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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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승리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5). 전투하는 교회, 승리한 교회

요한계시록 3: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3-08

말씀내용
우리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상고했습니다. 이 모든 메시지를 통해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주님의 엄숙한 경고를 제대로 들으셨습니까? 그 경고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셨습니까?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회개할 것을 찾아 회개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잘못된 행실을 고쳤습니까?
사랑하는 벧샬롬 교우 여러분, 오늘 저는 일곱 교회에 주신 주님의 메시지 전체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우리가 과연 귀 있는 자로서 이 말씀을 제대로 들었고 정직하고 바르게 반응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4장의 하늘 보좌 환상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렇게 한 번 돌아봐야 한다는 부담이 몇 주 동안 계속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주신 부담이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돌아보아야 할까요?
여러분은 이전에도 요한계시록 2-3장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여러 차례 들어보셨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이 본문 전체를 설교한 것이 제 기억에만, 이번이 세번째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몇 번 설교했고 몇 번 들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정말 들었는가, 주의 말씀을 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말씀들이 엄숙한 경고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경고를 흘려 듣는다면, 주님은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고(2:5), 심지어 토해버리겠다고(3:16)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주님이 항상 하시는 잔소리 쯤으로 여겨 건성으로 들은 분들이 여러분 가운데 있을까 염려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한 저 자신에게도 묻습니다. “너는 정녕 주의 말씀을 마땅한 두려움을 가지고 들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저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단 한 분도 이런 자리에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제가 오늘 이 2-3장의 본문으로 다시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4장 이후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요한계시록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교회에 관한 전체 그림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를 들으실 때, 주님께서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두려움으로 듣는 가운데, 교회에 관한 가르침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 두 개의 분리된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의 두 모습 (계 7:9-16; 엡 5:27)
오늘 설교 제목은 [전투하는 교회, 승리한 교회]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그 성격에 따라 구분하는 방식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 구분을 처음 한 사람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많은 사람은 루터가 두 개의 분리된 교회를 가르친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두 개의 분리된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의 두 양상을 말한 것입니다.
존 칼빈은 보이는 교회(가시적)와 보이지 않는 교회(비가시적 교회)를 구분하면서, 각각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세계의 시초부터 선택된 모든 사람이다…보이는 교회는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온 땅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이다(강요 4.1.7).” 보이지 않는 교회와 구별되는 보이는 교회는 선택된 자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칼빈은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에 따라, 많은 양들이 바깥에 있고 많은 늑대들이 안에 있다(강요 4.1.8).”
그럼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벧샬롬교회는 유형 교회입니까, 무형 교회입니까? 성경은 벧샬롬교회 같은 지상의 교회는 유형적이면서 동시에 무형적이라고 말합니다. 유형적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는데, 왜 무형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적이고 그 영적 본질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이 연합은 신비적이어서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상 교회는 무형적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 본질은 실제적인 형식을 입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 영혼이 몸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무형 교회도 필연적으로 외적 기관인 유형적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가령, 공적인 신앙고백과 행위, 말씀 선포, 성례의 시행 등 눈에 보이는 형식들을 통하여 교회는 가시화됩니다.
그렇다면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는 언제나 모든 점에서 상응하지는 않지만 둘 다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은 동일합니다. 앞에서 칼빈이 보이는 교회와 선택된 자들을 동일시할 수 없다고 말한 점이 여기서 똑같이 적용됩니다.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가 언제나 모든 면에서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임종의 자리에서 회개한 사람이나 유형 교회로부터 출교 당했으나 참 신자인 사람들의 경우에서 나타납니다. 반대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참 믿음이 없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무형 교회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유형 교회에는 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형교회는 때로는 잘 보이지만 때로는 잘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교회가 순수한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는 면에서 약화되고 성례를 시행하는 일에서 순전함을 잃어갈수록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형 교회, 무형 교회와 유사한 또 다른 방식의 표현법은 바로 오늘 주제인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한 교회입니다.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모두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는 안팎의 대적들과의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는 승리한 교회입니다. 신학자 벌코프의 표현을 빌면, “천상의 교회에서 칼은 승리의 종려나무로 바뀔 것이며 전쟁의 함성은 승리의 노래로 바뀌고 십자가는 면류관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싸움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한 교회는,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분리된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의 두 양상일 뿐입니다.
