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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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거룩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7). 경계선이 없는 교회

요한계시록 2:12-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1-05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에 버가모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칭찬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버가모, 그 적대적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는 중에도 충성되게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께서는 그들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칭찬에 이어서 주님은 책망도 하십니다. 이 책망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의 본질을 붙잡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1. 교회 안의 배교자들(15; 2:6; 벧후 2:15-16; 유 11),
적대적 세상의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신실하게 지켰던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내부에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고 말입니다(15). ‘이와 같이’라는 말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 같은 가르침인 것을 시사하는 듯 합니다. 실제로 발람과 니골라라는 말의 뜻이 거의 비슷합니다. 니골라는 ‘사람들을 이기는 자’ 혹은 ‘그가 백성을 이기다’라는 것이라면, 발람은 ‘백성을 삼키는 자’ 또는 ‘백성을 지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라는 말씀으로 칭찬을 받았지만(계 2:6), 버가모 교회는 이 니골라 당의 가르침과 행위를 허용함으로써 책망을 받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교회였지만, 버가모 교회는 적대적 세상 앞에서는 믿음을 신실하게 지킨 반면, 니골라 당의 교훈에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어느 한 방면에서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이, 모든 방면에서 다 잘 한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도는 니골라 당의 교훈이 어떤 것인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교훈이 구약 시대 발람의 교훈과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이르게 되었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목적으로 고용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자, 발람은 결국 발락에게서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계략을 가르치고 떠납니다. 사실, 이 발락과 발람 사이에 벌어진 디테일한 계약의 내용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 외의 자료에서 이 내용을 언급하고 있고 신약의 저자들은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그리고 유다서도 발람을 언급합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 두 경우 모두 거짓 교사들을 정죄하면서, 그들이 발람과 같은 자라고 규정하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시면서 이것을 발람의 사건에 견주고 계시다는 것은 이 말씀이 무서운 경고임을 보여줍니다.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파멸에 이르게 할 뻔 했듯이, 니골라 당의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 역시 너희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렇다면, 발람이 발락에게서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계략을 알려주었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압 여인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바알브올의 숭배에 가담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크게 타락하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략은 성공하여 이스라엘을 크게 범죄하게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염병을 보내어 2만 4천명이 죽게 하셨습니다(민 25). 본문 14절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니골라 당의 교훈이 발람의 교훈과 같은 것이라면, 버가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결국 두 가지를 향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은 것과 행음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발람 사건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었듯이, 버가모 교회의 상황에서도 깊이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편으로는 순교자 안디바와 함께 순교를 무릅쓰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 니골라 당의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가만히 들어와 이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애국심과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을 보여주는 몸짓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신들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한 적절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쳤을 것입니다. 버가모의 시민으로서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려면 이런 신전 의식에 참여해야만 했던 교인들에게 이런 니골라 당의 교훈은 달콤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이교 신전에서 벌어지는 많은 의식들은 우상의 신전에서 음식을 먹는 것과 함께 신전 창기들과의 성적 관계를 포함하곤 했다는 점에서 구약의 바알브올의 사건과 닮은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이들 거짓 교사들을 발람에 비유하는 것은, 발람이 불의의 삯을 위하여 거짓을 말한 사람이었듯이 거짓 교사들이 결국 우상 숭배에 참여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을 조장하고 자신들 또한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는 점에서 유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을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5).” 니골라 당의 교훈이 들어왔다거나 니골라 당의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말입니까? 버가모 교회 안에 말이지요. 이 말씀은 “교회 안에 배교자들이 있다”는 선언이고 경고입니다. 교회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배교자가 아니라, 교회의 경계 안에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배교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한 바알브올 사건은 하나님께서 염병으로 쳐서 2만 4천명을 죽이심으로써 결말이 지어졌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래서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버가모 교회에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은 필연 주님의 심판을 초래할 것입니다.


2. 경고
주님은 그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랐거나 따르는 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배교행위로부터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무한정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속히 오셔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언제라도 오셔서 교회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지만 그것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경고한 바 있습니다.
