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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믿음 - 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우리 믿음의 여정은 어디로 향하는가?

요나 4:1-2, 욥기 42:5-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1-08

말씀내용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2주간 쉼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지난 주일, 저는 서울의 시광교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였는데, 우리 교회 강단에서 2년 쯤 전에 전했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욥기 42:5-6절을 본문으로 한 [믿음이 무너질 때 세워지는 믿음]이라는 제목의 설교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 설교를 하면서, 믿음에 대한 좀 더 확장된 성경의 가르침을 여러분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여정이 어디로 향하는가 하는 주제입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의 종착지에 관한 것인데, 그저 ‘천국이다’ 혹은 ‘성화의 완성이다’ 하는 말로써가 아니라,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종국이 얼마나 영광스러울지 다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여러분과 나누려는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세월을 통해 빚어 주신 믿음이 어떤 모습에 이르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정에 있는 사람이 자기 인생 여정의 끝이 어디인지를 아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정의 목적지를 안다면, 목적지에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걷는 우리에게 격려와 힘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왔고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심지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기는 한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 여정은 그만큼 힘들거나 헛된 여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요나의 믿음의 여정
요나는 우리에게 가장 많은 공감을 받는 선지자일지 모릅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연약한 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의 면모 때문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는 대상이고, 정복민들에게 잔인하기로 소문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런 명령은 누구에게나 쉬운 명령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대상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그들이 그 말씀에 반응하여 회개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원치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욥바 항구로 내려가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은 큰 폭풍으로 요나의 길을 막으시지만 요나의 생명이 바닷속에서 사라지도록 허락하지는 않으십니다. 큰 물고기에게 삼켜진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깊은 회개를 하게 됩니다. 사흘 뒤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시고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은 요나는 순종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니느웨로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요나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왕까지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국가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터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하신 것입니다. 요나의 반응이 본문 4: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요나는 하나님의 처사가 못마땅했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이기도 싫었습니다.

A. 설명을 요구하는 믿음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못마땅할 때가 있었습니까?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못된 민족, 이 악한 나라를 용서하신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께 따지려 듭니다. 본문 2절입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요나 4:2).”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도망가려고 했던 이유를 정당화하면서 하나님과 논쟁을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의 잠재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깊은 죄성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하나님과 논쟁을 하려는 요나의 태도에는 자기가 하나님과 논쟁할 만한 존재라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논쟁을 하려면 상대와 격이 맞아야 하는데,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과 격이 맞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자기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의 생각에 말이 안 된다고 여겨 지기만 하면, 우리는 요나처럼 반응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왜 죄의 성향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알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려놓는 것이기 때문에 죄성인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요나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납득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순종하겠나이다”하는 자세 말입니다. 본래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기 시작하고, 주님을 믿는 중에도 이런 태도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요나처럼 말입니다. 이런 건방진 모습으로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오래 참으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은 설명을 요구하는 이런 믿음을 다른 차원의 믿음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B.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요나는 이제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이 와중에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가르치십니다. 뜨거운 중동의 태양 빛 아래서 어떻게 되나 보겠다고 하는 성난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예비하여 그늘을 만들어 괴로움을 덜어 주십니다. 요나의 반응이 6절 하반절에 기록됩니다.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욘 4:6).”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요나이고요. 반면에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면서 요나의 믿음을 만들어가십니다.
이튿날 새벽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십니다. 박넝쿨이 사라졌고 해가 뜨면서 하나님이 예배하신 뜨거운 동풍이 불자 요나는 혼미하여 다시 죽기를 구합니다. 고작 사라진 박넝쿨 때문에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시는 이 질문이 요나서의 결론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 4:10–11).”
요나서는 그 대답을 독자들에게 남겨 둡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아심에도 하나님은 요나를 설득하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요나는 대답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그 대답은 침묵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침묵은 “하나님이 언제나 옳으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는 의미의 침묵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여정이 다다르게 되는 자리입니다.

