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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8B). 역사에서 배우는 은혜

시편 78:40-72, 로마서 8:32, 고린도전서 15:1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4-21

말씀내용
우리는 78편의 전반부인 1-39절의 말씀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남은 후반부인 40-72절의 본문을 살피려고 합니다. 78편의 전체 주제는 [역사에서 배우는 은혜]입니다. 그 의미는 “신자가 역사를 회고할 때 무엇을 보는가, 그것은 은혜,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지난 인생 여정을 돌아볼 때, 또는 여러분의 가정이나 신앙공동체가 걸어온 역사를 회고할 때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니까? 역사에서 은혜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 신앙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역사에서 은혜를 배우지 못할 때, 우리가 말하고 배우는 은혜는 사실상 이론이고 허상에 불과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적으로 알고 고백한다는 것은, 역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고 배웠다는 의미입니다. 이점을 유의하여 시편 78편을 상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78편에는 두 가지 핵심 주제가 반복됩니다. 첫째는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듭된 불성실입니다(8-11, 17-20, 30-33, 36-37, 40-42, 56-64, 67). 두번째 주제는 일관되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12-16, 23-28, 38-39, 52-55, 65-66, 68-72). 결국 우리가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이기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이기는가? 이 질문은 동일하게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도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시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합니다. 오늘 말씀을 상고하는 가운데 여러분은 그 대답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9-31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건이 어떻게 백성의 반복되는 배역함과 대조가 되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회개했지만 그 회개는 고통을 면해보려는 거짓된 회개요, 아첨에 불과했습니다(32-39). 이쯤 되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고, 더 이상의 자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봅시다.


1. 반복 그리고 망각 (40-42; 민 14:22; 시 78:7,11)
40-41절은 이스라엘의 죄와 어리석음, 반역의 역사가 얼마나 반복적으로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시편 78:40–41).”
‘몇 번’ 그리고 ‘거듭 거듭’이라는 말과 함께, ‘돌이켜’라는 말은 모두 이스라엘의 반역이 반복적으로 일어났음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반역과 죄악은 ‘반항’과 ‘시험하는’ 일로 나타났고, 그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고 노엽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민수기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백성을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민수기 14:22).” 여기서 ‘열 번’이라는 말은 셀 수 없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죄와 어리석음과 반역의 근원에는 망각이 있었습니다. 42절입니다.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시편 78:42).”
우리는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않는 것’이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보았습니다(7). 그러나 이스라엘은 슬프게도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습니다(11).” 그들은 가끔 잊어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42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대적에게서 구원하여 주신 날도 잊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역사 속에서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상기시켜 주려고 합니다. 놀라운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날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너무나 빨리 잊어버렸다는 점이고, 또 알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옮기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옮겨지지 않는 신학 지식은 백해무익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속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백해(百害)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익(無益)합니다. 이 시편의 핵심 메시지와 교훈은 그래서 ‘기억하라’는 것이고, 자녀들의 세대가 기억하도록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치 자녀에게 하듯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꼼꼼히 말하기 시작합니다.


2. 거대한 망각 (43-51; 롬 8:32)
43-51절은 다시 출애굽 당시의 장면들을 상기시킵니다. 말하자면,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롭고 기이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 하나 열거함으로써, 너희는 부끄러워하라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또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라고 가르치는 느낌도 줍니다. 12절에서 애굽의 도시 소안을 언급했었는데, 43절에서도 소안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재앙들을 말합니다. 44-51절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10개의 재앙 가운데 6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44절에서는 나일 강과 하수가 피로 변한 재앙을, 45절에서는 파리 떼와 개구리 떼의 재앙을, 46절에서는 메뚜기 떼의 재앙을, 47-48절에서는 우박 재앙을, 그리고 49-51절에서는 장자들의 죽음의 재앙을 말합니다. 이 모든 재앙들은 사실상 애굽 사람들의 신들과 그들이 믿는 바 생명의 근원을 심판하신 재앙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들의 신들이 거짓 신들임을 보이시고, 하나님만이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이라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만한 기이한 역사였으나, 이스라엘은 이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시인은 고발합니다.
마빈 테이트(Marvin Tate)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여준 행동은 거대한 망각으로 특징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잊어버린 것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거대한 망각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는데서 우리의 범죄와 어리석음과 반역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구원 역사들을 잊어버렸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을 배우게 되고 그 신뢰함이 깊어지는 법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복음을 기억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는 깊어져 감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그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신 하나님의 일을 말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언제나 거대한 망각입니다.


