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추천설교 - 영적착각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2). 영적 착각에 빠진 교회

요한계시록 3:14-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2-16

말씀내용
1.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
한 인격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자아 도취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 만족에 취해서 자신의 실상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답이 없습니다. 물론 자신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불쌍하고 비참한 인생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실제로 부자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거지입니다. 그는 전문분야의 박사 학위를 가진 최고의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무지한 자입니다. 그는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그는 벌거벗은 자입니다. 그는 많은 독서와 훈련으로 교양과 상식이 충만한 지성인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그는 미련합니다. 그의 육체는 너무나 완벽하고 건강합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너무나 무력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진노와 형벌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자입니다. 그는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알지 못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지적하신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찰스 스펄전이 말했듯이, “역사 속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라오디게아 교회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정말 슬프게도 오늘날은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더 늘어났습니다.” 저는 21세기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은 누가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나쁜 태도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중 누구에게도 그 말씀이 무관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만족에 취해 영적 착각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가 나 자신의 문제는 아닌지, 그리고 우리 교회의 문제는 아닌지, 깊이 자신을 살피는 가운데 이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2. 1세기 말의 라오디게아와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는 주전 2세기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2세에 의해 세워진 뒤, 그의 부인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두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고대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뿐 아니라 최고급 양모(검은)로 만들어진 값비싼 의류 산업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라오디게아를 고대 세계의 가장 부유한 도시의 목록에 올려놓았습니다. 주후 61년, 지진으로 라오디게아 시 전체가 거의 무너졌을 때에도, 이들은 황제의 지원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자금으로 라오디게아를 재건할 수 있을 정도 였습니다. 이외에 라오디게아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의과대학이었는데, 여기서 제조된 안약은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도시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물 수급 문제로 그들은 물을 수입해야만 했습니다. 9km 정도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14km 정도 떨어진 골로새에서는 바바산의 만년설에서 녹아 흐르는 차가운 물을 수로로 끌어들여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도, 골로새의 차가운 물도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까지 흘러 들어오고 나면 미지근해져서 마시기에는 역겨운 물이 되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부유한 도시 라오디게아에 세워진 교회가 직면하는 가장 큰 위협은 내부의 이단이나 사이비적 가르침이 아니었고, 외부로부터의 유대인이나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1세기 말 소아시아의 도시에서 이런 보편적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교회는 없었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위협은 경제적 부의 문제였습니다. 라오디게아의 경제적 부에 근거한 번영과 사치는 교회의 경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교회를 자기도 모르게 영적 안일함과 게으름에 머물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3. 아멘이신 그리스도(14; 사 65:16; 골 1:15)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시작합니다. 주님은“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묘사됩니다(14). ‘아멘이시요’라는 주님의 칭호는 이사야 65:16에서 온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이사야 65:16).”
이사야 선지자가 두 번 반복해서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Amen)’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히브리말로 ‘아멘의 하나님’입니다. 히브리어 ‘아멘’은 ‘의지하다, 믿다, 의뢰하다, (동의하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뜻을 가진 ‘아만’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진실로, 참으로’ 또는 ‘확증하다, 입증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묘사되는데, 이 표현은 ‘아멘’을 풀어쓴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묘사된 이유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참되지도, 충성되지도 않은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같지 않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멘이라고 할 수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은 골로새서 1:15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로새서 1:15).” 골로새서의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표현이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표현되었습니다. 골로새와 라오디게아는 14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웃 도시였기 때문에, 골로새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읽혀졌을 것이고,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골로새서의 표현들은 이미 익숙한 표현들이었을 가능성은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를 라오디게아의 교회도 읽게 하라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골 4:16).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천지 창조에 선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4. 미지근한 교회(15-16)
15-16절에서 주님의 책망이 시작됩니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는 책망은 무섭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속을지라도,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며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며,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뜨겁거나 미지근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겠지만, 차가운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라오디게아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라오디게아는 물 수급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북쪽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배수관을 통해서 공급받았지만, 라오디게아까지 오면 그 물은 더 이상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해졌습니다. 또 동쪽 골로새로부터 차가운 청정수를 공급받아도 그 물은 더 이상 시원한 물이 아니라 미지근한 물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미지근한 물은 메스꺼워서 토하기 쉬웠습니다.