주님께는 하나의 교회, 하나의 신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본 교회의 모습은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5장 5항은, “하늘 아래 가장 순수한 교회들도 혼합과 오류 아래 있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극히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당들이 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잘 보았습니다. 얼마든지 사데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교회도 이런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의 전부는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의 또 하나의 양상은 천상의 승리한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7:9-16에는 천상의 승리한 교회가 나타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요한계시록 7:9–16).”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연약하고 넘어지는 교회를 이와 같이 온전하게 하시고 당신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가 되게 하십니다(엡 5:27). 안팎으로 위협을 받고 이 모든 위협적 요소들과의 싸움을 쉬지 않아야 했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은 영광스러운 교회의 면모를 보여주심으로써,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영광스러움을 알고 거기에 합당한 자세를 가지고 오늘 벌어지는 싸움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2. 좌절과 교만 사이
주님의 한 신부, 주님의 한 회중으로서의 교회가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은, 불가피하게 우리 안에 긴장의 요소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부조화는 다 여기에 기인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것은 신자 개인에게 있어서는 죄인이면서 의인인 신자의 존재 자체에 기인하는 긴장이고,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와 천상의 승리한 교회 사이의 긴장이 만들어내는 부조화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게 교회인가?”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신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하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거짓된 신자는 교회를 비난하고 비난하다가 교회를 떠납니다. 그 비난은 단지 교회가 아니라 그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비난함이고, 교회를 떠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떠남임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신자에게도 긴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참담하게 느껴지는 교회의 현실에서 고통스러워하지만, 좌절하고 포기하는 대신 주님의 약속대로 교회의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씨름을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가지는 본질상의 또 하나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한심해보이는 교회도 현실이지만, 영광스러운 승리를 만끽하는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도 장차 누릴 부인할 수 없는 교회의 현실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교회를 향한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는 말씀 안에 있는 약속입니다.
이런 성경적 이상은 중요합니다. 영광스러운 완성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우리를 교만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인용하여 말씀드렸듯이, 교회는 아무리 순수한 상태에서도 혼합과 오류 아래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현실을 바르게 보고 싸우기만 한다면, 결코 교만해질 여지는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진리의 날을 세우고 이단들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책망을 받지 않은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도 영적 싸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에게는 좌절과 교만 사이의 긴장이 늘 있는 것입니다.


3. 이김의 열쇠: 그리스도와 복음(고후 10:3-4; 엡 6:12; 삼상 17:47; 대하 20:15; 골 1:28-29; 롬 11:36, 33-34)
주님은 일곱 교회를 향하여 공히 약속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오직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면서 피할 수 없는 긴장, 좌절과 교만 사이에서 어떻게 승리하며 결국 이기는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너희가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모든 능력과 젖 먹던 힘까지 사용하여 이 싸움에서 이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고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일 뿐 아니라(고후 10:3-4; 엡 6:12), 이 전쟁은 우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삼상 17:47; 대하 20:15).
그래서 이 싸움을 감당하는 비결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서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면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말씀합니다(엡 6:10). 또한 골로새서를 쓰면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이 싸움을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로새서 1:29).”
여러분,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이를 위하여’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2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로새서 1:28).”
“그리스도를 전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주의 말씀으로 각 사람을 가르쳐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힘을 다해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수고는 자기 안에 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따라 수고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전심전력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을 따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감당하던 교회를 위한 싸움의 한 면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이기는 자에게 주신 모든 상급의 약속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까? 그저 열심히 하면 됩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승리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실패로부터 겪을 좌절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가 때로 경험하게 될 모든 승리로부터 느낄 교만함으로부터 우리가 보호를 받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롬 11:36).
기독교처럼 현실적인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처럼 인간의 죄성과 부패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저 잘 될거라는 막연한 낙관론으로 우리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고통과 좌절을 인정합니다. “인생은 네가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답이 없는거야”라고 긍정해줍니다. 그저 잠깐의 감각적 만족과 위로를 제공하기 위해서 비현실적인 약속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성경의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상태에 있든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가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복음으로 자신의 약함과 실패, 그리고 좌절을 넉넉히 이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실패 속에서도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거기서 내 모든 실패와 죄와 허물과 약함을 짊어지고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거기서 소망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로마서 8:33–34).”
