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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1A). 말씀의 길로 행하는 사람

시편 119:1-3, 마가복음 12:30, 요한일서 2: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3-09

말씀내용
오늘부터 최소 22회에 걸쳐 시편 119편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워낙 119편은 긴 본문이어서 기존의 [시편 강해]와 별도로 [내가 사모하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강해를 하려고 합니다. 119편은 각각 여덟 절로 이루어진 22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번에 한 연 씩 설교를 해보려고 합니다.


1. 119편을 설교하는 이유와 의도
먼저 제가 왜 시편 강해의 순서를 무시하고 119편을 설교하는지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설명이 시편 119편 강해를 들으시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특별히 이 시편을 좋아했고 사랑했습니다. 중학교 때 회심하고나서 제 안에서 일어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암송하기를 즐거워하기 시작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 가치를 칭송하는 시편 119편은 그런 제 마음을 묘사해주는 최고의 말씀이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 언젠가 시편 119편을 설교할 기회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그 기회가 자연스럽게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던 시절, 시편 강해를 시작했지만 중간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부임하여 적당한 기회에 다시 시편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안식월을 떠나기 전인 2021년 말까지 제3권 89편까지를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안식월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과 그 능력과 그 가치를 여러분과 함께 더 깊고 풍성하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안식월을 마치고 돌아가면 시편 90편에서 조금 건너뛰어 [내가 사모하는 말씀]이라는 독립된 강해 시리즈로 119편을 먼저 설교하고 그 뒤에 90편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150편까지를 설교를 계속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모든 시편처럼, 119편은 구약 성도의 기도이자 찬송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애절하게 사모하고 사랑하는 성도의 기도이며 노래입니다. 제가 시편 강해에서도 의도한 것이었지만, 특별히 [내가 사모하는 말씀], 119편 강해를 통해서 의식적으로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편의 모든 내용에 여러분 모두가 깊이 공명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공명(共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 함”입니다. 저는 119편의 모든 구절, 성령님의 영감으로 이 시편을 썼고 이 시편으로 기도했고 노래했던 구약 성도의 마음, 그 감정에 여러분이 공감하여 여러분도 그와 같이 이 시편의 말씀들로 기도하고 노래하고 싶어 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말씀의 기쁨』이라는 그의 시편 119편 강해의 서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을 읽을 때 자신에게 아래 세 가지 질문을 해 보라.
본문을 이해하고 있는가?(교훈적 질문)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가?(감정적 질문)
기꺼이 노래할 마음이 일어나는가?(의지적 질문)
저도 같은 마음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시편 119편을 쓴 구약 성도의 마음과 공명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편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편의 내용과 그 본래적 의미를 여러분에게 바르게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편의 내용이 어떻게 우리 시대의 신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도 어느 정도 말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해야하는 일은, 이해한 본문의 내용을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 가슴에 담고 여러분의 기도로 삼으며 그 시편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119편 강해를 따라오면서 여러분이 명심하셔야 하는 것은 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 시편으로 기도하고 노래하는데 까지 나아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점은 우리가 금년에 여러 지체들의 수고를 통해 시도하고 있는 [말씀이 스며드는 기도]와도 맥을 같이 하는 일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스며들고, 그 말씀에 적셔진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119편에 대한 찬사들
119편은 교회 역사에서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수 많은 찬사를 얻은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드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강해를 모두 마치고 나서야 겨우 119편 주해에 착수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119편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항상 내 사고력과 역량의 한계를 느꼈다.” 이 말을 듣는 저는 덜컥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초의 탁월한 선교사였던 헨리 마틴(1781-1812)은 119편과 관련하여 그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시편 119편의 어떤 부분을 배우면 경건의 힘을 얻는다. 저녁에 시편 119편을 읽음으로 더 자라는 느낌을 받는다. 대개 그 시편 읽기가 ‘영의 생각’의 구조로 마음을 돌려준다. 내 생각이 어떤 유익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불만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편 119편의 한 대목을 읽으면 다시 회복된다. 참으로 시편 119편은 매우 엄숙하기 이를 데 없다.” 19세기 영국 성공회의 선교 지도자였던 헨리 벤(1796-1873)은 “제 자신의 마음에 기도의 정신이 메말라 있다고 여길 때마다 이 시편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러면 결국 마음의 불이 다시 일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조금이나마 했기에, 여러분 모두가 이런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고백은 한 것은 목사들만이 아니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도 1819년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하이드 파크 코너에서 걸으면서 큰 위로 가운데 시편 119편을 반복했다.”
