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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0).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릴 때

요한계시록 15:1-8, 로마서 3:25, 히브리서 4: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2-20

말씀내용
진정한 심판의 두려움은 지하 세계가 열리고 거기서 용이나 짐승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땅이나 지하 세계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리는 이야기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무언가 멋진 장면이 연출될 것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순간입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있든지 죽었든지 언젠가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랬겠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만큼, 심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무시되거나 축소되거나 고의적으로 외면당하는 시대도 없었을 것입니다.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을 피할 수 없도록 쉬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5절은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는’ 환상을 요한이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두려움을 줍니까, 기쁨을 줍니까? 물론, 여러분이 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여러분의 영적 주소가 어디인가에 따라서 그 대답은 다를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고 또한 우리 자신의 영적 주소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5장은 이미 언급한대로, 세 심판 시리즈의 마지막인 일곱 대접 심판의 서곡입니다. 1절은 일곱 대접 심판이 이제 시작한다는 선언이고 5-8절에서는 심판의 대행자들인 일곱 천사들이 하늘 성전에서 나옴으로써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보여줍니다. 다만, 2-4절에서 모든 심판이 마치고 난 뒤에 하늘의 승리한 성도들이 기뻐 찬송할 내용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그 심판의 두려운 날이 구원의 날, 기쁨의 날, 찬송의 날이 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할 것입니다.


1. 하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다 (4:1; 11:19; 1:13; 출 24:15-16; 40:34-35; 사 6:4; 왕상 8:10-11)
5절에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라는 말은 새로운 환상을 가리킵니다.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는 환상입니다. 요한은 이미 하늘과 하늘의 성전이 열리는 환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4:1에서는 하늘에 열린 문을 보고 올라가는 일이 있었고 11:19에서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언약궤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라는 특이한 표현을 합니다. 왜 요한은 그냥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증거 장막의 성전’이라고 했을까요? 일단, 이 말은 ‘증거의 장막인 성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막(성막)과 성전은 같은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세워진 성막은 ‘증거의 장막(증거막 또는 증거의 성막)’이라고 불렸습니다(출 38:21; 민 1:50,53; 9:15; 10:11; 17:7,8; 18:2; 행 7:44). 여기서 증거란 율법의 중심인 십계명 돌판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지성소의 언약궤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언약궤를 증거궤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의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고대 근동 문화에서 언약을 깨뜨린 결과는 오직 죽음이었습니다.
사실, 본문에서 ‘증거’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복합적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출애굽 당시와 광야생활로 독자들을 데리고 가려는 것입니다. 이제 소개할 일곱 대접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앙, 모세의 노래 등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곤경을 이기고 승리할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성막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냈고, 아무리 고단하고 힘든 여정일지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할 수 있는 민족이나 나라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은 언제나 이기는 자였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15:2-4의 본문도 승리자로서의 성도들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세번째로는, 언약을 상기시키는 십계명 두 돌판을 지시하는 증거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언약의 결과가 이제 심판과 구원의 사건을 통해 나타날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는 출애굽 당시 성막과 제사장들을 상기시키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6절은 성전에서 나오는 일곱 천사를 묘사하는데,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입던 옷을 연상하게 하는데, 특별히 금띠는 왕권과 높은 지위를 상징합니다. 또 ‘가슴에 금 띠를 띠고’라는 묘사는 1장 13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이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사자들—대행자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8절은 하나님 보좌 옆의 네 생물 중 하나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담은 금 대접 일곱을 일곱 천사들에게 주었을 때, 하늘 성전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줍니다.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서 일곱 천사는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즉 그들의 일을 다 수행하기까지 성전에 능히 들어갈 수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도 출애굽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먼저는 모세가 하나님의 뵈러 시내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 산에 임한 현상입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출애굽기 24:15–16).” 또 하나는, 성막이 완성되어 성막을 봉헌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애굽기 40:34–35).”
물론 출애굽 맥락의 밖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을 때,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는 기록이 있고(사 6:4b), 솔로몬의 성전 낙성식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열왕기상 8:10–11).”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은 구름이나 연기로 형상화되어 나타났습니다. 그 구름을 ‘쉐키나’라고 부릅니다.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영광, 광채를 가리키는 히브리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어떤 특정한 가시적 현상으로써 당신의 임재를 자기 백성에게 혹은 부름받은 종들에게 보이신 경우가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쉐키나 구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연기라고 썼는데, 이것은 짙은 안개, 그러니까 구름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함 때문에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마치기까지는 감히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언급은 성막 봉헌식에서의 모세나, 성전 봉헌식에서 제사장들이 경험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범죄하지 않은 천상의 천사들 조차 들어갈 수 없을만큼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함과 그 진노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라는 말은 사실 이렇게 무서운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어떤 여과도 없이 세상을 향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는 그 언약궤가 열리고 이제 죄인을 막아줄 어떤 장치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일어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담은 금 대접 (7; 5:8; 6:10)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자, 거기로부터 첫째로는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왔고, 둘째로는 네 생물 중 하나가 일곱 천사들에게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심판의 준비가 다 이루어진 것이고, 일곱 천사는 “말씀하옵소서. 우리는 준비되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네 생물 중 하나가 일곱 천사들에게 건네준 일곱 금 대접입니다. 일곱 금 대접에는 각각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담겨 있었습니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보좌 지근거리에서 그 거룩하심을 지키는 천사들입니다. 일곱 인의 심판이 시작되는 6:1에서 보았듯이, 네 생물은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 형벌인 심판을 시작하게 하는 역할도 감당합니다.
네 생물 중 하나가 전해준 바,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은 5장 8절에서 우리가 본 금 대접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아마 금 대접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향로 같이 제단의 떡상에 두고 하나님께 봉헌할 때 사용하던 금 접시를 가리킬 것입니다(출 25:29; 27:3; 38:3). 이 대접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 부어질텐데, 5장 8절은 그 심판이 성도의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기도는 6장 10절에서 보았던 것처럼,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요한계시록 6:10).”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금 대접에 가득 담긴 진노는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진노도 무섭다면,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은 그 결과가 얼마나 영원하고 무서운 것이겠습니까? 게다가 그 진노가 가득히 담긴 금 대접 일곱 개가 일곱 천사들에게 전달이 된 것입니다. 이제 16장은 그 대접이 하나씩 쏟아부어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상세히 묘사합니다.


