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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예배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0).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

요한계시록 4: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4-12

말씀내용
우리는 요한계시록 4-5장의 하늘 보좌의 환상을 살피는 가운데, 4장에서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그리고 보좌에 대한 묘사들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계속해서 4장의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 그리고 하늘 예배의 광경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33장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보고 살 자가 없으므로, 당신의 등을 보여주신 것과는 달리(출 33:18-23), 사도 요한은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주변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주께서는 그것을 기록하라고 명하셨고 오늘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사도가 보았던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과 그 보좌 주변 그리고 하늘 예배의 광경을 보는 영광을 누리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1. 이십사 장로들 (4; 계 5:8,5; 7:13; 14:3; 대상 24:3-19; 25:9-31; 벧전 2:9)
계속해서 하늘 보좌의 주변을 묘사하던 요한은, 4절에서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둘려 있는 이십사 보좌들과 그 보좌들에 앉아있는 이십사 장로들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모두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 언급했듯이, 이십사 장로들은 천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사실, 이십사 장로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제가 보듯이 천사적 존재로 보는 해석과,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로 보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십사 장로를 성도로 보기 어려운 것은, 이들이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중보적 역할을 한다든지(계 5:8, 어떤 성도도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이런 중보적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천상의 일들에서 해설자(화자)로 등장하는 장면들(계 5:5; 7:13) 때문입니다. 또한 이십사 장로는 14장의 십사만 사천의 구원받은 성도들과도 구별됩니다(계 14:3). 이런 이유들로, 이십사 장로가 단순히 성도를 대표한다고 보기 보다 천사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왜 이들을 그냥 천사라고 하지 않고, ‘이십사 장로’라고 말했을까요? 24라는 숫자와 장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앉은 보좌와 흰 옷, 그리고 금관은 각각 무엇을 의미합니까?
먼저 24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구약 12지파의 족장들과 신약 12사도들을 합하여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천사들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다윗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순서대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각각 24 그룹으로 나눈 것에 기초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대상 24:3-19; 25:9-3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영단번의 제사를 완성하신 후, 모든 신자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으므로(벧전 2:9), 신구약의 모든 신자들을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의 경배와 예배를 이렇게 연관 지어 이해하는 것입니다. 24라는 숫자를 어떻게 보든지 이것은 신구약 시대의 모든 신자를 대표하는 개념이 됩니다.
둘째로 장로라는 개념을 보면, 구약성경에서는 백성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장로는 기본적으로 ‘지혜로운 지도자들’입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의 직분으로서 교회를 다스리고 목양하는 지도자들을 장로라고 합니다. 즉, 장로는 교회의 대표일 뿐 아니라, 회중을 다스리는 지혜로운 지도자들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은 모두 금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앉아있는 보좌와 함께, 그들이 다스리는 자들이며 왕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또 흰 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거룩한 자들임을 시사합니다.
정리하면 이십사 장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 신구약의 구원받은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는 천사들인데, 특별히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을 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왕적 권세를 가진 높은 지위의 천사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세상을 다스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들입니다. 4:10-11을 보지요.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4:10–11).” 이어지는 5장과 11:16 그리고 19:4에서도 이십사 장로는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드리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둘려 있는 이십사 보좌에 앉아 있는 이십사 장로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통치 정부의 내각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도를 대표하며 왕적 권세로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십사 장로는 신자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다(벧전 2:9)”라는 말씀의 영광스러운 의미를 우리는 이십사 장로를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2. 네 생물 (6b-8; 겔 1:5-6,10; 10:2,14,16; 사 6:2-3; 계 5:6; 시 18:10; 계 1:4)
두번째로 살펴볼 대상은 네 생물입니다. 6절 하반절에는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라고 말씀합니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라는 네 생물의 위치는 하나님의 보좌와 이십사 장로들의 보좌 사이 입니다. 여기서 ‘보좌 가운데’라는 말은 약간 모호한 면이 있지만, 지근 거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좌 바로 옆에 네 생물이 있고, 그 주변으로 이십사 장로들이 앉은 보좌가 원으로 둘려 있는 것입니다.
