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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5). 바벨론에서 나오라

요한계시록 18:1-8, 누가복음 17:32, 고린도전서 7:29-3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3-07

말씀내용
우리는 다시 요한계시록으로 돌아왔습니다. 17장에서 음녀와 짐승의 악마적 동맹이 해체되고 짐승은 정치 군사적 힘으로 음녀가 가진 경제 체제를 황폐하게 만들고 멸망시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음녀는 17:18에서 말씀한 대로,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입니다. 그리고 18장은 이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보여줍니다. 즉 음녀와 바벨론은 같은 존재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던 당시, 바벨론이 가리키는 것은 로마 제국이었지만, 21세기인 지금도 큰 성 바벨론은 존재합니다. 큰 성 바벨론은 역사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악한 경제적, 종교적 세상 구조 전체를 가리킵니다. 1세기의 로마 제국이 그랬듯이 지금도 여전히, 퇴폐적 음행, 우상 숭배, 권력 남용, 허영과 사치 등 사람들을 유혹하고 망하게 하는 일들은 반복되고 재현되는 것입니다. 18장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결국 세상 끝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반역하는 이 악한 세상의 체제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18장을 상고할텐데, 오늘 본문은 1-3절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하고, 4-8절은 바벨론이 당할 재앙들을 피하도록 성도들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1. 바벨론 멸망 선언 (1-3; 10:1; 사 21:9; 계 19:21)
먼저 바벨론의 멸망이 선언되는 1-3절을 보지요. 1절에서 ‘이 일 후에’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요한이 보는 환상의 순서를 가리킵니다. 요한은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까지 보았던 천사들과는 좀 구별되는 듯 보입니다.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광채와 영광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거짓 악의 삼위일체와는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그리고 큰 권세를 가진 특별한 천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10:1에서 보았던 힘 센 천사도 “구름을 입고…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라고 했는데 이 천사와 흡사한 면이 있어 보입니다.
2절에서 이 천사가 “힘찬 음성으로…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칩니다. 과거시제로 사용한 것은 예언자적 과거시제로, 미래에 성취될 것이 너무나 확실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므로 과거시제를 통해 그 확실성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에 고레스 왕이 출현하고 그에 의해서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예언한 적이 있는데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흡사합니다. “보소서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시되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이사야 21:9).” 물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벨론은 역사상 신 바벨로니아 제국으로 당시 온 세상을 호령하던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바벨론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반대하는 존재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로버트 마운스의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독자들이 하나님이 첫 바벨론에게 행하신 일을 알고 있으며 로마에게 그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도시를 다시 한 번 심판하실 것이라는 점을 빨리 알아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위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나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일차 독자들인 1세기 말의 성도들은 영광으로 온 땅을 밝힐만한, 큰 권세를 가진 천사가 ‘힘찬 음성으로’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한 것을 읽을 때, 큰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는 계속해서 멸망한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외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1)귀신의 처소, 2)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3)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삼중 표현을 보게 되는데, 본문에는 이런 삼중 표현의 형식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새의 이미지는 요한계시록 19:21이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고 하듯이 시체들의 고기를 뜯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바벨론은 이렇게 더럽고 부패한 곳이 될텐데, 사실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은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언제나 이렇게 귀신과 더러운 영들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사회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미국의 한 통계가 있습니다. 1962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공립학교에서 기도와 성경 교육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했고 결국 1965년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의 기도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아침 조회시간에 전 교사와 학생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우리의 부모와 선생님과 국가에 하나님의 복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다양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고려할 문제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후 미국의 윤리적 쇠퇴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습니다. 1962-2003년의 통계입니다. 미혼모 출산은 500% 증가했고, 아동학대는 2,300% 증가했으며, 이혼율은 350% 증가했고 청소년 불법마약복용은 6,000% 증가했습니다. 또 청소년 자살률이 450% 증가했고 생존가능한 태아의 25%가 임산부의 요구로 모태에서 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하나님을 거부하게 될 때, 그 자리에 더러운 영들이 모인다는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두렵고 불안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법칙과 질서마저 무너뜨리는 성적 지향성에 따른 다양한 성의 인정이라든지, 결혼의 정의의 붕괴, 아동 학대, 자살과 이혼, 청소년층의 도덕적 탈선, 다양한 성폭력 등은 사회가 기존의 자연적, 도덕적 가치를 버리게 될 때,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구약 율법이 제시하는 안전하고 편안한 사회상과는 정반대의 사회상인 것입니다.
