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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설교 - 영적전쟁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9). 여자, 용 그리고 아이

요한계시록 12: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9-13

말씀내용
우리는 오늘부터 12장을 살피게 될텐데, 12장부터 요한계시록은 후반부로 진입합니다. 그래서 잠시 요한계시록의 큰 문맥을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상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요한계시록의 큰 문맥과 12장 (요 16:33)
요한계시록은 크게는 1-11장 그리고 12-22장,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역사에 나타나는 일들을 중심으로 일반적 조망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역사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좀 더 자세하고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 강조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임박한 몇 년 동안의 일들을 예언한 책이 아니고, 또 이 본문을 역사적 시간 순서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기독교 역사철학 또는 기독교 역사관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승천 이후에 어떻게 세상 역사를 끌고 가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다루는 역사는 주님의 승천에서 재림에 이르는 교회의 시대입니다. 전반부의 일반적 묘사는 후반부의 이면적 상세 묘사로 이어지는데, 이는 세 시리즈—인, 나팔, 그리고 대접—의 일곱 심판이 시간순으로 일어나는 연속적 심판이 아니라, 역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하나의 거시적인 기독교 역사철학으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인한 고난 속에서 살았던 1세기 말의 성도들을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편지이고, 1세기를 넘어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주님의 재림까지) 신자들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고, 우리가 신앙으로 인하여 받는 모든 환난과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약해지는 대신 주의 능력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이 하늘의 관점으로 땅의 역사를 보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는 신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신앙적 관점입니다.
후반부를 시작하는 12장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12장이 요한계시록의 중앙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12장에 기록된 내용이 교회, 마귀, 그리고 그리스도 사이의 결정적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12장의 환상을 요한계시록의 중심 환상으로 봅니다. 그랜트 오즈번은 12장의 환상을 요한계시록의 심장이라고 하고, 크레이그 키너는 12-14장(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 사이의 막간)을 요한계시록의 중심 부분이라고 하며, 그레고리 비일은 12장을 요한계시록을 푸는 열쇠로 봅니다.
12장에는 세 개의 환상이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여자와 용 사이의 전투 환상이 1-6절이고, 7-12절에는 용과 미가엘 사이의 전쟁 환상이 이어지고, 13-17절에서 다시 여자와 용의 전투 환상이 나옵니다. 이 세 이야기는 같은 것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 순서에 따른 배열이 아니고, 그 주제는 동일합니다. 여기서 용은 사탄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두 짐승과 음녀 바벨론의 지원을 받게 되는데 이들의 존재는 12-15장에 등장하고 16-20장에서는 이들 각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집니다. 12장은 특히 마치 판타지 소설처럼 읽혀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상징들을 통해서 주께서는 세상에서 신자들이 당하는 환난과 박해 그리고 싸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사탄-마귀가 모든 악의 근원임을 드러냅니다. 마귀가 성도들의 환난과 박해의 배후 주동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들의 싸움의 본질과 그 대적의 정체를 밝히고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환경이 오더라도, 신자들은 흔들리지 않고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인내로써 감당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12장은 이 말씀에 대한 배경 설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해를 옷 입은 여자 (1-2; 13:13,14; 16:14; 19:20; 시 104:2; 아 6:10; 계 2:10; 엡 5:22-33; 계 21:2)
본문의 환상에는 해를 옷 입은 여자와 한 큰 붉은 용 그리고 그 여인이 낳은 아이가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상징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문학 장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먼저 해를 옷 입은 여인에 대한 묘사를 1-2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라고 시작합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두 개의 이적을 보는데, 하나는 여자를 가리키는 ‘하늘에 큰 이적’이고 둘째는 3절에서 한 큰 붉은 용을 가리키는 ‘하늘에 또 다른 이적’입니다. ‘이적’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주로 표적이라고 번역이 되었고, 그것들은 초자연적 현상인 기적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의 메시아되심을 증거하는 표시, 싸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단어가 사탄을 대표하는 자들이 행하는 거짓 이적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됩니다(13:13,14; 16:14; 19:20). 사탄이 모방의 명수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적적 현상에 대해서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역사라고 단정하고 그런 자들을 추종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입니다.
요한은 하늘에 큰 이적으로서 한 여자를 보는데, 그 여자는 해를 옷 입었고 그 발 아래 달이 있었고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누구 혹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랜트 오즈번은 이것을 여자의 위엄을 묘사하는 3중 묘사라고 말합니다. 해를 옷 입었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과 그 강력하고 순수한 광채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시편은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시편 104:2).”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위엄을 묘사합니다. 달이 발 아래 있다는 것은 이 여자의 통치권, 지배권을 강조하는 표현 같습니다. 달은 구약성경에서 아름다움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아 6:10). 이 여자는 위엄이 있으며 아름답고 통치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머리에 열두 별의 관을 썼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관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을 한 번 더 보여주는데, 이 관은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신실한 믿음으로 승리한 것에 대한 상이기도 합니다(계 2:10). 열두 별은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 즉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여자는 그리스도의 오심 이전과 이후에 존재했고 존재하는 신실한 공동체의 표상’이라고 말합니다. 해, 달, 별이 땅의 어떤 힘에 의해서 파괴될 수 없듯이, 구약시대이든 신약시대이든 교회도 이 땅에서, 이 땅의 힘에 의해서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늘의 시각에서 보는 교회는 이 환상 속의 여자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며 다스리는 위엄 있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이 여자가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은, 교회가 성경에서 여성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마귀의 지배를 받는 불신 세상인 음녀 바벨론에 대조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아름다움의 절정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엡 5:22-33; 계 21:2).
그런데 2절은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고 말씀합니다. 여자가 해산하려는 아이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산고를 겪으며 해산하려고 하는 여자는 특별히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참 이스라엘을 가리킬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 여자를 마리아로 보고 싶어하지만 그 해석을 지지하기는 어렵습니다.