네 생물의 존재는 구약 성경의 두 부분과 관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스겔 1장입니다. 에스겔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 환상 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가진 네 생물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겔 1:5). 네 생물은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가졌는데(겔 1:6), 그 얼굴들은, 사람, 사자, 소,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이었습니다(겔 1:10).
그런데 에스겔 10장을 보면,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은 ‘그룹’이라고 불리는 천사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 10:2,14입니다.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그룹들에게는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째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에스겔 10:2,14).” 여기서 1장의 소의 얼굴이 10장에서는 그룹의 얼굴로 바뀌었는데, 이는 당시에 소의 얼굴이 그룹의 이미지에 대한 일반적 이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번째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던 이사야 6장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그 옆에 모시고 선 스랍들을 봅니다. 그들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사 6:2),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사 6:3). 스랍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천사로서 하나님을 곁에서 모시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본 네 생물은 어떻습니까? 요한의 네 생물은 표현은 에스겔의 환상과 같지만, 모양은 조금 차이가 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네 생물은 각각의 생물이 네 얼굴을 가졌지만(겔 1:6), 요한이 본 네 생물은 각각 하나의 모양을 대변할 뿐입니다(계 4:7). 또 에스겔의 네 생물은 각각 네 개의 날개를 가졌으나(겔 1:6) 요한이 본 네 생물은 각각 여섯 개의 날개를 가졌다는 점에서(계 4:8) 이사야의 환상에 더 가깝습니다(사 6:2).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송하는 점도 요한의 네 생물은 이사야서의 스랍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본 네 생물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이들도 이십사 장로처럼 천사적 존재라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로버트 마운스(Robert Mounce)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생물은 천사적 지위 중 높은 지위, 보좌의 직접적 수호자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데 천군을 인도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네 생물은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이 위치한 그룹이나 스랍과 관련된 높은 지위의 천사들일 것입니다.
네 생물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다른 한편으로는 피조물 전체를 대표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은,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계 4:6b,8a)”는 표현에서 그렇습니다. 이는 아마도 날개의 앞 뒤로 눈들이 가득하다는 것인데, 온 세상을 살피시고 아시는 하나님의 신적 전지성을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성령님을 ‘일곱 눈’이라고 표현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계 5:6). 네 생물은 지적으로 탁월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피조물들에 대하여 끊임없는 불침번을 서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네 생물에 대한 주목할만한 묘사를 7절에서 봅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요한계시록 4:7).”
이 묘사는 하나님을 대변하고 피조물도 대변합니다. 우선 이 묘사는, 네 생물이 다른 모양을 가지는데, 각각 사자, 송아지, 사람의 얼굴, 그리고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사람을 포함하여 피조물 전체를 대표하는 개념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들은 각각 하나님의 능력(사자), 하나님의 신실하심(송아지), 하나님의 지성(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독수리)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이레니우스가 170년 경에, 네 생물을 각각 네 복음서를 가리킨다고 했고(사자 요한, 송아지 누가, 사람 마태, 독수리 마가), 많이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성경해석상의 근거를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라고 했습니다(계 1:8a).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목도한 스랍과 같은 모양입니다. 일단 날개가 여섯이라는 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민첩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에스겔 10장은 하나님의 병거 보좌를 그룹들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고(겔 10:16), 시편 18:10은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라고 기록합니다. 네 생물이나 그룹이 그 날개들로 하나님의 병거 보좌를 움직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존재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룹, 스랍, 그리고 그룹과 스랍이 결합된 형태의 네 생물이 별도로 있었다고 보기 보다,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보좌 옆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높은 계급의 천사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여섯 날개를 통해 계시하는 내용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사야 6:2을 보지요.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이사야 6:2).”