C. 고난과 세월이 하는 일
우리는 어떻게 요나의 믿음이 설명을 요구하는 믿음으로부터 단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자리로 가게 된 것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5).” 이것은 고난을 통과한 사람의 고백이기에 쉽게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욥기에서 욥이 친구들과 논쟁한 말의 핵심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욥은 이해를 구하거나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눈으로 주님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6).” 무엇을 회개한다는 것인가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겨 하나님께 설명을 요구했던 태도를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의 고난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 따져 묻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태도를 드러냅니다. 특히 고난이 올 때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닥치는 고난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지금 욥은 이런 태도를 회개합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까? 시간과 함께 한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이런 태도를 뿌리까지 드러내 보게 하십니다. 욥이 하나님을 뵙고 그런 자신의 죄성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욥만의 경험이겠습니까? 우리는 요나에게서도 동일한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따지고 논쟁해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을 보게 하시고 그것을 다루고 고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의 예외없이 하나님과 논쟁하려고 들고 하나님께 설명을 요구합니다. 이때 고난과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태도를 보게 하시고 그것을 회개하게 하심으로써, 우리 신앙을 설명을 요구하는 믿음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여정의 종착지에서 그 믿음이 드러내게 될 모습입니다.


2. 성경 인물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여정
성경의 몇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도 이것을 입증해보겠습니다.

A. 아브라함 (창 22:12)
아브라함의 삶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신 창세기 22장입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 말도 안 되는 명령에 대해서 논쟁하거나 따지려 들지 않습니다. 그 명령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말도 안되는 것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세기 22:12b).”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원래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특히 25년간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놓고 씨름하고 논쟁하고 실수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고난과 세월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빚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의 종착지에서 믿음이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B. 모세 (민 20:1-13; 신 3:23-29; 34:1-12)
모세는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그광야의 40년 여정에서 부단히 참고 인내했고 뛰어난 온유함을 드러냈습니다(출 12:3). 하지만 너무나 허망하게도 40년째가 되던 마지막 해에, 모세는 물을 달라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민 20:8)을 어기고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분노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민 20:10-11),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수기 20:1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 하신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않았다”고 모세의 믿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냐 오냐’ 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 패역한 백성은 한 번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의 태도와 발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믿음의 수준입니다. 나중에 모세는 하나님께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신명기 3:25).”라고 간구했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신 3:26). 한 번의 실수로 하나님은 꼭 이렇게 하셔야 합니까? 우리의 논리와 항변은 너무나 정당하게 느껴지지만, 당사자인 모세는 하나님께 그렇게 항변하지 않고 모압 땅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경외하는 믿음으로 데려 가신 것입니다.

C. 바울 (고후 12:1-10)
신약성경에서 바울 사도는 어떻습니까? 이방인을 위한 이 위대한 사도에게는 ‘사탄의 사자’라고 할만한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고후 12:7). 이것이 사도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던 유대인들 또는 고린도후서를 쓰는 사도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고린도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그가 가진 안질이나 간질(뇌전증)의 질병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고후 12:9a).
혹시 하나님의 대답이 잔인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감사하게도 당사자인 바울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답을 제대로 알아들었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온전하게 다 이해하고 납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고후 12:9b). 여기서도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설명을 요구하는 자리로부터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바울 사도가 보여주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섭섭함을 표현하거나 논쟁을 하려 들거나 심지어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더 많은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서 그 증거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역사 속에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증거들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3. 역사 속의 믿음의 선배들의 증거

A. 호레이쇼 스패포드(1828-1888)
미국의 변호사요 사업가였던 호레이쇼 스패포드씨는 무디의 복음 사역을 후원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1871년 시카고 대화재 때 자신의 전재산을 거의 잃게 됩니다. 이후 회복해가던 과정에서,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영국 여행을 계획하고 아내와 네 딸을 먼저 여객선에 태워 보내게 됩니다. 자신은 남은 일들을 처리하고 다음 여객선으로 따라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내와 네 딸이 탄 여객선은 대서양에서 다른 배와 충돌을 하게 되고 네 딸이 다 죽었다는 전보를 살아남은 아내로부터 받게 됩니다. 이후 아내를 만나러 영국으로 가던 스패포드 씨는 대서양에서 네 딸이 죽었던 그 지점을 지나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깊은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지은 시가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자신의 하나님께 따지고 물어도 모자랄 상황에서, 스패포드 씨가 보여준 반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스패포드 씨의 믿음은,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그 선하심과 지혜와 전능하신 모든 속성과 성품을 알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경외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실증인 것입니다.

