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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1).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도다

요한계시록 16:1-11, 디모데전서 6:8-10, 17-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2-27

말씀내용
오늘 2020년 마지막 주일에 마지막 심판 시리즈인 일곱 대접 심판을 상고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고 생각됩니다. 16장은 일곱 심판 시리즈의 마지막인 일곱 대접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과 2021년도 첫 주일, 두 번에 걸쳐 이 내용을 상고할텐데, 오늘은 다섯째 대접 심판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5-7절이 중요한데,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선언하는 천사와 제단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곤 하는데, 여러분은 이 선언에 동참할 수 있는지 본문은 도전합니다. 이점을 깊이 유념하면서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1. 일곱 나팔 심판과의 대조 (1; 15:8; 사 66:6)
대접 심판은 나팔 심판과 유사하지만 차이점도 많습니다. 먼저 유사점은 넷-셋의 구조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네 심판이 같은 패턴을 가지고, 마지막 세 심판은 전체 시리즈를 강화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처음 네 심판이 땅—바다—강— 해(천체)에 순차적으로 임하는 순서가 유사합니다. 둘째로 일곱 대접 심판도 역시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재림까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대접 심판 시리즈는 인 심판이나 나팔 심판과 달리 최후의 심판과 연결된다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교회 시대에 일어나는 심판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첫째로, 나팔 심판은 여파가 1/3로 부분적이지만, 대접 심판은 전체적이고 최종적입니다. 둘째로 나팔 심판은 부분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를 주지만, 대접 심판은 경고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쏟아붓는 심판 자체가 목적입니다. 셋째로 나팔 심판의 네번째까지는 그 심판이 자연 자체에 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받지만, 대접 심판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직접 심판합니다. 넷째로 인과 나팔 심판에서는 여섯째 심판과 일곱째 심판 사이에 막간이 주어졌지만, 대접 심판에는 그런 막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연도 없이 일사천리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고 끝을 향해서 돌진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일곱 대접 심판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1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대접 심판은 성전에서 나오는 큰 음성으로 시작합니다. 음성이 하늘에서 나오든지, 성전에서 나오든지 하는 것은 대개 중요한 일의 시작을 알리는데, 여기서 성전에서 나온 큰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15:8에서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큰 음성이 대접 심판을 수행할 일곱 천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인간도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일곱 대접 심판을 시작하면서, 요한은 이점을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2. 첫째 대접 심판—악성 종기 (2; 출 9:8-12; 신 28:35; 계 9:5-6)
이제 첫째 대접 심판을 보겠습니다. 2절입니다.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요한계시록 16:2).”
이것은 출애굽 당시 애굽에 부어진 여섯째 재앙을 생각하게 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서 화덕의 재를 뿌리자 그것이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된 일입니다(출 9:8-12). 또 이런 악성 종기는 모세의 율법에서 율법을 범한 자에게 주어지는 벌과 저주의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생기게 하여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신명기 28:35).”
이것은 보편적으로 임하는 재앙이고, 고치지 못할 불치의 질병입니다. 대접을 쏟는다거나,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이 비유적 표현인 것처럼 악하고 독한 종기도 비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악성 종기는 다섯째 나팔 심판 때 주어진 것처럼 영적, 심리적 괴로움과 고통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계 9:5–6).”
고통이 없이는 걷지도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상태, 한시도 그 괴로움을 떨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말합니다. “불치의 악성 종기나 난치병으로 악한 자들을 지옥으로 보내신다. 헤롯을 생각해보라(행 12:23). 모든 세대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첫째 대접을 쏟는 일을 쉬지 않고 하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육신의 고초는 결코 진노의 대접이 아니다(롬 8:28참조). 재앙은 짐승의 표를 가진 자에게만 그 영향을 준다.”
헨드릭슨의 말처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심판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땅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고센 지방에 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재앙이 미치지 않고 애굽 전 지역의 애굽 사람들에게만 재앙이 임했던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3. 둘째 대접 심판—경제적 붕괴 (3; 출 7:9; 계 8:8-9)
3절은 둘째 대접 심판을 기록합니다.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요한계시록 16:3).”
