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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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충성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4). 지치지 않는 수고

요한계시록 2:1-7, 데살로니가전서 2: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2-15

말씀내용
우리는 이미 앞에서 세 차례에 걸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진리를 붙잡음으로써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여 드러냈고, 니골라 당의 가르침과 행위를 용납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신 일, 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심한 책망을 받은 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살펴볼텐데, 하나는 에베소 교회의 행위, 수고, 인내에 관한 주님의 언급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르는 상급에 관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상고한 바 있으므로, 주님의 책망 부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1. 주님이 아신다(2-3)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에 대한 이 묘사는 1장에서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주님에 대한 묘사, 즉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계 1:13a,16a)라는 묘사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묘사는 주님께서 일곱 교회, 즉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 사역자들을 붙잡고 계시며, 주님의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기에, 교회의 모든 일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는 ‘내가 안다’라는 언급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2절에서 “내가..알고”라고 하고, 또 3절에서 “아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에게도,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2:9)라고 말씀하시지요.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로 이어지는 모든 교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는 “내가 안다”는 표현이 모두 사용됩니다. 일곱 교회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주님은 그들의 수고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잘못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신다는 이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위로가 될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담을 넘어 두려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2. 행위와 수고와 인내(2-3,6)
주님은 먼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라고 말씀하시지만, 이 본문은 우리가 앞에서 이미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라고 한 부분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세 명사의 나열은 관용적 서술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령 데살로니가전서 1:3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 사도가 ‘(믿음의) 역사(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고 쓴 것과 유사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2절의 세 명사는 3절의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이라는 말씀에서 세 단어와 연결이 되는 듯 합니다. ‘수고’는 ‘게으르지 아니한 것’에 걸립니다. 우리 말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마는, 헬라어로 이 두 단어는 같은 어근의 단어입니다. ‘게으르지 아니한 것’이라는 말은 열심히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피곤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 개역개정역에서 ‘게으르지 않다’로 번역한 것은, 과중한 수고를 하다가도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일 것입니다. 소위 탈진하여 “아 내가 다시는 이렇게 수고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기 사용된 ‘수고하다’라는 단어는 단순한 수고를 넘어, ‘지치고 피곤하도록 애쓰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를 헬라어로 ‘코피아오(κοπιάω)’라고 읽는데,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배울 때, 코피나도록 수고하고 일한다는 것을 연상하면서 이 단어를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그렇게 열심히 지칠만큼 수고한 것에 대하여 주님이 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번째로, 2절에 인내라는 단어는 3절에 ‘참고’라는 단어에 연결됩니다. 이 두 단어 역시 헬라어로는 같은 단어입니다. 뜻 그대로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오래 참는 인내로써 안팎의 어려움들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세번째로는 행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3절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라고 할 때, ‘견디고’에 연결되는 듯 합니다. 사실, 이 두 단어들은 앞의 두 단어의 쌍들처럼 같은 단어이거나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들은 아닙니다. ‘견디고’라는 동사는 ‘(어떤 짐을) 들다, 짊어지다, 옮기다, 메다’와 같은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을 내려놓을 생각하지 않고 신실하게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네 행위’다라고 할 때, 사도 요한이 의미하는 모든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들(복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2절에서 요한 사도가 세 단어를 나열하지만, 처음의 ‘행위’를 뒤의 두 단어, 수고와 인내가 부연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짊어지고 가는 짐은, 지치고 피곤할 만큼 수고스러운 일이고 또 참고 인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는 에게해에 인접한 큰 항구도시였고, 당시 로마제국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대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신 아르테미스(아데미, 라틴어로는 다이아나) 신전이 유명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큰 소동이 일어났었지요. 그 소동이 일어난 원인은 은으로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큰 돈을 벌고 있던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많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자, 자기 사업에 손해가 있을 것을 보고 일으킨 소동이었습니다. 에베소는 이렇게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들은 아르테미스를 위한 신전을 건축했는데, 파괴와 화재로 두 차례 신전이 무너지고 주전 323년에 세번째로 재건된 신전은 고대세계 7대불가사의에 속한 건축물이기도 했습니다. 이 목록을 작성한 시돈의 안티파트로스는 이 건축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전차(戰車)를 위한 길이 있는 바빌론의 높이 치솟은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神像), 공중정원, 태양의 거상과 수많은 노동력으로 지은 높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마우솔로스의 묘를 봤었다. 그러나 내가 구름 위에 치솟은 아르테미스의 집을 보았을 때, 그들 다른 불가사의들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보라, 올림푸스를 빼면, 어떤 장대한 것에도 태양이 비추지 아니하였구나””