3. 심판의 결과, 구원 (52-54)
애굽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은 49-50절에서 맹렬한 노여움, 진노, 분노와 고난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맹렬함과 파괴적 성격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애굽을 향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심판은 이스라엘에게는 자비로운 구원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52-54절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합니다.
52절에서 앞의 무서운 심판의 분위기는 놀랍도록 평화로운 분위기로 전환됩니다.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시편 78:52).” 시인이 이제 말하려는 것은, 애굽에 나타난 무서운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구원을 말함으로써, 그 은혜를 잊어버린 백성을 책망하려는 것입니다. 53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던 애굽의 바로와 그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안전하게 홍해를 건넌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4절에서는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셨다고 말합니다. ‘성소의 영역’은 곧 거룩한 땅,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임재하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키고, ‘산으로 인도하시고’라는 말에서도 산이 많은 가나안 지형의 특징을 통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한 것을 봅니다. 큰 성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었고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그 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4. 약속의 땅에서 일어난 일들 (54-64; 삼상 4; 2:29; 3:13)
54-58절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행한 일들을 기록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살던 나라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여 살게 하셨습니다(55). 그러나 이스라엘의 반응은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고 그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며(56)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고 속이는 활과 같이 빗나는 행동들을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조상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57). 패역한 이스라엘은 언약을 따라 바르게 살지 않았고, 광야 시절에 비하여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사사 시대의 역사와 사무엘이 성장하기까지의 역사(사무엘상 앞부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노여움과 진노와(58) 하나님의 미움을 일으켰습니다(59).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60-64절은 하나님의 성막이 실로에 있던 사무엘상 4장의 내용에 기초합니다. 61절에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전쟁 중에 패하여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것을 언급합니다. 64절에서 ‘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라는 말은 대제사장 엘리의 부패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 일을 가리키고(그들의 아버지 대제사장 엘리도 그날에 죽었습니다),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라는 말은 남편이 죽고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비느하스의 아내가 해산을 하고 죽어가면서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는 듯 합니다.
63절에서 그들의 청년이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은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대거 죽임을 당함으로써, 결혼한 신랑감을 찾을 수 없게 된 처녀들이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의 이면에는 78편의 주요 메시지가 암시됩니다. 엘리 대제사장이 신앙적 자녀 양육에서 철저하게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자식들을 하나님 보다 더 중히 여긴 일로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인물입니다(삼상 2:29; 3:13).


5. 반전—하나님의 은혜 (65-66; 삼상 5-6)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참패를 하고, 언약궤는 빼앗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비참한 굴욕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돕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행하셨습니까? 그 답은 58-59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범죄에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65절은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은유로 반전을 보여줍니다.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시편 78:65–66).”
하나님을 잠에서 깨어난 술취한 용사로 묘사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은유가 아닙니까? 잠에서 깨어난 술 취한 용사라는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성과 폭력성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는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당신의 백성을 도와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잠에서 깨어 일어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무찌르고 언약궤를 빼앗고 성막이 있던 실로를 황폐하게 한 블레셋은 자기들이 이스라엘과 그들의 신을 이겼다고 기고만장하였지만 곧 자신들의 실패를 깨닫게 됩니다. 언약궤를 모셔둔 다곤 신전의 다곤 신상이 계속해서 넘어지고 엎드러져서 깨어지는 일을 블레셋 사람들은 경험하게 됩니다(삼상 5).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언약궤를 돌려받게 됩니다(삼상 6).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도 그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한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이 애굽에 행해졌고 이스라엘은 그냥 거기서 빠져나왔던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이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인생과 역사에서 반전을 일으키는 핵심입니다.


6.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 (67-72)
78편의 마지막 부분이 다루는 주제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북왕국을 대표하는 에브라임은 강했지만, 그리고 10지파로 구성된 북왕국은 큰 나라였지만 하나님은 요셉 즉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67).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택하셨고, 당신의 성전이 세워질 장소로 시온 산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일곱 아들을 외면하시고 막내인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의 선택은 기대할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의 우리에서 젖양을 지키던 다윗을 선택하사 그를 이끌어 내셔서(70-71), 당신의 백성 야곱, 즉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알다시피,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 장군을 모살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패역한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고, 패역한 그들을 대표하는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72절은 다윗이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양떼, 주의 백성을 길렀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온전한 인격으로 충성스럽게 섬겼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기 백성의 왕으로 택하신 것은 오직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고 택하신 것도 오직 은혜였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서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스라엘의 죄와 어리석음과 반역 밖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거기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 은혜가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7. 교훈과 적용 (렘 6:14; 고전 15:10; 딤전 1:12-17; 갈 6:14)
저는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의 죄가 이기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이기는가를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의 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죄를 이기고 승리합니다. 78편은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실패와 죄악을 낱낱이 열거하지만, 그 마지막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이라는 주제로 마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의 패역한 불순종을 이깁니다. 신자의 인생, 교회의 역사의 결론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그 언약에 성실하신 하나님입니다.
보통 우리는 죄와 어리석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부담스럽다고 느낍니다. 물론 시인에게도 그런 심정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시인에게는 이스라엘의 죄를 피상적으로나 적당히 다룰 생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했던 것처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예레미야 6:14).” 죄를 적당히 피상적으로 다루는 것은 언제나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들춰내면 낼수록, 이스라엘의 패역함만 보이는데 시인은 왜 그렇게 합니까? 그속에서 이스라엘의 죄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이긴다는 사실을 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시인은 이것을 동시대의 백성들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
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에도 자신의 죄악과 패역함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패역한 인생의 챕터 챕터 마다, 페이지 페이지 마다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도 보았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디모데전서 1:12–17).”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고 그 은혜가 죄를 이겼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그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고 나타납니다.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과 반항과 반역을 덮고 또 덮으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패역함과 모든 죄를 이기는 은혜의 능력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살아온 삶의 자취에서 무엇을 봅니까? 여러분 자신의 업적과 성취와 영광을 보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반항하며 하나님을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지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노엽게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그 아들에게 모든 진노를 대신하여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으로 얼룩진 우리 인생을 은혜로 연결하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바울 사도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하십니까(갈 6:14)?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그리고 지나온 역사에서 은혜를 배우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수 없이 반복된 저의 죄악과 어리석음과 반역을 이겼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