“거짓 신앙고백자들이여, 여러분은 오른손에 거짓을 쥐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더 쌓지 않고도 이미 지옥에 충분히 내려갈 수 있게끔 되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여!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친히 손에 날카로운 검을 들고 교회에 가까이 오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야 합니다.”(스펄전의 요한계시록 설교, p.161)
회개를 촉구하신 주님은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게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보십시오. 주님은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회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배교한 자들입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도 된다고 가르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즉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른 자들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발람과 같이 거짓 가르침을 유포한 거짓 교사들도 포함됩니다.
결국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할 때,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수 13:22). 발람이 하나님의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순종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거짓 교사의 모델이 되었듯이, 이제 회개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발람과 같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버가모 교회에 오셨고, 그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워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21세기 한국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는 조금 뒤에 살펴보려고 합니다.
3. 상급의 약속
주님은 17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물론 형식은 다른 교회에 주신 말씀과 동일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독특합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무엇을 의미하며, ‘흰 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그 돌 위에 새겨진, 받는 자 외에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새 이름’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먼저, 여기서 ‘이기는 자’는 나골라 당의 교훈을 거부하는 자들, 또는 회개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이 주어질 것입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는 것은 버가모 교회가 우상의 제물을 먹은 것과 관련된 상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의 유혹을 피하고 그것을 거부한 자들에게 주님은 감추어 두셨던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먹게 하심으로써, 주님의 식탁으로 그들을 초대하여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하실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귀신과 연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전 10:20).” 그러므로 이 일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영광스럽게도 당신과의 친밀한 교제와 연합을 누리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임재와 친교에서 제외되고야 말 것입니다.
두번째로 ‘흰 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대인의 관습 중에는 돌을 유죄와 무죄를 가르는 투표의 도구로 사용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흰 돌은 무죄, 검은 돌은 유죄를 의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흰 돌을 주신다는 것은, 로마 황제가 황제 숭배를 거부한 것에 대하여 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에 처하게도 하였지만, 궁극적이고 최고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는 황제의 유죄 판결을 뒤집어 무죄를 선고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대법원, 즉 최종 판결에서의 승리를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그 ‘흰 돌’ 에는 그것을 받는 자 외에는 알 수 없는 새 이름을 기록하였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도 이와 비슷한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3:12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그 새 이름은 주님의 이름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는 칭찬을 들은 바 있습니다(3:8). 버가모 교회도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두 교회에게 주님의 새 이름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새 이름은 구원받은 하늘 공동체 안에서 참된 회원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새 이름, 받는 사람만 아는 그 이름을 주신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과 친밀하고도 독특한 개인적인 관계를 누리게 될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때때로 사회생활에서 누군가 유력한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거나 그 사람과 친한 관계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들입니다. 그것을 영어로는 name-dropping 이라고 합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어느 정도는 이런 관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약속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네게 내 이름을 줄테니, 너희가 얼마든지 너희가 내 사람이요, 내 친구요, 나의 소중한 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다녀도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이기는 자들은, 박해와 환난 중에도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이 사람들은, 니골라 당의 거짓 교훈을 거부한 이들은, 잠시 거짓 가르침에 빠졌을지라도 회개한 자들은 이와 같이 주님과 친밀한 관계 속으로 영원히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새 이름을 받는다는 한 것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짐승과 그 우상을 섬긴 자들이 짐승의 이름을 받는다고 한 말씀과 대조가 되는 표현입니다(14:11).