게다가 1세기 말 이 거대한 신전에는 2000명 이상의 여사제들이 있었고 이들은 성전 창기들이었으니 아르테미스 숭배는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압력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의 외적 압력은 이것 뿐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는 황제 숭배에서도 자부심을 가질만한 도시였기에, 에베소에서 장사를 하고 살아가려면, 아르테미스 숭배와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는 일이 요구되었습니다. 여기서 6절에 언급되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말씀에서도 등장합니다. 2:14-15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니골라 당의 가르침은 적당히 타협하여 아르테미스 숭배와 황제 숭배를 허용하는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훈이 발람의 교훈과 연결지어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알 숭배를 하게 했고 제사의식으로서의 음행을 하게 하였으며 그 제물을 먹게 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과 행위를 예리하게 분별하고 판단하여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모든 내적, 외적 압력들 속에서 참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뎠으며, 게을러지지도, 피곤하여 약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이 본문에서의 강조는, 그들의 행위, 수고, 인내가 아니라, 주님이 그것들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은 교회의 모든 것,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우리 벧샬롬교회에도 동일합니다.


3. 지치지 않는 수고
주님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그 의미가 드러나도록 풀어서 말하면, ‘너희가 믿음의 삶을 사느라 감당해야 하는 짐을 내려놓지 않은 모든 일, 너희가 지치고 피곤하도록 애쓰고 수고하는 것, 그리고 지치고 낙심해서 내려놓고 포기하여 게을러질 수도 있으련만 지금까지 인내로써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내가 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곰곰이 우리 자신의 지난 삶에 비추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과연 그만한 수고를 한 적이 있는지요? 탈진할 만큼 주님을 섬겨본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대다수는 직장에서, 일터에서 우리의 일을 감당하느라 지쳐도, 몸이 아파도, 그만 두고 싶어도 여전히 그 일을 감당하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렇게 하셨을 것이고,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직장이나 일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거나 주님 앞에서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삶에서도 돈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주님은 인정해 주십니다. 지금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그것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이상, 그것을 너머 주님을 섬긴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여러분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타협하지 않고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그 길을 고수한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예배와 주일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되, 피곤하고 지치기까지 감당하면서도 게을러지지 아니하고 약하여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을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단순히 여러분 중 어떤 분들 안에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죄책감이 아니라, 주님을 다시 사랑하는 마음이 여러분 안에 불일 듯 일어나게 하도록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목적은 단지 죄책감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제 말에 동의하실지도 궁금합니다. 많은 사람의 교회 생활을 관찰해보면,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거나 혹은 번영 신학 아래 있을 때, 더욱 탁월한 열심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참된 복음의 은혜와 자유 아래 있을 때,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할 때는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확실히 우리는 복음 아래 있으면서 율법 하에서 요구되는 것보다 못한 사랑을 주님께 드려서는 안됩니다…여러분은 남는 힘 가운데 조금을 예수님께 드리고서 충분히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주님께 찌꺼기와 치즈 부스러기, 감자 껍질이나 안겨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받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드려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동기가 될 때, 사람들은 더 많은 헌금을 드립니다. 또 율법 아래서 벌을 받는다고 하면 벌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서 열심히 수고합니다. 그런 상황 아래서는 지치도록 피곤하도록 교회를 섬기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은혜와 자유 아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은 그것만 못한 경향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러니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목숨이라도 드릴 수 있어야 하건만, 일반적으로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그만큼 덜 사랑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적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열심히 더 탁월한 봉사와 헌신을 드리자는 것이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자신이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비천한 인간으로 오셔서 목숨을 버리신 사랑인데, 그 무한한 사랑을 받은 저는 여전히 둔감하고 배은망덕하여 마땅히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지 못하였나이다.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에베소 교회는 수고와 인내를 감당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주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이런 수고와 인내를 드러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한 책망을 듣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그런 수고와 인내 조차 주 앞에 드린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은 물론이고, 그 행위, 그 수고, 그 인내도 버린 것이 아닙니까? 