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추천설교 - 회개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3). 그리스도 보다 소중한 것이 있는가

요한계시록 3:14-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2-23

말씀내용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착각에 빠진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17). 그들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꼈지만 주님이 보실 때 곤고하고 가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를 자랑했지만 주님이 보실 때 가난한 자들이었고, 많이 보고 안다고 말하는 그들은 주님 앞에서는 눈 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싼 고급 의류들을 걸치고 다녔지만 주님이 보실 때 그들은 벌거벗은 수치 조차 가릴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출발점이 어긋난 이상, 그들의 신앙 생활은 겉돌기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신앙은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1세기 말 라오디게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여전히 미지근하고, 제대로 복음에 사로잡히고 성령께 붙잡힌 바 되어 뜨겁게 주님을 사랑했고 섬긴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보면 믿는건지 아닌지 확신이 없습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그들은 하나님도 알 수 없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지식 위에 세워지는 것임에도, 그들에게는 이 지식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까?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앙이 어떻게 설 수 있습니까? 그들의 미지근함의 중심에는 이 영적 무지가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알지 못하는 신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에게 온전한 충성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셨지만(14),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입으로는 시인하나 삶으로는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할 주제가 시작됩니다. 그들의 영적 기만은 영적 무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이 영적 무지는 또한 우선순위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있었습니다.


1. 무너진 우선순위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사소한 것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눈 먼 사람들의 특징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과 잠깐 있다가 없어질 가치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 삶은 선택과 결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이상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일들을 마주합니다. 하다못해 시리얼을 사러 가도 종류가 너무 많아 선택을 위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는 청년은 “이 사람이 과연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배필이 맞는가?”고민하며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인생에 너무나 중요한 결정이지요. 교회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 영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입니다. 인생과 영혼에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어떤 가치, 어떤 기준을 더 중요하고 우선된 조건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가가 결국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의 실력인 것입니다.