4. 경계선이 없는 관용하는 교회
그러면 이제 버가모 교회에 주신 주님의 책망을 오늘 21세기의 교회에 적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책망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경계선이 무너지는 문제입니다. 세상과 교회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같은 교회, 교회 같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경계선이 무너진 교회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됨의 표지나 교회됨의 표지는 더 이상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방 신전에서 함께 어울려 제사를 드리고, 그 음식을 함께 한 식탁에서 먹고 심지어 성적 음행을 행합니다. 그들은 버가모가 이교 사회로서 가지고 있던 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구별 없이 행동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니골라 당의 교훈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은 그 가르침을 버젓이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와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얻기까지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버가모 교회가 빠졌던 니골라 당의 교훈은 현대교회의 문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가장 고상한 덕목은 ‘관용’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차별 받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으며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고 살아갈 권리를 보장 받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인종, 언어, 피부색, 학벌, 종교, 부와 권력, 그 어떤 가치에 의해서도 사람이 사람의 존엄을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는 성경은, 이 점에서 가장 철저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것과 관련하여 성적 지향성에 의한 차별 금지라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성경은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상이 성경의 본문을 이겨 내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관용이라는 가치는 이제 현대사회 최고의 덕목이 되었고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7:1-2이 되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런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성경적인 가르침에 따르는 가치 판단을 중단할 것을 요구 받습니다. 교회와 사회를 가르는 경계선이 없는 관용하는 교회는, 오늘날 세상에서 소위 쿨한 교회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A. 성 정체성의 무너진 경계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모든 죄인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 주신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율법의 저주와 형벌 개념, 십자가의 대리적 형벌 개념 등을 다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결혼은 더 이상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고, 그냥 두 사람의 결합이라고만 정의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동성애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동성애자를 거부하지 않으시기에, 동성애자이면서, 아니 동성애를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어떤 죄책감도 없이 신자로서 하나님을 믿고 교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 다음에는 목사 안수의 조건이 무너집니다. 동성애자로서 목사의 소명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 받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지난 십 수년 동안에 미국의 대다수 주류 교단들이 걸어온 길을 설명 드리는 것입니다. 관용 보다 중요한 가치가 없기에, 누구도 이 가치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도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과의 경계선이 무너져버렸고, 현대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B. 성찬의 무너진 경계
또 하나 관용이라는 가치가 교회를 무너뜨린 예는 성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찬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심으로써 죄인을 구속하신 도리를 가장 잘 드러내고, 믿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주님의 그 죽으심을 기념하는 표지입니다. 주의 말씀은 이 식탁에 참여하는 자를 ‘주의 몸을 분별하는’ 자로 분명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고전 11:29). 누가 주의 몸을 분별하는 자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것이 죄인된 자신을 대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의 행위였음을 믿는 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구분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고, 이유를 묻지 않고 어떤 제한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식탁을 개방하는 교회들은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죄인인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는 분명한 경계선이 되는 성찬을 통해서 그들은 도리어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시 현대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일입니다.
C. 돈의 논리—탐욕—앞에서 무너진 경계
세번째는 돈의 논리에 의해 무너진 경계입니다. 세상은 돈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돈의 논리로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돈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교회에도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가만히 들어온 돈의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소위 번영신학은 이런 돈의 논리를 교회로 가지고 들어와 복음을 왜곡한 대표적인 가르침입니다. 거룩한 부자, 곧 성부(聖富)가 되라고 말하는 것, 또는 깨끗한 부자, 청부(淸富)가 되라고 하는 가르침 등, 곧 부자 되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너무나 많은 현대 교회의 강단이 이 거짓 가르침으로 더럽혀져 왔고 지금도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메시지가 세상에서 잘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고 종교적으로 승인해주는 번영신학을 전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돈의 논리, 곧 탐욕이 교회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골 3:5). 여기서 세상과 교회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세상이고 무엇이 교회인지, 그 구별이 모호해지는 것입니다.