아, 정말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얼마나 더욱 회개함으로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4. 경고 그리고 상급 약속(5,7)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다른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에서처럼, 경고와 상급에 대한 약속으로 마칩니다. 먼저 경고가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은 먼저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생각하라. 회개하라. 그리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생각하라는 것은 ‘기억하라, 되새기라,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내 신앙에, 주님께 대한 내 사랑에 문제가 생겼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회개하십시오. 회개는 기도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회개는 뉘우치고 고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오해하여 듣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 문제 없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지금 잘못 듣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이 아니라, 교회를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경고는 사실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1)라고 한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이런 유사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기 보다, 언제라도 주님은 성령 안에서 교회에 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셔서 교회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로부터 촛대를 옮기신다면, 교회는 그전에도 그러했겠지만 더 이상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여기 주님이 말씀하신 에베소 교회가 그랬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졌고, 디모데와 사도 요한이 목회를 했던 이 교회는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결국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셨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말입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에는 경고 외에도, 상급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주님께서도 종종 말씀하신 것처럼, 본문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은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기에, 주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영광이고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 할 아무 이유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는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님의 말씀은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교회에게, 신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상급에 대한 약속은 ‘이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모든 압력과 유혹에 맞서 믿음으로 살고 섬기며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자리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임재를 함께 누리게 될 것에 대한 종말론적 약속입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도록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제 이기는 자에게는 그 임재의 회복이 약속됩니다. 이 약속은 실제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한다는 의미보다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체험하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Beale). 그렇다면, 솔직하게 자문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상급에 대한 주님의 이 종말론적 약속은 과연 의미가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는 “참고 견디고 지치지 않는 수고를 한 것에 대한 상급이 고작 그것입니까?”라고 묻고 싶은 분은 안 계십니까? “별로 그 상급은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진 않으십니까?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누릴 것이라는 주님의 이 약속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약속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하여 부부를 이루고 가정을 세워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당연 하듯이, 사랑하는 주님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충분히 그 연합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며 살았는데, 이제 약속하신대로 이기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언제나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그리고 가슴 설레는 축복입니까? 에베소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 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써 식어버린 가슴으로 주님을 대하면서, 그 가슴이 다시 한 번 주님을 향한 사람으로 불타오르기를 바라는 성도들에게 이 약속은 얼마나 가슴 뛰는 약속이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정직하게 이 약속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5. 두려움과 겸비함으로!
우리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주님은 칭찬도 하셨지만, 무서운 책망과 경고도 상급에 대한 약속과 함께 주셨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들 처럼 칭찬만 들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의 말씀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두려움과 겸비함이어야 마땅합니다. 설령,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라 할지라도 그러합니다. 종종 저는 교회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는 공동체입니다.” 혹은 “우리 교회의 예배는 놀랍습니다.” 이렇게 교회들은 세상적 방식으로 과대 광고와 자랑을 하곤 합니다. 교회에 대한 이런 자부심들은 주님의 말씀 앞에서, 특별히 주님의 책망 앞에서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교회와 성도는 주님의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겸비함으로 가지고 주의 말씀대로 주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오직 주를 위하여 지치고 피곤하도록 수고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게으르지 않고 인내함으로 그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처음 사랑을 잃지 마십시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여러분의 수고와 인내의 동기가 되게 하십시오. 그렇게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가시는 거룩한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한 지치지 않는 수고로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