이번에는 대상이 바다인데, 바다가 피로 변하고 바다의 모든 생물들이 죽습니다. 출애굽 당시, 첫번째 재앙인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을 연상시키는 심판입니다(출 7:19). 둘째 나팔 심판에서는 바다와 바다 생물 그리고 배들의 1/3에만 영향을 미쳤지만(계 8:8-9), 여기서는 바다 전체가 피로 변하고 모든 생물이 죽습니다.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편적으로 심판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그저 자연계 중 바다가 파괴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심판이 경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에 많은 학자가 동의합니다. 바다는 로마 제국의 삶의 근원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로마는 육지 무역에 많은 제약이 있었기에 음식을 위해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교역, 상업을 해상 교통로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바다가 피로 변했다는 것은 로마 문명의 파멸, 경제 체제의 붕괴를 의미했습니다. 이 해석은 18장을 볼 때 더 확연히 증명될 것입니다(18:15-17,19).
이것을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레드 오션(Red Ocean)과 블루 오션(Blue Ocean)이라는 경제 용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레드 오션이 성경의 이 본문에서 나온 말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마는, 그 개연성이 없지 않습니다. 레드 오션은 경쟁이 너무 심하여 피바다가 된 시장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서로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만 원하는 이윤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블루 오션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경쟁자가 별로 없는 무경쟁 시장, 즉 고기가 많이 잡힐 수 있는 넓고 푸른 바다를 말합니다. 이미 피바다가 된 레드 오션에 뛰어들기 보다 블루 오션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둘째 대접 심판은 레드 오션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을까요? 왜 인간의 행복의 추구는 결국 레드 오션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이것을 원한 게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본문이 말씀하는 세번째 대접 심판이 이것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4. 셋째 대접 심판—경제적 형벌 (4)
세번째 대접 심판은 4절입니다.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요한계시록 16:4).”
이것은 둘째 대접 심판과 유사합니다. 다만 대상이 바다에서 강과 물 근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애굽에 부어진 첫번째 재앙은 바다와 강과 운하 모두에 임한 재앙이었므로, 이 심판도 그 재앙과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본문 3절에서 피로 변하고 생물들이 죽었다고 말하는데, 문자적 죽음을 포함하는 모든 고통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세계 경제만이 아니라, 국가 경제나 가정 경제에도 고통스런 영향을 줄 것을 주어, 생존의 조건이 끊어지는 고통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그 일 때문에 생명을 잃을 정도로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시 5-7절을 건너뛰고 네번째 대접 심판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5. 넷째 대접 심판—해의 태움 (8-9; 8:12; 신 32:24)
8-9절입니다.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요한계시록 16:8–9).”
네번째 대접 심판은 애굽에 내린 재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심판인데, 해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넷째 나팔 심판과 연결됩니다. 다만 여기서는 해와 달과 별의 1/3이 타격을 받아 어두워지는 부분적 일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계 8:12), 사람들을 태워 죽일 정도의 극도의 태양 열기가 작열합니다. 사실 이 내용도 모세 율법을 범한 자들에 대한 저주의 목록에 나옵니다(신명기 32:24). 이 대접 심판에서 해는 사람들을 불로 태울 권세를 받습니다. 누가 그 권세를 주십니까?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은 해의 뜨거운 기운데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계 7:16; 시 121:5-6). 이 심판은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만 미치게 됩니다. ‘비방한다(βλασφημέω)’는 말은 우상숭배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중상하고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blasphemy 가 이 단어에서 파생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할 뿐 아니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고의로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뜯어 고치고 왜곡하고 거부하는 오늘날 세상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는 듯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다섯째 심판에서도 보겠지만, 멸망할 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6. 다섯째 대접 심판—어둠 (10-11; 출 10:21-23; 계 2:13; 6:16-17)
다섯째 대접 심판은 짐승의 왕좌를 향해 쏟아지는데, 그 나라에 어둠을 가져옵니다. 10-11절입니다.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요한계시록 16:10–11).”
어둠이 임한 것은 애굽에 내린 아홉째 재앙을 연상하게 합니다(출 10:21-23). 이 심판의 특징은 짐승의 왕좌에 대접을 쏟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짐승이 자신의 영역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주권을 가리킵니다. 2:13에서는 ‘사탄의 권좌’라고 한 말씀이 있었는데 사탄의 통제 하에 있는 로마 정부와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된 버가모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짐승의 왕좌와 같은 말입니다. 이 짐승의 왕좌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그러자 짐승이 주권을 행사하는 그 나라에 어둠이 임합니다. 어둠의 결과는 사람들이 자기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할만큼의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짐승을 따르는 모든 자들은 자기들이 영적인 어둠 속에 있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며, 영원한 어둠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고 고통과 공포를 느끼게 될텐데, 본문은 이것을 보여줍니다. 이미 6:16-17에서 우리는 이 고통과 공포를 잘 보았습니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요한계시록 6:16–17).”