두 날개는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 보좌의 지근거리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천사가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함과 근본적으로 구별되시며,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딤전 6:16) 영광과 존귀과 감사와 권능을 받으시기 합당하시기 때문입니다(계 4:10-11). 하나님은 거룩한 천사라도 그 얼굴을 가려야 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다른 두 날개로는 두 발을 가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려야 한다면, 어찌 더러운 발을 하나님 앞에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더럽다는 것은 하나님의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심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떨기나무 불꽃 가까이로 다가갈 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출 3:5).
그리고 스랍은 다른 두 날개로는 날았다고 했는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이 네 생물이 무엇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8절 하반절입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요한계시록 4:8).”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외치는 것도 이사야 선지자가 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사 6:3). 네 생물이 드리는 천상의 예배는 이제 보좌 환상의 중요 주제인 예배의 이미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쉬지 않았다는 의미라기 보다, 반복적으로 계속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5:9-10절에서 그들은 다시 찬송을 부르고, 5:14에서 아멘으로 화답하며, 19:4에서도 찬송을 드립니다.바울 사도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나(살전 5:17) 그 자신이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한 것이(롬 1:9; 골 1:9; 살후 1:11) 반복적으로 기도했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네 생물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찬송하는데, 이런 방식을 헬라어로 트리사기온, 라틴어로는 상투스나 테르상투스(tersanctus), 우리말로 삼성송(三聖誦)이라고 합니다. 우리 찬송가에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8장)이 그런 찬송입니다. 이로써 네 생물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온전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드러냅니다.
네 생물의 찬송의 대상은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 일곱 번 나오는데(1:8; 4:8; 11:17; 15:3; 16:7; 19:7; 21:22), 구약성경의 ‘만군의 주’와 비슷한 표현입니다. 이는 모든 만물과 역사 속의 사건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주권을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전능하다’는 표현은 추상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온 세상의 만물에 대한 실제적 통치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령, 대한민국의 국군 통수권자가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할 때, 이것이 추상적인 말이 아님과 같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만 드려질 칭호인데, 로마의 황제들이 자신에게 사용하여 숭배 받기를 원했던 표현입니다. 일부러 황제들이 받고 싶어했던 칭호인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는 표현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요한은 한편으로는 황제 숭배자들을 향해 경고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1:4에서 상고했던대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3. 하늘의 거룩한 존재들이 드리는 예배 (9-11)
이렇게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에 대한 부분들을 살펴본 우리는, 이제 9-11절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드리는 천상의 예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밤낮 쉬지 않고 경배하는 네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립”니다(계 4:9). 그러자 이어서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경배를 드립니다(계 4:10).
특별히 이십사 장로의 태도가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그들은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렸습니다. 관을 보좌 앞에 던졌다는 것은, 그들의 권세가 위임 받은 권세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복종과 충성을 의미하는 행위입니다. 역사에서는, 정복당한 통치자들이 정복자에게 자기 왕관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여기서 이십사 장로는 자발적으로 왕관을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경우입니다.
헨델의 메시야가 공연되던 1743년, 할렐루야 코러스가 울려 퍼질 때, 듣고 있던 잉글랜드 왕 조지 2세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 경의를 표함으로써 만 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후일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마다 관중들이 일어서는 전통의 시발점이 된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왕이십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권력을 가졌든지 상관없이, 만 왕의 왕 앞에 엎드리고 그 왕권 앞에 자신의 왕관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사야가 본 환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창화하는 스랍들은 두 날개로 그들의 얼굴을, 다른 두 날개로는 그들의 발을 가렸습니다. 거룩한 천사라도 하나님을 뵐 수 없었음을 암시합니다.
