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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죽음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7). 성도의 복된 죽음

요한계시록 14:12-13, 민수기 23:10, 히브리서 11: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1-29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본문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주제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한때 서구에서 그리스도인은 잘 죽는 법을 알고 있던 자로 알려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죽음을 끔찍하게 여기고 떠올리기조차 싫어하는 문화가 가득한 시대입니다. 이 현상을 독일의 신학자요 설교자인 헬무트 틸리케는 이렇게 풍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섣달 그믐날 큰 소리로 떠든다. 마치 우리의 무덤 위로 자라나는 풀의 섬뜩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사람들이 아무리 죽음을 잊어버리거나 의식적으로 떠올리려고 하지 않더라도 죽음이라는 현실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세상 문화가 교회 안으로까지 흘러 들어왔고, 그리스도인들 안에서조차 죽음과 그 너머의 영광,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기독교 본유의 소망이 사라지게 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오늘날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거의 식별할 수 없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인 것입니다. 사실 오늘을 살아가며 언젠가는 죽음을 맞을 것을 아는 성도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주제가 불쾌하거나 두려움을 유발하는 주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주시는 복된 약속과 풍성한 위로가 가득한 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죽기 위해 오늘이라는 주어진 시간을 믿음으로 살 수 있는 동기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어떻게 죽음이 복될 수 있을까? (13; 민 23:10; 롬 8:36-37; 계 14:11)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죽음이 과연 복될 수 있습니까? 복된 죽음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죽으면 그 죽음을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도의 복된 죽음’이라는 제목은 본문 13절에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 복된 죽음을 알았고 그것을 바랐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거짓 선지자의 전형인 발람입니다. 돈에 이끌려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이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민 23:10).”
그는 의인의 죽음이 복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죽음을 죽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비참하고 저주받은 죽음을 죽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의인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였던 1세기 말에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이 믿는 믿음과 그들이 증거한 복음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아 비참한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나 사도들의 참수와 같은 죽음들은 다 비참한 죽음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바울 사도가 쓴대로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롬 8:36). 죽음의 모양은 대개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이런 현실을 대면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7).”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그 비참한 죽음을 복된 죽음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많고 다양한 죽음 중에서 소위 무병장수를 누리다가 평안히 죽는 죽음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복된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본문 바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짐승을 섬기던 자들이 죽음 이후에 들어갈 상태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4:11).” 이것은 그들이 죽음 이후에 직면하게 될 영원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제아무리 무병장수하다가 평안히 죽음을 맞았을지라도 그들의 죽음 이후의 현실은 그들의 죽음이 저주의 죽음이었음을 증명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반면, 오늘 본문은 복된 죽음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성도의 죽음입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 ‘수고를 그치고 (영원히) 쉼’을 누릴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이렇게 죽음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 이후에 확연하게 갈립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무슨 차이가 그렇게 많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신자에게 일어나는 일이 신자에게도 일어나고, 또 그 반대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일들이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인생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현실을 맞는 죽음인가,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쉼은 누리는 죽음인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이점에서 성도들은, 자신이 보장받은 복된 죽음을 알고 기대해야 마땅합니다.


2.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 (13; 13:15,10; 12:11; 6:9-11; 2:13; 히 11:13)
본문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본문의 전후 문맥과 요한계시록의 상황을 주의한다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것이 순교적 죽음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본문인 13:15에서 짐승이 하는 일은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를 죽인다고 말했고, 13:10에서는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칼에 죽을 것을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2:11에서는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했고, 거기서 좀더 거슬러올라가 6장에서는 순교한 성도들이 하늘 제단 옆에서 간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6:9-11). 또 우리는 버가모 교회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사탄이 사는 곳에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죽임을 당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2:13). 이 모든 말씀을 고려한다면,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순교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과연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순교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과연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죽음의 방식을 설명하는 표현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말의 강조점은 ‘주 안에서’이지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장례식에서 이 구절이 종종 읽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순교적 죽음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모두 잘못된 성경 인용의 경우들입니까?
히브리서 11:13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순교적 죽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되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순교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죽는다는 말은 그 의미상 ‘주 안에서 죽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믿음으로 주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이 ‘주 안에서 죽는 것’이고 ‘믿음을 따라, 믿음으로 죽는 것’입니다.