2. 신앙의 진위(眞僞) 문제와 성숙의 문제
사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두 개의 이슈가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진위 문제와 성숙의 문제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한편으로 성숙한 신앙의 중요한 표지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영적 분별력이 신앙의 진위를 가늠하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분별력 없는 미성숙한 결정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면서 살아간다고 해보지요. 그렇다면 그는 미성숙한 것이 아니라 거짓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적어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더러 잘못된 미성숙한 결정을 내린다고 할지라도, 돌이키게 되고 또 많은 경우 영적으로 보이는 것과 진정한 복음의 진리를 구별할 수 있게 되고 바른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참된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 없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 신앙이 성경에 토대를 두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의 여러 면에서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섬긴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여러분 신앙의 토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이 참된 신앙으로 결코 자랄 수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만 신자 안에는 본능적인 지혜가 길러집니다. 이렇게 분별력을 갖추게 되면, 쓸데 없는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영혼을 혼란하게 만드는 모든 ‘거짓된 영적 가르침’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30년 이상,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성경의 토대를 벗어나서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천지나 온갖 말도 안 되는 이단, 사이비들이 창궐하게 되었고, 교회 안에는 스스로를 신자로 생각하는 거짓 신앙도 허다하고, 참된 신앙이라고 해도 매우 미성숙한 신앙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성경의 토대를 떠난 결과, 오늘날 많은 교회와 목사와 신자라 하는 자들이 이단 사이비와 조금도 다르지 않고, 유치한 종교놀음에 지나지 않는 수준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신앙의 진위 문제와 신앙의 성숙의 문제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멀었기에,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자들을 택할 때에도, 세상적 기준과 외적 조건들을 앞세우게 되므로, 교회는 이 악순환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어떻게 ‘충성되고 참된’주님 같이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세상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이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채, 정치에 목숨을 거는 자들 중에 목사, 성도라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이슈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자들, 그리고 무지하고 무분별하여(제가 보기에는 미성숙의 문제가 아니라 거짓 신앙에 머무는 자들일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이들을 추종하되 ‘충성되고 참되게’ 추종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온갖 사이비 이단들의 가르침을 분별하지 못하므로, 어리석게도 그들을 추종하여 인생과 가족과 영원을 망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이런 주의 말씀을 대하고 들을 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주님이 보시는 나는 어떤 모습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3. 사랑하는 자를 향한 책망과 징계(19,22,20; 요 10:3-4; 약 2:18; 갈 5:6; 마 10:37; 출 20:12; 엡 6:4; 눅 14:26-27; 창 29:30-31; 신 21:15-17; 딤전 6:10)
주님은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요한계시록 3:19).”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속한 등록교인들이 모두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 중에 당신의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가 자신의 신앙을 확신하는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의심없이, “아 주님께서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구나!”하고 다시 귀를 쫑긋 세우고 마음을 열고 주님의 책망과 징계를 달게 받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들이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주님께서 언제나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2)”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들을 수 있고 들어야 한다면 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육신의 귀를 가진 모든 자가 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은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3-4).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책망과 징계입니다. 순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책망이 먼저 오고 징계는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책망이 없이 징계부터 하시지 않습니다. 징계는 책망을 거부하고 듣지 않을 때 주어지는 매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책망한다고 하십니까?
그들의 미지근함, 영적 착각과 교만함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말 중요한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그들의 무너진 우선순위를 책망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주님을 문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교인들이었고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부요 하고 부족함이 없게 느끼게 했던 것은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부와 물질로 배부름과 만족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아쉬울 게 없었고, 세상은 정말 재미있고 살만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와 삶에서 우선순위가 무너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교회와 그들의 삶에서 두번째나 세번째 자리라는 사실을 생각하거나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보통 교회 안의 청년들이 결혼 배우자의 조건을 놓고 기도할 때, 믿음을 첫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결정을 해야할 때, 믿음은 두번째나 세번째로 밀려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적 실력이고 믿음의 실력입니다.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말하는 것이 곧 믿음도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나고(약 2:18), 사랑으로 드러나며(갈 5:6), 그것은 언제나 우리 삶의 우선순위와 관계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오해를 살지도 모르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태복음 10:37).”
이것은 주님의 농담도, 과장법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 20:12)”고 명하셨고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엡 6:4). 이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부모를 혹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 보다 더 잘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관계도 주님과의 관계에 우선할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종종 이 말씀은 이단과 사이비들에 의해서 왜곡된 채 강조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더 사랑하는’ 문제를 다루셨지, 부모와 자식을 버리라거나 미워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당신은 누가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르시는군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6–27).” 이 말씀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은 ‘더 사랑한다’는 표현이 아니라, ‘미워하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첫째로 모든 말씀은, 십계명이나 성경의 모든 일관된 가르침에 준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구이언하지 않으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라면 여기서 이 말, 저기서 저 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성경 해석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원리입니다. 여기서 미워하라는 말씀은 주님께 대한 으뜸 충성을 가리키는 어법이지, 말 그대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해석은 매우 중요한 문법적 근거를 가집니다. 주님은 아람어를 쓰셨는데, 이것은 아랍어, 히브리어와 함께 언어의 분류에 따르면 ‘셈’어에 속합니다. ‘셈’어에 속하는 언어들에는 ‘덜 사랑한다’는 비교급을 ‘미워한다’고 표현하는 문법적 형식이 있습니다. 가령, 창세기 29:30-31을 보십시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창세기 29:30–31).”
여기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레아를 미워함’이 됩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는 ‘사네’라고 읽는데, ‘증오하다, 미워하다, 가증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은 레아를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라헬에 비하여 덜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에, ‘사랑 받지 못함’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한 부분을 더 찾아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21:15-17입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신명기 21:15–17).”
미움을 받는다는 의미는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단어의 의미 그대로 미워하고 심지어 가증스럽게 여겼다면, 그녀를 버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급의 표현일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도 당연히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고 그 다음에, 사랑하는 배우자, 부모와 자식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의 기본인 충성됨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사랑하는 삶은 가족들에 대한 사랑으로만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는 무엇이라도 올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에게 그것은 물질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치장해주는 외적인 모든 것들 말입니다. 커리어의 성공과 성취, 원하는 것들을 갖추고 누릴 권리, 멋진 옷, 멋진 차와 집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허영의 시장(Vanity Fair)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것은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이런 요소들에 의해 교회 밖으로, 그들의 마음 밖으로 쫓겨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덜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말처럼, 삶의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는 주의 말씀은 가볍게 들을 말씀이 아닙니다(딤전 6:10).
라오디게아 교회는 현저하게 이 일에서 실패했습니다. 우선순위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책망하십니다. 우선순위가 무너진 그들에게 주님을 향한 뜨거움을 기대할 수 없었고 열심 어린 충성도 바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언제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책망하십니다. 여러분은 그 책망을 알아듣고 교정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이 19절에서 말씀하는 바, ‘회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회개하는 신앙입니다. 회개가 없는 신앙은 거짓 신앙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우리 회개의 원천과 근거가 됩니다. 매주일 공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위로하시고 격려하시지만, 또한 책망을 하십니다.
언제나 이 주님의 말씀이 목사라는 사람을 통해서 선포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시험거리가 되기 쉽습니다. 목사의 말씀을 주님의 책망으로 듣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랜 신앙 생활을 해왔고 직분을 가지고 있을 때는 책망을 듣기가 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찰스 스펄전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목사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책망에 좀 더 귀를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 안식일마다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더 경청한다면, 많은 징계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는 것은 그동안 책망을 무시해왔기 때문이고, 우리가 책망을 거부한 후에야 하나님의 매가 오기 때문입니다.”(스펄전설교전집 요한계시록, pp.257-258)