11절은 이십사 장로의 찬송의 내용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은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 재위)가 자신에 대해 사용하라고 명한 칭호였습니다. ‘합당하오니’라는 말도 황제의 개선 행진에서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용어들을 너무나 친숙하게 알고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고난을 택했던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그 용어들이 사용될 수 있는 유일하게 합당한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이십사 장로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입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이 경배의 내용은 요한계시록 4장의 핵심을 잘 보여줍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이 모든 것을 유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권능을 받으시기 너무나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만물에 포함되지 아니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보이는 만물만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만물도, 천사도, 영적 존재들도 다 하나님의 지으신 바요, 하나님께서 유지하고 계시는 대상들입니다. 교회와 은혜의 영역만이 아닙니다. 자연과 모든 피조 세계 그리고 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자요, 주권자요, 유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답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저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저를 보호하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저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같은 요리문답 52문답은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52문/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내가 어떠한 슬픔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전에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사 내게 임한 모든 저주를 제거하신 바로 그분이 심판자로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머리 들어 기다립니다. 그가 그의 모든 원수들, 곧 나의 원수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형벌하실 것이며, 나는 그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에게로 이끌어 들이실 것입니다.


4. 예배: 낮아짐을 통해서만 탐구되는 신비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4장의 하늘 보좌 환상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그것은 1세기 말 고난 가운데 살던 신자들에게 가르치시려는 메시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2:4),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들이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순교의 위협에 처해있던 서머나 교회(2:10), 거짓 가르침의 유혹에 직면했던 버가모 교회(2:14,15), 거짓 여선지자를 허용했고 그녀의 음행과 우상숭배에 이끌렸던 두아디라 교회(2:20),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사데 교회(3:1), 박해의 위협 아래 있던 빌라델비아 교회(3:8,9), 미지근했던 라오디게아 교회(3:16)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그들이 하늘의 보좌에 계신,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유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너무나도 가볍게 여기는 21세기에 사는 우리도 1세기 말의 성도들 만큼이나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에 하나님의 보좌 옆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호위하며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 거룩한 속성을 가지고 창조된 천사 중의 천사들이 얼굴과 발을 가리고, 혹은 엎드려 관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던지며 경배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감사 그리고 권능을 하나님만이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찬송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에게도 돌려지거나 나누어질 수 있는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권능은 없습니다.
이것이 예배이고 하나님께 드릴 마땅한 예배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가 취할 영광과 존귀, 감사와 권능은 없습니다. 그는 얼굴과 발을 가리고 엎드릴 뿐이며 자기의 관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벗어 드릴 뿐입니다. 예배는 예배자에게 낮아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한없는 낮아짐이고 티끌과 먼지와 같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렇게 예배를 알고 계셨습니까? 이렇게 예배를 드려 오셨습니까? 오늘 만물이 그 뜻대로 있게 하시고 그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그렇게 예배하고 있습니까?
예배는 한 마디로 낮아지고 비천해 지는 것입니다. G.B.Caird의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예배의 낮아짐을 통해서만 탐구될 수 있는 신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위대한 장이다.”
오늘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낮아짐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5번에 걸쳐 상고해온 요한계시록 4장은 여러분에게는 봉인된 책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 한 구절 한 구절의 의미를 머리로 다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어제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그린 다큐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을 다시 봤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감히 제가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럽다고 느끼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의 삶에 감동만 할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한 죄인을 그렇게 복종하게 했고 낮아지게 했으며 비천한 자리에 머물게 했고 또한 거룩하고 위대하게 만들었고 평생의 삶으로 예배하게 하신 그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란 말인가?
저는 그분의 삶에서 무한히 크시고 무한히 거룩하시고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요한이 본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밤낮 쉬지 않고 경배하는 그 하나님이심을 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광에 마음이 사로잡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직면하고 살아가는 모든 도전을 넉넉히 견디고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뵙고, 그 하나님의 영광에 마음이 사로잡힐 때, 이것이 우리 가슴을 하나님의 위엄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고동치게 하고, 살 이유를 주며, 모든 더러움에서 순전함과 거룩함을 지키게 해주고, 하늘 본향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이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함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합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요한계시록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