주님은 이런 배경을 가진 라오디게아 사람들에게 너희가 역겨워서 마시기 힘든 그 미지근한 물을 토해내듯이, 내가 너희를 토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열매 없는 행함, 그들의 영적 무기력을 책망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지친 자들에게 활기를 주거나 영적으로 병든 자들을 치유하지 못했고, 더위에 지친 자들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는 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쓸모 없는 불쾌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입에서 토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5.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착각(17-18)
주님께서 이렇게 지적하시는 그들의 영적 무기력의 실상은 17-18절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한 부자가 오래도록 먹을 것을 쌓아두고 심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눅 12:17-18).”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
이 사람에게 무엇이 부족했겠습니까? 그는 만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말은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다윗의 고백과는 하늘과 땅이 다름 같이 다른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주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말은 주님 조차 필요 없을 만큼 배부르고 만족스러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자기 만족은 그들이 자신들의 영적 실상을 전혀 보지 못한 착각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이것이 그들의 참된 실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였습니다(눅 12:21). 왜 이런 착각이 일어날까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쩌다가 이런 영적 착각에 빠지게 된 것일까요? 이 질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없고 인생이 이만하면 편안하게 돌아가고 있고 대체로 만족스럽다고 느낄 때, 우리도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빠져들어갔던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영적 착각에 빠지게 된 근저에는 나쁜 신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누리는 편안함과 안락함, 부와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는 신학입니다.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번영과 물질적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의심없이 받아들이게 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도 부요한 자라고 자연스레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역사에서도 드러났었습니다. 호세아 12:8입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호세아 12:8).”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은 여로보암 2세 때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주변 국가들에 대하여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국가의 강성함 아래서 상당한 부와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부요함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축복의 결과라고 당연하게 여겼고, 호세아 선지자는 이것을 지적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시 질문을 하지요. 부와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부와 축복을 누리면 안 됩니까? 그리스도인은 다 가난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유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경제적 부와 번영과 사회적 성공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처한 경제적 가난과 사회적 실패의 상황은 하나님의 징계일 수는 있지만, 저주이거나 형벌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처하는 부와 빈의 상황은 다 은혜입니다.
여기서 부와 번영이 하나님의 은혜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은 아닐 수 있다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은혜와 축복은 어떻게 다릅니까?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성경은 부와 재물,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이란 개념은 은혜와는 다릅니다. 축복은 내가 한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이라는 율법적 개념입니다. 우리가 신명기 28장에서 보는 바, 계명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여하에 따르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떠올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관점에서, 내가 누리는 부와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당연히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빠졌던 영적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누리는 부와 번영과 성공은 내가 하나님께 순종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영혼과 육신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부와 번영과 성공을 은혜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은혜는 자격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귀히 여기셔서 베풀어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다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에 감사함이 있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고 주어졌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며 쓰여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물질적 부가 내 영혼의 부요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당연히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더 고려해야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논할 때, 자칫 무시하기 쉬운 일반 은총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사업을 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사업을 잘 할 것입니다. 공부 잘 하고 성실한 학생은 좋은 성적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사회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일반적으로 더 나은 사회적 성취를 누릴 것입니다. 특별은총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일반 은총의 영역을 완전히 초월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학생이라면 성실하게 공부해야 좋은 성적을 얻을 것이고,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혜롭고 성실하게 일을 함으로써 사회적 성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그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 지혜로워지고 더 성실해지게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른 신학은 중요합니다. 내가 누리는 부와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일차원적으로 연결하는 신학은 나쁜 신학이고, 이런 신학의 열매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빠진 영적 착각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서,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 봅시다. 지금 내가 누리는 번영과 부는 내 영혼에 안전한가? 나는 영적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바르게 다루기 위한 시금석이 될만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부요함을 누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부요함이란 대단한 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저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고, 더 이상 관리비나 전기세가 얼마가 나올지 바들바들 떨지 않고 살아가는 정도만 되더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살 만하고 편안해서, 하나님을 매일의 삶에서 그다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부, 혹은 내가 처한 편안한 상황이 내 영혼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가늠하는 또 하나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우리의 물질과 시간의 사용은 언제나 우리의 가치관을 정직하게 반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의 물질과 시간 사용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신앙이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가? 드러낸다면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시금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누리는 부와 번영과 성공이 우리 영혼을 넘어뜨리는 것이 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빠졌던 심각한 영적 착각에 빠지지 않고 온전하게 주를 섬기며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물질과 시간 사용이 우리 신앙의 가치, 주님과 나의 관계, 주님의 가르침을 반영하도록 살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권장 사항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영혼의 안전띠입니다.