3. 성도의 죽음 이후에 따라오는 일들

A. ‘지금 이후로’—성도의 중간 상태 (13; 눅 20:38; 마 10:28; 눅 16:19-31; 23:43)
여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말이 하나 더 있는데, ‘지금 이후로’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의 의미는 모호해서 학자들이 여러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레고리 비일의 해석이 가장 합당해 보입니다. 그는 ‘지금 이후로’라는 말이 신자들에게 복된 쉼이 시작되는 때는 바로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자들의 복된 쉼—안식이 시작되는 것이 죽음 직후라는 말을 조금 확장하면, 성도의 중간 상태라는 주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성도의 중간 상태는, 성도의 죽음과 주님의 재림에 따르는 몸의 부활 그리고 영과 육이 만남으로써 영화로운 구원이 완성되는 시간까지 죽은 성도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를 다룹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관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20:38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누가복음 20:38).” 여기서 ‘모든 사람’은 문맥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가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28).” 이 말씀도 인간이 육체의 죽음을 죽을지라도 영혼은 존속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이 죽은 뒤에 지속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눅 16:19-31). 이 이야기의 강조점이 윤리적인 요소에 있다고 할지라도, 여기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주님의 언급은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43).”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강도가 죽음 직후에, 혹은 죽는 그날에 낙원에 있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회개한 강도가 죽음 이후에 몸과 분리된 어떤 실존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주님의 이 약속은 무의미한 약속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서신서의 언급들도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복음서의 말씀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성도가 죽음 이후로부터 주님이 재림하시고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때까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성도들은 죽음과 함께 그 몸이 땅에 묻히거나 화장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영혼은 바로 그 순간에 모든 수고를 그치고 낙원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몸이 부활하고 그 몸을 입을 영화의 때까지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후로’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일 것입니다.

B. 영원한 안식과 행위에 따르는 상급 (13; 고전 3:14; 히 11:6; 마 25:35-36,40)
성도가 죽음 이후에 경험하게 될 일들을 본문은 성령님의 음성으로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성도의 죽음이 복되다는 것은 이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수고를 그친다는 것, 둘째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먼저 수고를 그친다는 말씀에서, ‘수고’라는 말은 지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한시적 쉼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은 무위도식(無爲徒食)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입니다.
둘째로 성도의 죽음이 복된 것은,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상급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은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죽을 때, 그가 지은 모든 죄악들과 그가 당한 모든 시련과 고통들은 뒤에 남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모든 박해와 유혹에 직면해서도 타협하지 않고 지킨 믿음의 행위들은 성도들의 면류관이 되어 그들을 따라 오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행위는 성도들을 앞서 가서 하늘문을 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앞서 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역사입니다. 성도는 죽을 때에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열어놓으신 하늘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그들이 행한 일’이 따라가게 됩니다. ‘그들이 행한 일’은 좁게는 적그리스도의 요구에 변함없이 저항한 것이고, 넓게는 그들이 믿음으로 행한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행한 일이 따른다는 것은 상급이 주어질 것을 암시하는데, 이것이 성도의 죽음이 복된 이유인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상급이 주어질 것을 약속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린도전서 3:14).”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또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히 11:6). 성도가 행한 일이 성도의 죽음을 따라간다는 것은 축복이겠습니까, 저주겠습니까? 축복입니다. 그가 성도이기 때문이고, 그는 필시 믿음으로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한 일은 위대한 선교사들이 이룬 대단한 업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5-36,40).”
성도가 인생을 살면서 믿음으로 행한 작은 일들을 주님께서는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 땅을 살면서 주어진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행한 수고라면 여러분의 작은 수고 하나도 흘려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약속이 성도의 죽음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4. 인내 = 순종 + 믿음 (12)
그래서 오늘 말씀의 결론은 12절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요한계시록 14:12).”
이 말씀은 성도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환경이 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대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믿음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요구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은 귀합니다. 앞으로의 인생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우리를 끝까지 인내하도록 도우시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처해있는 삶의 자리가 아무리 버거워도 은혜 안에서 인내하십시오. 인내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타협하지도,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십시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믿음을 지키십시오. 그럴 이유는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복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말합니다. “주님께 충성할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개의치 않고 늪과 진창을 지나고 언덕을 오르며 골짜기를 내려가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를 교인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겠다고 우리가 결심해야 합니다. 영광을 얻으려면 우리는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이런 인내는 본성적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여러분, 세상이 만들어낸 말들에 속지 마십시오. 종종 어떤 유명인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에서 “하늘의 별이 되어 다시 만나자.”든가 “하늘에서 편히 쉬며 행복하길”하는 말들을 봅니다. 성경은 복된 죽음을 누구나에게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은 오직 성도의 몫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호명하시는 그날이 언제일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보통 그날은 갑작스럽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릭 알렉산더(Eric Alexander)의 말이 맞습니다. “신자들은 ‘갑작스러운 죽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영광’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이처럼 복되고 영광스럽습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을 들으십시오. 주안에서 죽는 일은 주안에서 사는 일의 결과입니다. 복된 죽음을 죽는 성도는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복된 죽음, 주안에서 죽는 일은 주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라는 주어진 시간을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가르치신 모든 것에 순종하여 살아가십시오. 믿음을 지키고 사십시오. 이렇게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뵈러 갈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영광에 성도는 기쁨으로 반응하며 주님께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인내하십시오. 주의 계명에 순종하고 믿음을 지키십시오. 1680년대 스코틀란드의 언약도였던 아키발드 알리슨(Archibald Alison)이 교수대 앞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군중들에게 했던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뒤에 있는 하늘의 영광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소망은 저로 하여금 이 창백한 죽음을 사랑스러운 심부름꾼으로 보게 합니다. 이날에 내게 주실 기업을 인하여 내가 주를 송축하나이다… 친구들이여,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는 선하십니다. 네, 그는 시련의 날들에도 선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토록 달콤한 벗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죽는가, 어떤 상태로 죽는가 하는 것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 안에 있고, 주 안에서 죽는다면 여러분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주 안에서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