4. 문 밖의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라.
그래서 주님은 20절에 문을 두드리는 당신에게 문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로버트 마운스는 그의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눈먼 자기만족으로 착각에 빠진 성도들은 주님을 자기들의 교회에서 출교시켜 버렸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십시오.
주님은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라고 우리 모두에게 촉구하십니다. 이 구절은, 복음전도에서 많이 사용되곤 하는데, 본래의 의도는 믿는 성도들이 주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여기고 주님을 자신들의 삶에서, 교회에서 쫓아내고 살아갈 때, 그들을 돌이키려고 그들을 부르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을 더 이상 문 밖에 세워 두지 마십시오. 주님을 다시 여러분의 삶 중심에 모셔 들여 주님과 사귐이 있는 삶을 회복하십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주님을 문 안에 모셔 들인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신다는 이 말씀은 구약성경 아가서 5:2의 인유입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아가 5:2).”
사랑하는 솔로몬이 한 밤중에 문 밖에 와서 열어달라고 두드립니다. 하지만 술람미 여인은 다시 옷을 입고 문을 열기 위해서 발을 더럽힐 생각을 하니 귀찮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갈등만 하다가 시간이 지체되고,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사랑하는 자는 이미 물러가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오셔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함께 식탁에 앉아서 먹는다는 것은 관계가 회복되었고 그 친밀한 관계를 누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 중에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책망입니다. 책망을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또한 여러분 중에는 아예 하나님이 없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염려를 다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시건만, 염려와 근심을 맡길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아직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았기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바로 지금 자비하신 주님 앞에 여러분의 실패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문을 열라는 주님의 음성 앞에, 겸손히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을 연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우리의 인격적 반응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강제와 힘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열지 않으십니다.
지금, 문을 열어 주님이 여러분의 삶에 오셔서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것 보다 복되고 안전하고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보다 소중한 것, 주님 보다 앞세우는 것이 있는 한, 여러분은 문 밖에 계시는 주님을 향해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는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모든 것을 두는 것입니다. 최우선의 자리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5. 보좌의 약속(21; 잠 23:26; 신 8:3)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주님과 이 땅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신 자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도리어 그들을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아 왕 노릇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 교회의 마지막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시는 상급 약속인 보좌의 약속은 사실 4-5장에서 이어지는 보좌 환상을 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4-5장을 보면서 이 약속이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놀랍고 벅찬 영광의 약속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6. 적용적 교훈(잠 23:26)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종교적 행위나 봉사, 헌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식탁에 앉기를 원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잠 23:26).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1세기 말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두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물질, 성공이 주는 자기 만족의 달콤함이 좋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부유한 교회요, 교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사귐을 방해했고, 그 사귐의 무한한 가치를 상대화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만나는 삶이 없었음에도 그들은 안심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3).”는 말씀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서운 것은 자신의 영적 삶이 무너지고 있을 때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책망을 들으셨습니까? 주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라고 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열심을 내십시오. 여러분의 무너진 우선순위를 바로잡으십시오. 주님을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모셔 들이십시오. 스마트폰에, 인터넷에, 쇼핑에 밀려나 문 밖에 서 계시는 주님을 다시 모셔 들이십시오. 그리고 밀려난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십시오. 열심을 내십시오. 회개하십시오.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주님을 제대로 섬기겠다고, 제대로 믿겠다고, 주님을 최우선의 자리에 모시고 살겠다고, 무너진 주님과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겠노라고 말씀 드리십시오. 그리고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차든지 뜨겁든지 하십시오. 미지근함을 벗어버리십시오. 충성되고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이런 복된 회개와 회복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풍성하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