3. 한 큰 붉은 용 (3-4, 9; 시 74:13-14; 사 27:1; 겔 29:3; 요 8:44; 계 17:6; 19:12; 단 7:7-8,24; 8:10; 마 2:16)
이어서 요한은 ‘하늘에 또 하나의 이적’을 보는데, 이번에는 한 큰 붉은 용이 보입니다. 일곱 머리에 일곱 왕관을 썼고 열 뿔을 가진 용입니다. 이 괴물-용의 정체는 9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9).”
큰 용의 정체는 마귀 혹은 사탄이라 불리는 옛 뱀입니다. 이는 모든 영적 전쟁의 한쪽 배후 세력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리워야단이나 라합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묘사된 큰 바다 괴물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애굽과 바로 또는 앗수르와 바벨론을 상징했습니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시편 74:13–14).”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이사야 27:1).”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에스겔 29:3).”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 묘사와 신원이 정확하게 나타납니다. 옛 뱀이라는 말은 창세기 3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하와를 유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범죄하게 한 뱀의 정체는 온 천하를 꾀는(유혹하는) 사탄-마귀였습니다. 이것이 한 큰 붉은 용의 정체이고 언제나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싸움의 배후에 있었던 것입니다.
붉은 색은 사탄의 피 흘리는 살인마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요 8:44). 심지어 17장은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고 묘사합니다(17:6). 이 용은 또 일곱 머리에 일곱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이 거짓 모방의 명수인 사탄은 그리스도께서 쓰시는 왕관을(19:12) 모방한 일곱 왕관을 씀으로써 자기가 우주적 통치권을 가진 것으로 행세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권세를 사칭하는 관일 뿐입니다. 또 이 큰 붉은 용이 가진 열 뿔은 큰 능력과 권세를 가리키고 다니엘 7장에서 다니엘이 본 열 뿔을 가진 무서운 넷째 짐승을 연상하게 합니다(단 7:7-8, 24).
실로 이 용의 파괴력은 4절에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는 묘사에서 보여집니다. 이것은 다니엘 8:10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들 중의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들을 짓밟고(다니엘 8:10).”
다니엘의 이 말씀은 주전 2세기 그리스 셀류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에게 적용되었지만, 요한계시록의 본문은 그의 배후에 있던 마귀의 권능에 이 말씀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주전 176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안식일과 절기와 성전 제사와 어린 아이의 할례를 금했고 성전에서 돼지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성전과 제단을 더럽혔고 유대인들에게 돼지를 강제로 먹임으로써 유대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박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배후가 큰 붉은 용 곧 사탄-마귀였다고 밝힙니다. 본문은 이 붉은 용이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합니다. 오즈번은 별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기 보다 주로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것은 하늘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쟁을 가리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사탄이 하늘의 천사들의 1/3을 타락하게 하고 하나님께 반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용은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코자” 하고 있습니다(4b). 여러분은 헤롯 대왕이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리라는 것을 알고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마 2:16). 그 일이 실패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용이 여인이 해산할 아이를 삼키려 한다는 것은, 메시아 공동체인 교회가 지상에서 직면하게 될 교회를 향한 세상의 폭력적인 적개심을 잘 설명해줍니다. 결국 용의 파괴력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달하게 되었고 거기서 예수님은 무력하게 죽으심으로써 용의 악한 계획은 성취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용은 자기가 원했던 대로 아이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을 때 무참하게 패배하고 맙니다.