3. 속죄소—시은소(施恩所)—화목제물 (롬 3:25; 히 9:5; 출 33:20; 사 6:5; 레 16:2; 출 26:34; 37:8-9; 왕하 19:15; 시 99:1,5; 딤전 6:16; 마 27:51; 히 10:20; 4:16)
결국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고 증거의 돌판이 그대로 인간에게 드러나게 될 때, 죄인인 인간이 감당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 외에는 없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에게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2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 영광을 뵈었을 때, 보였던 반응도 알지 않습니까?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이사야 6:5).”
그래서 성막의 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져있어서 제사장들만이 자기 순서를 따라 직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들어갈 수 있었고, 증거궤가 있는 지성소는 또 하나의 휘장으로 가려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 제물의 피를 가지고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이 경고를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레위기 16:2).”
지금 이 말씀에서 속죄소는 무엇입니까? 속죄소는 증거궤를 덮고 있는 순금으로 만든 덮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만들 것을 지시하실 때,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6:34). 증거궤 안에 있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속죄소가 덮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속죄소와 한 덩이로, 서로 마주 보며 날개를 높게 펴서 속죄소를 덮고 있는 그룹 둘을 붙여서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출 37:8-9).
속죄소와 두 그룹 그리고 속죄소 아래 돌판이 담겨있는 증거궤는 사실 하늘 하나님의 궁정 보좌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실제로 증거궤는 하나님의 보좌요(렘 3:17), 발등상(시 99:5)으로 여겨졌습니다. 히스기야가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기도했을 때(왕하 19:15), 그는 바로 지성소를 보좌 삼아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시 99:1,5 참조). 천상에서 요한이 본 환상에서도 하나님의 보좌 옆으로 그룹이나 스랍들과 모양이 흡사한 네 생물이 보좌를 지키는 것이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증거궤의 보좌에서 증거의 두 돌판으로 대표되는 율법으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와 그 영광이 그대로 죄인들에게 드러난다면 그것은 곧 심판이며 죽음을 의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의 고백대로,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디모데전서 6:16).”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늘 성전이 열렸다는 표현이나(11:19; 15:5) 성전으로부터 나온다는 표현은(14:15,17; 15:6)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일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가 시작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증거궤가 하나님의 보좌로 여겨졌기에, 그 영광의 보좌는 죄인들에게 언제나 가려져 있어야 했습니다. 첫째는 증거의 돌판인 율법을 속죄소가 덮음으로써 가려야 했고, 그 속죄소는 1년 한 차례 대제사장에 의해서 송아지의 피가 뿌려짐으로써 속죄를 이루어야 했으며, 그 증거궤는 또 한 차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으로 가려져야 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사실상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이 휘장을 걷고 증거궤를 마주할 때조차, 금향단에서 진하게 올라오는 향연은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정확하게 증거궤와 그 위 속죄소와 그룹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가려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거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헤롯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높이 4m 가 넘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마 27:51).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20).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겨 죽으실 때 찢어진 성소 휘장은 곧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 더 있습니다. 증거궤는 휘장에 의해 그리고 속죄소에 의해 가려져 있고 덮여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기준인 율법을 상징하는 십계명 두 돌판은 언제나 속죄소에 의해 덮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소를 시은소(施恩所, mercy seat)라고 부릅니다.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속죄소에 피를 뿌림으로써 속죄가 일어나고 율법의 형벌과 저주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죄소—시은소가 언제나 율법의 돌판을 덮어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속죄소 덮개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언약궤의 속을 들여다 본 일로 70명이 급사를 한 사건입니다(삼상 6:19). 속죄소-시은소가 거두어질 때, 감당할 수 없이 두려운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 사건은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속죄소—시은소에 의해 덮여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궤를 가리고 있던 지성소의 휘장이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찢어진 것처럼, 사실 속죄소—시은소의 덮개도 주님의 죽으심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 휘장이 그리스도의 육체였다고 말씀한 것처럼, 성경은 이 속죄소도 주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속죄소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이 두 번 나옵니다. 히브리서 9:5과 로마서 3:25입니다. 먼저 히브리서 9:5은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히브리서 9:5).”고 했는데, 여기서 속죄소는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조금 다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로마서 3:25).”
여기서 ‘속죄소’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화목제물’이라고 번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는 것은, 속죄소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효력이 있는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더 이상 증거궤의 덮개로서의 속죄소가 필요하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그 결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의 영적 주소가 있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특권이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 주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영원한 속죄소--화목제물이 되어주심으로써, 증거궤를 덮고 있던 속죄소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들의 시은소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속죄로 말미암아 그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이 있는 자리에 담대히 나아가 은혜를 구할 수 있는 이 놀라운 특권을 휴 스토웰 목사(Hugh Stowell, 1799-1865)는 이렇게 찬송시로 썼습니다. 새찬송가 209장 [이 세상 풍파 심하고]입니다.
이 세상 풍파 심하고 또 환난 질고 많으나 / 나 편히 쉬게 될 곳은 주 예비하신 시은소
그 향기로운 기름을 주 내게 부어 주셔서 / 내 기쁨 더해 주는 곳 주 피로 사신 시은소
주 믿는 형제 자매들 그 몸은 떠나 있으나 / 주 앞에 기도 드릴 곳 다 함께 모일 시은소
내 손과 혀가 굳어도 내 몸의 피가 식어도 / 나 영영 잊지 못할 곳 은혜의 보좌 시은소 (아멘)
여러분에게는 이런 감격의 고백이 있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예비해주신 이 시은소는 여러분이 은혜를 받기 위해 늘 나아가는 자리인가 말입니다.