3절에서 천사는 바벨론 멸망의 이유를 삼중표현으로 밝힙니다. “1)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2)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3)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8:3).” 첫째 이유는 만국이 바벨론의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음행은 문자적 음행을 의미하기 보다, 경제적 안전을 대가로 바벨론이 제공하는 종교적이고 우상숭배적인 요구를 받아들인 것을 가리킵니다.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아 매매를 하고 짐승을 숭배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계 13:16-17). 두번째 멸망의 이유는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역시 많은 지도자들이 바벨론의 영향 아래서 음행과 우상숭배에 참여하게 된 것을 지적합니다. 끝으로, 땅의 상인들이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한 것입니다. 바벨론이라는 거대 경제체제 속에서 심각한 과시 풍조와 허영에 따라서 지나친 사치를 누며 부를 축적한 것입니다. 못 먹고 죽어가는 자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이유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신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는 4-8절에서 성도들을 향한 권면을 듣습니다.


2. 성도들에게 주는 권면 (4-8; 창 11:4; 약 5:3-5; 사 47:7-8)
요한은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또 다른 천사가 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천사가 말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 말씀은 성도들이 바벨론, 즉 이 세상의 죄에 참여하지 않고 그가 받을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바벨론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합니다. 5절입니다.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요한계시록 18:5).” ‘사무쳤으며’라는 말은 ‘합치다, 연합하다, 붙이다, 밀착시키다’라는 뜻인데, 의도적으로 바벨탑을 쌓아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겠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도발했던 일을 상기시키려는 표현입니다(창 11:4). 그 심판은 소위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을 기준으로 행해지게 될 것을 6-8절이 보여줍니다. 먼저 6절입니다. “1)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2)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3)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요한계시록 18:6).” 천사는 거룩한 보응을 수행할 또 다른 천상의 존재에게 명령을 하는데 여기서도 삼중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원리는 정의로운 보응이 바벨론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그들의 잔인함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습니다. 이것이 소위 동해복수법입니다. 그런데 ‘갑절’이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메레디스 클라인은 ‘갑절’이라는 표현에 상응하는 히브리어는 ‘복사하다, 반복하다, 짝을 맞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반절은 “그의 행위에 상응하게 주라. 그가 섞은 잔에도 그에 상응하는 것을 섞으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심판의 정의로움을 설명합니다.
7절은 바벨론 심판의 이유를 다시 밝힙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1)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2)과부가 아니라 3)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요한계시록 18:7).” 바벨론이 스스로 하는 교만한 말, “1)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2)과부가 아니라 3)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 삼중 표현이고, 동해복수의 원리도 동일하게 강조됩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만큼’ 돌려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였고 사치하였던 그대로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아무리 헐벗고 굶주리고 죽어가는 사람이 많든지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삶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태도를 크게 여기십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야고보서 5:5).” 이 말씀 앞에 3-4절도 봅시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야고보서 5:3–4).” 재물을 쌓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재물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정신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스스로 하는 말은 교만한 자기 확신을 잘 보여줍니다. 실제로 로마 제국의 군대는 항상 승리하고 있었고 로마의 거리에는 슬픔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고대 바벨론 제국에 대하여 말씀한 것과 동일합니다.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이사야 47:7–8).”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런 제국과 사람을 그만큼 심판하셨습니다.
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1)사망과 2)애통함과 3)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요한계시록 18:8).”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도 삼중 표현입니다. 뒤에서 더 보겠지만, 이 심판은 갑자기 임하는 심판이고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동안에’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 임할 것입니다. 불에 살라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들이 당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던 그 모든 재앙을 ‘하루 동안에’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천사는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고 선언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이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강대함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강한 자는 로마 제국이나 그 황제가 아닙니다.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이 강하신 자이십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은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않기 위해서 거기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3. 성도는 어떻게 바벨론에서 나올 수 있는가 (4; 렘 29:4-7; 벧전 2:11-17)
성도는 어떻게 바벨론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세상과 세상의 문화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대중문화를 얼마나 즐길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모짜르트를 들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불경건했던 모짜르트는 말고, 경건한 바흐의 음악을 들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세상 문화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가지는 차이는 없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주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니부어는 1951년에 기념비적인 책을 썼는데, 그것은『그리스도와 문화』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로 정리했는데 그중 하나가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이 말씀하는 것처럼, 세상 문화에 대한 부정적 관점이 강한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를 대하는 유일한 성경적 관점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천사의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 세계를 향한 말이 아니라, 죄악된 세속 문화를 향한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우상숭배의 상징인 바벨론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감각 중심의 성도착적 체제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반성경적, 반기독교적 세상 문화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죄에 참여하지 않도록 여기서 나와야 합니다. 이런 입장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 것은 중세의 수도원 운동입니다. 또는 현대 기술문명을 거부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애미쉬 공동체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행해진 또 다른 유형의 잘못은 특정한 행동들을 금지하는 근본주의적 접근 태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화관에 가지 않고 세상 가요를 부르지 않고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외적 행동으로 바벨론에서 물러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습이나 행동을 금해도, 문제는 마음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본문 4절의 말씀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가령,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멸망기에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바벨론에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예레미야 29:4–7).”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은 바벨론의 이교도들을 변화시키거나 구속하라는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서 선하고 충실한 시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릴 의무를 행할 때 문제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평상시에 왕을 잘 섬기라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베드로전서 2:11–17).”