하지만 그들은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애굽의 바로가 거듭되는 재앙 속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마음을 완악하게 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쓴 맛을 볼 때 사람이 회개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16장에서 회개가 없는 것은 바로의 완악함의 신학적 패턴에 따르면 ‘고칠 수 없는 병’이다”라고 말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불치의 병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고생하고 곤고하다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죄인을 회개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를 받고 하나님을 거절한 완고한 우상숭배자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습니다.


7.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도다 (5-7; 6:9; 8:3-5; 15:3)
이제 우리는 5-7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이 심판이 의롭고 참되다는 선언을 듣습니다. 먼저 5-6절에서 물을 차지한 천사가 말합니다. 물을 차지했다는 것은 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6:5–6).”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라는 호칭은 앞에서 몇 차례 등장한 하나님에 대한 삼중 호칭의 변형된 형태입니다. ‘장차 오실 이’가 ‘거룩하신 이’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라는 마지막 때가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시작되었고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심판을 초래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는 천사의 선언은, 셋째 대접 심판이 하나님의 이름을 정당화하는 심판이며, 짐승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정죄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물을 피로 만드신 하나님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 ‘왜냐하면’이라는 원인 접속사로 시작하는 6절에서 보게 되는데, 한글개역개정역에서는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6절을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한 이유입니다. 그들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자들입니다. 여기서 ‘흘렸다’는 말은 사실, 16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동사인 (대접을) ‘쏟는다’와 같은 동사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쏟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진노의 대접을 쏟아 피를 마시게 하고 고통을 겪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7절에서는 제단의 선포가 이어집니다.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계 16:7).”
제단이 말한다는 것은, 6:9에서 순교자들이 자기들의 핏값을 갚아달라고 한 기도와 8:3-5에 언급된 모든 성도의 기도를 다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핏값을 갚아달라고 한 순교자들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열심히 기도한 성도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만국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성품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따라서 그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 제단의 선언은 사실 15:3에서 본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의 메아리입니다.


8. 교훈과 적용
A. 당신은 돈과 물질에 매인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딤전 6:8-10, 17-19)
우리는 본문에서 적어도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오늘 살펴본 다섯 대접 심판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경제적 구조를 붕괴시키시고, 경제를 통해서 고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자들에게 부어지는 심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성도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나치게 세상의 경제 제도와 가치관에 의존하고 살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치는 돈과 물질적 성공에 의해서 얼마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잘 산다는 것을 얼마나 돈과 물질에 연결시켜서 생각을 하십니까? 과연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까?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가치를 지배하는지 깊이 그리고 자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8)”고 한 말씀대로, 여러분은 생각하고 살아가십니까? 성경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디모데전서 6:9).”고 말씀하는데, 여러분은 부하려는 마음에 지배를 받고 살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10).”라고 가르치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19).”라고 하신대로,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정말 중요한 가치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우상숭배자들의 우상을 다 무너뜨릴 것입니다.
B. 당신은 회개하는가?
둘째, 여러분은 회개하는 사람입니까? 인생의 곤고함과 어려움이 몰아칠 때, 여러분은 회개하십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이 회개를 자동적으로 가져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혀를 깨물고 죽을지언정 인간은 회개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 짐승의 표를 받은 우상숭배자들입니다. 도리어 고통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은 증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회개를 낳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으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고통을 하나님의 변장한 은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 은혜를 맛보았습니까? 여러분은 회개라는 주제를 들을 때, 마음이 괴롭고 답답하기만 하십니까, 아니면 회개의 달콤함과 기쁨과 감격을 생각하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이고, 오늘 본문은 그런 사람들의 비참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는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개를 통해 회복되는 순간에 비할 수 있는 기쁨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 회개를 아십니까? 맛보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입니까? 정말 진지하게 묻습니다. 2020년의 마지막 주일에 마치 여러분이 인생에서 듣게 될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그리고 제가 인생에서 하는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는 사람입니까? 지금이 회개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회개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이 그때입니다.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이 그날입니다. 오늘 회개하십시오. 지금 회개의 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할 때,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겠지만,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날마다 회개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천사와 제단처럼 말할 것입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도다.”라고 말입니다. 이 복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