4. 두 개의 길 (3-4)
본문에서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다는 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가득한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실로 두렵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것이 모든 죄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또 어떤 이들에게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누리는 자리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읽어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독생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속죄소—화목제물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열린 증거 장막의 성전으로부터 인류가 경험하게 될 두개의 길이 있습니다. 두 개의 길 중 어느 길을 갈 것인지는 그가 평생에 교회를 다녔는가로 결정되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를 믿었는가로 결정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살았는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여러분은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십자가로 피하였는가, 그렇게 그리스도를 신뢰하였는가로 결정됩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여러분이 오늘 살아가는 동안에, 그 두려운 지성소의 하나님의 보좌가 여러분의 일생에 사모하고 사랑하고 기대고 엎드리는 시은소가 되는 것을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은소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날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는 날, 그 심판좌가 시은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주님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을 특별히 기념하는 성탄 주일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속죄소—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의 속죄소—화목제물이 되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릴 때,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가득한 대접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을 운명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좌가 시은소가 되는 은혜를 맛보고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그날에 그는 감격하고 감사하며 찬송할 것입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요한계시록 15:3–4).”라고 말입니다.
하늘의 영광 보좌를 떠나서 이 땅에 오사, 우리의 영원한 속죄소가 되사 우리를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신 분,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오늘도 그리고 평생에 의지하고 시은소로 피하고 시은소로 나아가십시오. 휴 스토웰 목사의 찬송시대로, 이 세상 풍파가 심하고 환난 질고가 많아도 내가 편히 쉴 곳은 시은소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뻐하십시오. 저도 오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손과 혀가 굳어도 내 몸의 피가 식어도 나 영영 잊지 못할 곳 은혜의 보좌 시은소”라고 말입니다.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는 것을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과 기쁨으로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마음을 담아 휴 스토웰이 쓴 찬송시로 찬송하고 고백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