D. 무너진 성윤리, 무너진 경계
교회와 세상, 세상과 교회를 가르는 경계선은 언제나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아니고 세상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그 선이 무너져가고 있고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성윤리에서 있어서도 세상과 교회의 차이를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포르노그라피로부터 시작해서 혼전순결의 문제와 결혼한 배우자에 대한 언약적 신실함의 문제에서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쯤은 괜찮다고 여기는 직장에서의 성희롱이나 성적 농담 등의 문제에서도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그들이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저는 그들을 신자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의 행동과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전 1세기 로마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창녀와 연애하는 것을 절대 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엄히 부정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자의 말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 세대에 허용된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관습과 전통에서도 어긋난 사상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도대체 그의 선조들의 관습과 전통이 무엇이길래 그렇습니까? 주전 4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말입니다. “우리는 쾌락의 도구로 창녀를 인정하며 잠자리를 위하여 첩제도를 인정한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아이를 가지며 집안을 돌보기 위해 부인을 둔다.” 이런 것이 1세기의 교회들이 살아가던 세상의 분위기요, 기준이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등의 사회적 지탄을 받을만한 윤리적 탈선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이런 관습들을 용인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살인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사회에서 행해지는 관습일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논리가 니골라 당의 교훈의 근거였고, 버가모 교회에는 이 거짓 가르침을 수용하고 따르던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21세기 한국의 벧샬롬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경계선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이런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무엇이 죄인지를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모두에 대하여 관용해야 하고 모든 것을 받아주고 용납해야 하니까요. 그것이 사랑이니까요. 성경의 선명한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을 전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교회는 경계선이 없는 관용하는 교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버가모 교회가 처한 위험이었고, 오늘날 현대 교회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입니다.


5. 교회의 울타리를 세워라.
주님은 이런 교회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명령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문제에서 세상의 논리, 세상의 가치, 세상의 기준을 용납하고 허용하고 그 관습과 행위를 따르고 있습니까?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잘못된 가치관과 기준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이키십시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울타리를 다시 쳐야 합니다. 울타리를 세워야 합니다. 가능하면 울타리를 거두어 내리고 문턱이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요즘과 같은 세상에 교회의 울타리를 세우고 울타리를 쳐야 한다는 말은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울타리를 처야 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가르는 울타리는 진리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우리가 교회 역사에서도 보거니와 작금의 한국교회에서도 보는 현상은, 진리가 무너지면 경건과 윤리도 무너진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 우리의 심령과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의 칼날이 둔해지면 우리의 삶도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버가모 교회의 상황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경건으로 무장시켜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버가모 교인들의 삶이 음행과 우상숭배로 무너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지면,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와 깊이와 진리성이 약화되고 무너지면, 따라오는 것은 목사들의 삶의 타락이고 교인들의 삶의 타락과 영적 해이입니다. 하나님의 양날 선 검과 같은 말씀이 우리의 철판같이 강한 양심을 꿰뚫고 그 안의 죄성을 찔러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죄성은 버젓이 고개를 들고 교회 안에서 조차 행세하려고 들 것입니다. 진리가 무너지면 경건도 무너지고 윤리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버가모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 입의 검으로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말씀, 좌우에 날선 진리의 검을 들고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보았던 ‘진리의 용사(Valiant-for-truth)’를 기억하십니까? 순례자들이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칼을 들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된 채 서 있었습니다. 그 진리의 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 이 검 한 자루와 이를 다룰 수 있는 기술만 갖고 있으면 감히 천사들과도 겨뤄볼 수 있고, 이 검은 결코 무디어지지 않으며 살과 뼈뿐 아니라 영과 혼까지도 찔러 쪼갭니다(히 4:12).” 그리고 이어서 그는 또 말합니다. “나는 칼이 내 손에 붙을 정도로 싸웠습니다(삼상 23:10)…그리고 마치 칼이 팔에서 돋아난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피가 손가락을 통해서 거기까지 흐르는 것 같아 피곤함을 모르고 싸웠지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의 교회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붙잡아야 하고 그 말씀으로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무너진 경계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강단에서 성령의 능력과 큰 권능으로 선포될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무너지고 회개하고 성도 답게, 교회 답게 지어져가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저는 진리의 용사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 검 한 자루를 가지고, 그리고 이 칼이 제 손에 붙어 마치 칼이 제 팔에서 돋아난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피가 손가락을 통해서 거기까기 흐르는 것처럼 피곤함을 모르고 싸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목사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그 거룩한 부르심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이고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분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그 검을 가지고 싸우십시오. 2020년의 첫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주 앞에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오. 진리의 용사처럼 그 칼로 싸우겠노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런 은혜로 한국과 세계 도처에 있는 주님의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