B. 헬렌 로즈비어(1925-2016)
헬렌 로즈비어는 아프리카 콩고에서 사역을 한 영국 선교사입니다. 그녀는 캠브리지 의대를 졸업한 뒤 미혼으로 선교사역에 삶을 드렸는데, 어떤 기혼 선교사들 보다도 더 많은 일을 콩고에서 감당했습니다. 병원을 세우고 의료진을 양성하는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던 중, 1964년에 발발한 콩고 내전에서 철수하지 않고 선교지를 지키던 헬렌은 반군에게 잡혀 5개월 동안 성폭행을 포함하여 무서운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게 아닌가”하는 자신의 무너지는 믿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인생을 온전하게 헌신한 자신에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5개월의 지옥 같은 삶에서 풀려난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가 회복과 치유의 시간을 가지고 1년이 조금 지난 1966년 다시 콩고로 돌아가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 그녀의 믿음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자리로 데려 가신 것입니다.

C. 엘리자벳 엘리엇(1926-2015)
1956년 1월 8일 에쿠아도르의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던 5명의 젊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수일 후 창에 찔린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한 젊은이가 짐 엘리엇이었고 엘리자벳 엘리엇은 그의 아내였습니다. 당시 29세였습니다. 그녀를 포함하여 남편을 잃은 젊은 부인들은 무너져 내리는 믿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기들의 삶에 일어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말이 되어야 따르는 믿음에서, 말도 안 되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경외하는 믿음으로 인도하십니다.

D. 아더 핑크(1886-1952)
위대한 성경강해자요 성경교사였던 하나님의 사람, 아더 핑크는 살아 생전에 많은 사람의 호응을 받았던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오랜 세월 청빙하는 교회가 없어 목회를 하지 못했고, 결국 생애 마지막 12년은 아내와 함께 영국 북서부의 외딴 섬인 루이스 섬에 들어가 외로이 성경 강해를 집필하면서 보냈고 거기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나님, 왜 이토록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씀 전할 강단도 주시지 않고 그렇게 외롭게 지내게 하셨나요?” 핑크 자신에게도 한 동안은 이런 질문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 한 토막이 그의 대답을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자리로 그를 데려 가신 것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것이면 병도 우리의 선이고,
주께서 복 주시지 않으면 선도 악이 되나니,
그것이 주님의 기쁘신 뜻이라면
아무리 잘못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이 옳은 것이네.