6. 영적 착각이 가져오는 진짜 위험(17b)
우리는 물질적 부와 번영과 성공이 어떻게 우리로 영적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지 그 원인을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이 영적 착각이 어떤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주님은 17절 하반절에“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자신을 비롯하여 아무도 이것을 보지 못했지만, 주님은 보셨습니다. 영적 착각의 결과는 영적 무지입니다. 그들이 모든 면에서 무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만 무지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영혼의 상태를 보는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의 곤고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곤고함은 비참함, 불행으로 가득함(극도의 불행)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영적 비참함과 불행은 그들이 누리는 물질의 안락함에 덮여 가려진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가련했습니다. 이것은 아무 소망이 없는 불쌍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고전 15:19). 이외에도 그들의 영혼의 실상은, 가난함, 눈이 멀어 보지 못함, 그리고 벌거벗음이었습니다. 지금 언급한 이 세 가지가 얼마나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외면적 모습과 대조를 보여주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기는 커녕 부자였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기는 커녕 안약과 의과대학으로 유명한 라오디게아의 명성에 어울리게 시력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벌거벗기는 커녕, 그 유명하고 값비싼 블랙 울로 만든 명품 의류들로 치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절에서 그들에게 세 가지를 주문하십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이 주님의 말씀은 17절에서 언급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실상 다섯 가지 중 마지막 세 가지와 관련이 됩니다. 가난한 것, 눈먼 것, 그리고 벌거벗은 것입니다.
영적 가난에 대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당시 라오디게아에서 금을 사서 보유하는 것은 부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정련하는 자의 불길을 통과하여 순도를 높인 믿을만한 금은 영적 부를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7).”고 했습니다. 금은 불의 연단 과정, 즉 고난을 상정하는 개념입니다. 순도 높은 금은 고난의 효력을 입증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그들의 믿음을 순도높게 만들어줄 고난을 보내시겠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은, 흰 옷을 사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입은 명품 옷들 때문에 자신들의 영적 벌거벗은 수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영적 벌거벗음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옷은 명품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씻은 흰 옷 밖에는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 명품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흰 옷,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드러내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계 19:8).
셋째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안약은 라오디게아가 자랑하는 수출품 중의 하나였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들의 보지 못하는 눈을 열어 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도, 흰 옷도, 그리고 안약도 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라고 했지만 사실 그것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7. 당신 안에 있는 피상성의 벽을 허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착각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자신들의 영적 실상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영적 착각이 초래하는 가장 무서운 결과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 착각에 빠진 사람에게는 자기가 아는 대로의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영적 착각에 빠지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 생활에서, 우리가 오래도록 붙잡고 살아온 그 전제, 그 편견, 그 오도된 확신들이 깨져야 합니다. 그것들은 피상성의 벽들입니다. 영적 착각에 빠진 사람은 그 피상성의 벽 너머에 있는 자신의 영적 실상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보지 못합니다.
그저 나의 행위, 수고, 봉사 등 외적 현상과 외적 행위들에 근거하여 자신의 영혼을 평가하고 “It’s Okay! 내 영혼은 평안해”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린도전서 3:18).”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너무나 위험한 것입니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신앙을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라고 설명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을 모르는 신앙은 거짓 신앙일 뿐입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적 실상을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주님이 보시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리는 편안함으로 인하여 영적 착각에 빠져 살고 있지 않다고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오늘 자비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피상성의 벽을 허물어 버리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오랜 세월 나를 붙잡고 있던 전제, 편견, 오도된 확신들이 무너지고 자신의 영적 실상을 보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선하심 그리고 아름다우심을 보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낮아진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영적 부요함으로, 흰 옷을 입고 밝히 보는 눈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