그러나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세상의 문화를 기독교화하여 세상이 점점 하나님의 나라를 반영하도록 변혁시켜야 한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리처드 니부어가 문화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라고 말한 유형입니다. 모든 입장이 다 성경에서 취할 수 있는 입장들이라면, 우리는 세상 문화와의 관계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합니까?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육체적으로 떠날 수 없고,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술과 도박이 가득했던 시절,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술과 도박을 금하게 함으로써 이 문화는 오래도록 유지되어 왔지만, 외적 행위가 마음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를 간파해야 하고, 이 세상 문화의 죄악된 태도와 정신과 관습을 행하라는 모든 압력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주요한 이유는 그들이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허영과 사치를 촉진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4.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몇 가지 지침들 (고전 7:29-31; 눅 17:32)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도움이 될 지침을 몇 가지 제시해보겠습니다. 첫째로, 바벨론에서 영적으로 철수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철수한다는 말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목적을 두고 세상에 영혼을 쏟아 붓고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이 이 태도를 가르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린도전서 7:29–31).”
주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누가복음 17:32)”고 경고하셨습니다. 롯의 처는 몸으로는 소돔을 떠나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소돔에 영혼을 빼앗기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으로부터 영적으로 분리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두번째 조건을 우리에게 요구하는데, 그것은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성경의 어떤 구절들을 많이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란 성경의 가르침의 렌즈를 통해서 세상과 세상 문화의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말합니다. 이 세계관의 훈련이 오늘 한국교회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세상의 정치와 경제 체제를 성경적 시각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문화 전반을 바라보는 시각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세상 문화의 각 요소들에 대해서 어떤 것을 금할 것인가, 또 비판적으로 참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성도의 영적 성숙도, 성경적 세계관이 든든하게 세워져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미국에는 영화 등급 기준에 PG-13이라는 게 있습니다. 비록 13살이라도 스스로 비판적으로 분별하여 볼 수 없으므로, 부모의 지도(Parental Guidance) 아래서 보라고 권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게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잘 무장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의 문화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같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을 보고 읽을 때, 그것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의 현실을 다 포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성경만을 이야기하고, 우리의 기도 생활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살이 모든 면을 말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통하여 세상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보는 태도를 배울 것입니다.
세번째는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주인이 아닌 사용자로서 살아가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인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우리는 임시 허락을 받은 사용자요, 청지기입니다. 이 관점을 유지할 때, 우리는 탐욕의 종이 되지 않고 물질을 사용할 수 있고, 사람 보다 물질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물질을 사람을 사랑하는 도구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다 죽어가도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 사치와 허영, 외모지상주의와 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믿음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삶을 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청지기임을 잊어버리고 주인이 되는 순간, 여러분이 소유한 것은 여러분의 주인이 되고 우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돈과 외모, 젊음과 쾌락, 권력과 직장 등 무엇이라도 말입니다. 이들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는 세상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합니다. 성경의 결정을 따라 성경 대로 바라보고 여기고 살아갈 때, 여러분은 우상을 여러분의 마음에서 제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거기서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칼빈을 인용함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의식한 칼빈은 ‘내세에 소망을 두고 살 것’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올바른 생각을 갖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의 육체가 눈먼 상태에서 어리석은 것들을 사모하며 아무리 방해한다 할지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주님이 강림하시기를 기다리자. 주께서 오시기를 그냥 사모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일을 모든 일 가운데 가장 고귀한 일로 여기고 한숨과 탄식으로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도록 되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 반드시 구속주로 강림하사 악과 비참이 가득한 이 깊고 깊은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의 생명과 영광의 복된 기업을 얻도록 인도하실 것이다.”(『기독교강요』3.9.5).
롯의 처와 같이 우리 영혼을 이 세상에 빼앗기지 맙시다. 그리고 주의 날을 간절히 기다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