4. 아들-아이 (5; 시 2:7-9)
5절은 여자가 낳은 아들을 소개합니다. 그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입니다. 이것은 시편 2:7-9에서의 인유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편 2:7–9).”
철장 곧 쇠막대기로 질그릇을 깨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여자가 낳은 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그 권세로 만국,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5절은 너무나 축약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묘사하는데, 이는 그 초점이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5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승천으로 바로 옮겨갑니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킵니다. 용은 자기가 이기는 것 같아 보였지만, 결국 이렇게 패배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양육과 보호 (6; 민 25; 31:16; 계 2:20; 출 2:15; 왕상 19:3-8; 마 24:15; 계 11:2-3)
본문의 초점은 용이 대적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에 오르셨지만, 교회는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하고 있고, 이 땅은 여전히 용의 권세를 따르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은 여자가 광야로 도망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시 우리를 출애굽기로 데리고 갑니다. 광야는 적대적 세상에서 성도들이 보호를 받는 장소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또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상숭배와 음행의 유혹에 직면하게 되는 곳도 광야입니다(민 25; 31:16; 계 2:20). 6절은 광야가 하나님께서 여자를 1260일 동안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해 예비하신 영적 피난처라고 묘사합니다. 모세가 살인을 저지르고 광야로 도망한 일이나(출 2:15) 엘리야가 갈멜산 전투 후에 두려워서 광야로 도망한 사건(왕상 19:3-8)에서도 광야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피난처였습니다. 여기 ‘예비하신 곳’에서, ‘곳(τόπος)’은 성전과 동의어로 사용되거나(마 24:15) 70인역에서는 성소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사용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고 양육하시는 광야는 사실 전능자의 그늘이요 그 임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장막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고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공격이 아무리 극심해도, 교회는 하나님의 양육과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이 적대적인 세상 속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아무도 교회를 깰 수 없고 허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양육하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기간은 1260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미 11:2-3의 42개월과 1260일에서 보았듯이, 이것들은 교회의 시대 즉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고 교회가 거룩한 양육을 받는 기간이면서 박해를 받는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시기에, 적대적인 광야에서 교회를 돌보시고 그 필요를 채워 주심으로써 교회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은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교회는 수 없이 많은 반대와 적대 그리고 박해와 환난에서 건짐을 받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으면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 아무리 큰 붉은 용일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에서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6. <터미네이터>와 원시 복음(창 3:15)
1984년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토리는 사실 오늘 본문의 소재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터미네이터>는 2029년 핵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지구를 지배하는 기계들과 남은 인간의 전쟁을 그린 영화입니다. 인간을 말살하려고 하는 기계 스카이넷은 존 코너가 이끄는 인류저항군과 전쟁을 벌입니다. 이 전쟁이 쉽지 않다고 느낀 스카이넷은 존 코너를 낳게 될 그 어머니 사라 코너를 죽이기 위해 1984년의 로스앤젤레스로 기계 인간을 보내게 되고, 이에 인류저항군도 사라 코너를 지키기 위해 카일 리스라는 수호자를 1984년의 로스앤젤레스로 급파하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됩니다. 이 영화의 설정은 요한계시록 12장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러나 사실, 고대의 신화들에서도 유사한 소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이 태어나서 자기를 물리치는 운명을 피하려고 왕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 왕을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 중 하나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을 임신한 여신 레토(Leto)가 피톤(Python)이라는 용의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피톤은 레토가 낳을 아이가 자기를 죽이기로 정해진 인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토는 제우스가 보낸 바람에 의해 섬으로 안전하게 옮겨지고 포세이돈은 그 섬을 물 아래로 숨겨 피톤이 레토와 그 아들 아폴론을 찾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아폴론은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용을 찾아 죽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슷한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리스 신화가 아닌 구약성경에서 이 설정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에,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말씀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뱀과 여자의 싸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원수된 관계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2:9은 그 옛 뱀이 곧 마귀요 사탄이며 오늘 본문의 그 붉은 용이라고 말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오늘 본문에서 위엄 있고 영광스러운, ‘해를 옷 입은 여자’가 낳을 아이인 그리스도입니다. 비록 뱀(뱀의 후손이 아니라)은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십자가의 죽으심) 그리스도께서는 뱀의 머리를 부수어 버리실 것(부활과 승천으로써)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승천에서 이미 일어났습니다.


7. 교훈과 적용 (엡 6:12; 고후 11:15; 마 7:15-20; 마 6:13a; 계 12:12)
영적 싸움은 현실입니다. 죄가 인류에게 들어온 이래 이 싸움은 멈추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 이 전쟁은 종전에 이르지 못했으며, 휴전 중인 상태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미에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 6:12).”
문제는 사탄이 너무나 놀라운 변장술을 사용하는 모방의 명수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쓰시는 왕관을 모방하여 쓰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린도후서 11:15).”
이 전쟁의 성격은 아군과 적군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별을 강조하셨습니다(마 7:15-20). 우리는 이런 싸움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 생활은 그저 말씀과 기도를 쌓아 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밤에 가만히 와서 여러분이 쌓아놓은 은혜를 무너뜨리고 여러분의 영혼을 죽이기 위해서 그 자리에 독약을 치고 가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여섯 가지의 가장 중요한 청원 가운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는 청원을 넣으시고 이것을 매일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마 6:13a). 유혹하는 자가 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할 수 있는 한 온갖 해를 끼치기 위해서 성도들과 교회를 속이고 유혹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교회의 안팎에서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마귀의 궤계를 분별하지 못하고 타협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 자신과 타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순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마귀가 성도들과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발악을 하는 것은, 그의 힘이 너무 강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마귀와 그의 세력을 패배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결정적으로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2:12).”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 싸움을 경계해야 하지만,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교회는 마귀의 공격으로 상처를 입을 수는 있겠지만,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 아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결국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종종 이런 마귀의 공격 아래 있는 교회를 보면 누추해보이기까지 하지만, 오늘 말씀은 하늘의 관점에서 교회가 얼마나 위엄 있고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교회의 자태를 알고 세상 앞에서도 교회와 성도는 담대히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