 닮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첫째 나팔의 피 섞인 우박과 불은 애굽에 내린 일곱째 재앙과 닮은 꼴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애굽에 불덩이가 섞인 우박을 내리심으로 밭의 채소와 들의 나무를 다 상하게 하셨습니다(출 9:22-25).
또 둘째와 셋째 나팔에서 바다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강들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게 한 것은 나일 강에 임한 첫째 재앙과 흡사합니다(출 7:20-25). 나일 강은 한 순간에 피로 변했고 고기들이 죽었고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넷째 나팔 심판은 애굽 전체에 칠흑같은 흑암이 임했던 아홉번째 재앙과 닮았습니다(출 10:21-23).
네 나팔 심판들의 양상이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려진 재앙들과 닮았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입니다. 출애굽 때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은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와 권능을 증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대적으로 애굽의 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각각의 재앙들은 자연계에 임하는 재앙들이었지만, 실제로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애굽에 내린 재앙은 바로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네 나팔 심판은 애굽에 내린 재앙들이 가지는 이런 의미들을 모두 보여줍니다. 자연계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 권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애굽의 신들의 무력함이 드러났듯이, 모든 자연계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습니다. 첫째 나팔 심판이 인간의 환경, 인간에게 식물을 제공하는 환경을 파괴하는 심판이었다면, 바다에 임하는 둘째 나팔 심판은 인간의 교역에 대한 심판을 포함합니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로 변했고 바다 생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은 것 외에,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졌다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다는 로마의 호수로 여겨지던 지중해를 가리키는데, 로마 제국에게 바다의 항로는 경제와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생계를 바다의 교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이 의지하는 교역을, 경제의 주요 수단을 파괴한 것입니다. 셋째와 넷째 나팔 심판도 모두 이와 같이, 인간이 의존하고 살아가는 그래서 때로는 인간의 우상이 되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농업, 경제적 교역, 생존에 필수적인 물, 그리고 빛을 거두어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승리할 수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재앙은 바로와 사람들을 회개케 하시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재앙이 거듭되고 강도가 심해질수록 그 강퍅함도 더해지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의 목적은 사실, 바로와 신하와 백성을 회개케 하심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박해한 자들과 그 권력을 향한 심판이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백성을 구하시고 온 천하에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출 9:14-16). 네 나팔 심판도 바로 그런 의미로 주어지는 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4. 교회를 지키시는 하나님(9:4; 출 9:26)
이 세상을 향한 네 나팔 심판은, 처음 네 인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재림 전까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심판이었던 것과 같이 그 시대에 일어나는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류가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들을 끊어 내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회개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심판이 세상에 행해질 때, 교회도 이런 심판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섯째 나팔 심판에서 우리가 주목할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9:4).”
하나님께서는 이마에 인침을 받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라고 명하십니다. 사실, 애굽에 내렸던 재앙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 내용을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무서운 우박이 불덩이와 함께 내려 애굽의 모든 채소와 나무들을 쳤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출 9:26).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이 사는 고센 땅을 구별하신 것은 네번째 재앙부터 였습니다. 일정한 정도, 교회도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인 성도들을 연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 혹독한 심판에서 자기 백성을 완전히 구별하사 보호하실 것입니다.
때때로 이런 심판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씀을 제대로 읽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땅에 거하는 자들’ 즉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심판 속에서 자기 백성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도록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신자의 표, 회개
또 이런 심판의 말씀들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화산의 폭발이나 핵전쟁 또는 체르노빌 참사와 같은 방사능 유출 사고, 바다를 오염시키는 유조선의 침몰, 환경 파괴로 인한 강들의 오염 등 많은 천재지변이나 인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그런 것들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지라도, 결코 그것들에 제한될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런 사건 사고들을 볼 때, “아 드디어 주님 오실 때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종종 잘못된 판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의 시대에 계속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심판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일어날 것이지만, 최후의 심판에서 절정을 이루게 될 것들에 대한 전조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이런 심판의 양상들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본 네 나팔 심판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안전하다고 여기고 사는 모든 것들을 치시는 심판이었습니다. 땅과 수목과 푸른 풀이 상한 것은 우리가 의지하는 밥 곧 식물(食物)을 치시는 심판입니다. 바다에 대한 심판은 많은 사람이 생존과 행복의 조건이라고 여기는 돈 곧 경제에 관한 심판입니다. 강과 물샘에 대한 심판은 인간 생존의 필수요소인 물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을 쳐서 어두움이 임하게 하심은 인간이 의지하는 빛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 생존에 중요한 것들입니다. 밥과 돈, 물과 빛, 어느 것 하나 인간에게 사소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들을 의지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의지의 대상이거나 신뢰의 대상 혹은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이것들을 의지하고 바라고 신뢰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을 베푸시고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가져가실 권리도 있으십니다. 밥과 돈과 물과 빛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영화가 물거품이 될 때, 사람들이 의지하고 살아가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실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층 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때를 감당하는 성도의 본분입니다.
지금 온 세상은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많은 사람들에게서 정상적인 삶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밥도 경제도 영향을 받고 있고 생존의 위협 혹은 어두운 우울함의 그림자가 우리를 덮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심판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적인 것도, 최후의 심판도 아닙니다. 그저 리허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불편하고 궁핍해지고 우울함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주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낙심과 우울과 비참에 빠지는 것이 신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인침을 받은 자기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우리가 의지하던 것이 밥과 돈과 물과 빛이었음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이 무서운 재앙 속에서도 죄인들은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회개합니다. 신자와 불신자,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유기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그가 신자이고, 그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회개가 얼마나 복되고 은혜롭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기회인지를 알고 누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코로나 19의 재난 상황에서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인 불평과 낙심과 우울과 비참이 아니라, 회개로 하나님께 나아가 참된 즐거움을 회복하는 복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