이와 같이, 이김의 열쇠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승리의 비밀은 복음 안에만 있습니다. 이 복음의 은혜는 우리가 알량한 성공들에 취하여 교만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복음은 우리가 자신의 잘남으로, 자신의 성공과 성취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 잘 난 것으로 서지 않습니다. 모든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 앞에서는 다 더러운 걸레에 불과합니다(사 64:6).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은혜의 옷을 입고서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를 작고 비천하고 주눅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상가 2층의 작은 교회라는 것입니까? 예배당 건물이 없다는 것입니까? 교인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까? 교회 이름만 말하면 다 알아주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만일 이런 것들이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움츠러들게 한다면, 우리에게는 정말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은 그런 요소들로 인해 우리가 작아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실망시키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교회에 사랑이 없습니까? 교회가 따뜻하지 않습니까? 말하는 것만큼 실천이 없나요?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목사에게 실망하셨습니까? 그 어떤 요소가 여러분을 실망시키든지, 그 모든 실망에서 우리를 건강하게 지켜주는 것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실망을 기도제목으로 바꾸고 소망 가운데 기도 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반대로 우리를 교만하고 우쭐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른 교회들과 비교해서 더 나은 것이 있습니까? 우리를 교회적으로 우쭐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교회가 주님이 친히 피 흘려 사신 교회요(행 20:28), 주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마 16:18) 그 교회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면, 우리는 정말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가 그리스도 밖에서, 복음이 아닌 것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육신으로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김의 열쇠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4. 도상(途上)의 교회, 말씀을 듣는 교회(시 110:105)
교회는 이렇게 도상에 있습니다.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는 천로역정이라는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별의별 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존 번연은 그의 명저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믿음과 소망을 만나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믿음과 소망의 존재는 그 여정에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까?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은 이 여정에서 얼마나 즐겁게 보내는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낙오하는 자 없이 모두 목적지인 천성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교회는 듣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입니다. 듣는다는 말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말 그대로 그 음성을 귀로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 말씀을 헛되이 듣지 않은 것이 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우리도 고백합니다(시 110:105). 교회가 이 여정을 끝까지 잘 걸어가기 위해서 결정적인 것은 그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거듭 강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에베소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까? 그리고 생각했습니까? 돌이켰습니까? 이렇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그 모든 말씀을 여러분은 들었습니까? 그 엄중한 주님의 경고를 다 들었습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했습니까? 장차 어떤 고난이 와도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께 충성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적당히 타협하며 우상을 섬겨온 삶을 회개하고 우상을 깨뜨리고 주님만을 섬기기로 하셨습니까?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들인 것을 회개했습니까? 여러분은 이제 복음의 말씀을 굳게 잡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기로 작정했습니까? 그런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만일 이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여러분이 “아니요”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 주님! 주님의 모든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듣게 하옵소서.”라고 은혜를 구하십시오.


5. 이상적, 현실적 그리고 낙관적인 교회
말씀을 맺습니다. 벧샬롬교회는 10년 후에는 어떤 교회가 될까요?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고 갈 길이 먼 교회인 것을 저는 압니다. 여기서 저를 웃게 하는 것은 막연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저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두 모습을 묵상합니다. 우리는 비록 전투하는 교회의 현장에서 살아가지만, 주님은 제게 눈을 열어 승리한 교회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그때 저는 웃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제가 드리는 그 어떤 수고도 주님 앞에서 크게 수고를 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저는 너무나 잘 압니다. 도리어 이 수고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지를 고백하게 하십니다. 승리한 교회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말입니다.
사랑하는 벧샬롬교회인 여러분, 만일 승리한 교회의 이상은 높지만 전투하는 교회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상주의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입에서는 비판이 쉴 새 없이 나오게 될 것이고 이내 우리는 좌절하고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전투하는 교회의 현실에는 밝지만 승리한 교회의 이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지나친 현실주의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늘 적당한 타협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 가지를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상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승리한 교회의 이상을 언제나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투하는 교회의 싸움터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전투에서 힘들어하고 때로는 넘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에게는 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막연한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낙관적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주께서 우리를 천상의 승리한 교회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주께서 우리를 그 승리한 교회의 영광으로 우리를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시간표로 볼 때는 아직 아니지만, 영원하신 주님의 시각으로 볼 때, 전투하는 교회는 이미 승리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이고, 그러면서 낙관적으로, 우리는 교회 안팎의 모든 대적들을 인식하고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싸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앞에는 감당해야 할 전투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영광스러운 승리가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요한계시록 3: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