4. 우리의 믿음의 여정의 성격—죄의 현실
성경의 인물들, 그리고 역사 속의 선배들의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성도의 여정이 감당하는 것은 자기 죄에 대한 남겨진 형벌을 받거나, 율법이 죄인에게 부과하는 저주의 남은 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하는 믿음의 여정의 고단함과 아우성과 부르짖음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왜 우리는 한 순간에 이 믿음의 여정의 종국에 이르지 않고, 인생이라는 긴 여정, 그것도 고난의 세월을 통과해서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A. 죄를 아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서 죄의 가공할 무서움을 봅니다. 죄가 얼마나 끈질기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아를 높이고 우리 안에 무서운 우상숭배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이 땅에서의 삶,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처참한 죽으심은 죄의 무서움을 놀랄 만치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온 세상의 창조자, 거룩하신 성자, 생명을 주시고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시다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이렇게 다루셔야만 했습니다.
이 땅을 살았던 사람 중 죄의 무서움을 아담과 하와처럼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범죄하자마자,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게 된 것을 그들처럼 경험한 인간은 없습니다. 범죄함으로써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무한히(피조물인 인간에게 이 단어를 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단어를 쓰는 것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행복의 성격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교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어떤 염려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공급과 채우심과 돌보심의 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에덴이라는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이타적 사랑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부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만족을 주는 인간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죽이는 비통하고 비참한 결과를 고스란히 겪어야 했습니다. 900년이 넘는 세월을 살면서, 자식의 자식들이 죄에 죄를 잇대어 살아감으로써 만들어가는 지옥같은 현실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은 아담과 하와의 인생에서 얼마나 큰 소망의 원천이 되었을까요?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는 그 복음 말입니다(창 3:15).
그렇다면 우리는 그 죄의 무서움을 얼마나 압니까? 우리가 얻은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 대가를 치루기 위해 주님은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는 이런 대가를 지불하게 합니다. 이보다 낮은 것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우리를 억만 죄악에서 건져낼 수단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셨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의 대가를 더 이상 짊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세월을 지나고 인생의 여정을 통과하는 동안, 남아있는 죄의 성향과 싸웁니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것으로 설명되는 성화는 일평생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의 여정입니다.
여정을 걷는 동안, 우리는 이 죄의 성향 때문에 고통을 겪고 넘어지고 마음이 상합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께 화가 난 것 같지만, 사실 죄의 성향이 만들어내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경외하여 사는 믿음은 한 순간에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죄의 성향은 이런 믿음을 근본적으로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우리가 그것 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은 납득하기 전에는 순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설명을 요구합니다. 내 인생이 왜 이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대라고 따집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합니까? 믿음의 여정이 종국에 이를 때까지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명령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명령처럼 보여도, 묵묵히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아직 그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납득시키라고 화도 냅니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게 죄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여정에서 죄의 무서움을 철저하게 겪고 경험합니다. 주님이 이 죄를 멸하시러 이 땅에 오신 것을 조금 더 알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죄를 보며 몸서리칩니다. 내 자식들이 범하는 죄를 보면서 몸서리치며 두려워 합니다.
제가 왜 이것을 강조하여 말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고난 중에서, 우리 인생 여정에서 끊임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아니지.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 건 아니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하고 사로잡히고 자기 연민에 쌓여 살아갑니다.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네 안의 죄를 보라고 하십니다. 죄가 이 모든 비참함의 열매를 맺게 한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멸하러 아들을 보내신 일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오늘도 내 안에서 죄를 탄식하고 죄와 싸울 힘을 더하시는 것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믿음의 여정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가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의 죄, 네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견주려 하고 자신을 끝없이 높이려는 자기 중심성을 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십니까? 여러분의 인생 여정에 예기치 못한 고난이 찾아올 때, 여러분은 “나 힘들어! 왜 하나님이 내게 이러시는 거야?” 하며 분노하고 소리치지 않습니까? “내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데?”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대답이 있습니다. “죄를 보라! 죄가 나와 너희 사이를 갈라놓았구나!”라고 말입니다. “이 죄를 해결하려고, 너를 그 무서운 죄와 죄의 결과에서 구원하려고 내가 내 독생자를 세상에 보냈단다. 내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바로 너의 무서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너는 얼마나 아느냐?”

B. 그리스도의 구속이 성취한 것—죄에 대한 형벌과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구속
우리가 자신의 고통에서 이 고통을 초래한 죄를 보게 될 때,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하려고 사랑하는 구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욥처럼 말할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6).”
이 인생의 과정에서 우리의 믿음이 설명을 요구하는 믿음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경외하는 믿음으로 변화되어 갈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무게를 더 알고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신 질문을 우리도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피해갈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건드리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말이 안 된다고 여겨 화를 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우리가 우리 안에 깊이 감추어진 죄의 성향을 보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 이 회개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설명을 요구하는 신앙, 뭔가 당당한 자아를 드러내는 신앙으로부터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경외하는 믿음, 믿음의 종국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는 오늘 다 이 과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을 그 종국의 모습으로 빚으시고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 많은 말을 쏟아내던 우리의 입도 닫히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만 흘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고난과 세월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여정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도, 마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복된 것입니다. 이 복됨을 알고, 이 믿음의 여정을 함께 걸어 가십시다. 함께 울고 함께 웃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