이들보다 앞서, 목사들의 목사로 불리는 찰스 브리지스(1672-1747)는 33살 때 시편 119편으로 연속 설교를 했는데, 이것이 그의 책 『시편 119 : 말씀 사모하여 헐떡이는 사람』(청교도신앙사, 2016)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일들을 깊이 배우고 오랜 믿음의 삶과 행보 속에서 실천한 사람의 일기이기도 합니다. 또 이 시편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의 생명이 걸린 경건의 시금석으로 활용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시편 119편의 이런 진가를 알았던 필립 헨리(1631-1696)는 어린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매일 아침 시편 119편의 한 구절씩 묵상하거라. 그러면 1년에 그 시편 전체를 두 번 묵상하는 셈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성경의 나머지 책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신앙교육을 받아 성장한 한 아들이 불후의 성경 주석을 남긴 매튜 헨리(1662-1714)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물론, 어린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에게 이 방식을 권하고 싶습니다. 격려가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어린 시절 엄격한 어머니를 통해 여러 시편들을 암송하게 되었습니다. 후일, 그가 한 말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성경 중에서 가장 힘들었고 심지어 혐오스럽기도 했던 부분인 시편 119편이 지금은 가장 소중한 부분이 되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119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넘치고도 영광스러운 사랑의 열정으로 제게 가장 소중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3. 구조와 주요 개념들
모두 176절인 119편은 시편에서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19편에 얽힌 일화들도 많은데, 가장 흥미로운 것 하나는 17세기 에딘버러의 주교인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의 일화입니다. 위샤트는 그의 유명한 후원자인 몬트로스(Montrose)의 후작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 직전 발판 위에서 시편 한 편을 읽도록 허용하는 관습에 따라, 시편 119편을 요청했습니다. 119편의 3분의 2 정도를 읽었을 때 사면령이 도착했고 그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도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의 예화로 많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다르다고 합니다. 위샤트는 거룩함보다 영리함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사면을 기대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시편 119편을 요청했으며, 다행이 사면이 올 때까지 집행을 연기하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119편은 긴 시편입니다.
119편은 길지만 매우 정교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176절은 22연이고 각 연은 여덟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9편에는 우리말이나 영역 성경으로 읽어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한 가지 구조적 특징이 있는데, 이합체시(離合體詩, acrostic poem)의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점입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모두 22자인데, 1연의 여덟 절은 모두 첫자인 알렢으로 시작하고 2연의 여덟 절은 모두 두번째 알파벳인 베이트로 시작합니다. 이렇게 순서대로 나가서 마지막 22연은 각절이 마지막 알파벳인 타브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는 시편(111, 112편)과 예레미야애가에서 이런 형식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이합체 형식은 전체를 암기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119편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묘사하기 위해 시인이 주로 8개의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거의 모든 구절에서 이 단어 중 하나를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번역된 성경들이 히브리 단어를 일관되게 번역하지는 않았지만, 그 여덟 단어는 이러합니다. 먼저 ‘율법’(1절)은 히브리어 ‘토라(תּוֹרָה)’인데 모세의 율법을 넘어 가르침(instruction)을 의미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두번째로, ‘증거’(Testimonies, 2절)인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하는 증거의 의미입니다. 세번째 단어는 ‘법도’(Precepts, 4절)로 권위자의 지시와 명령을 의미합니다. 네째로 ‘율례’(Statutes, 5절)는 법적 구속력을 특히 강조합니다. 다섯째로 ‘계명’(Commandments, 6절)은 하나님의 권위가 강조되는 바, 명령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여섯째, 판단(Judgements, 7절)은 기본적으로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결정, 하나님의 판단을 의미하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방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일곱째, ‘말씀’(Words, 9절)은 가장 일반적인 단어인데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거나, 십계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끝으로 ‘약속’(Promises, 11절)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이 여덟 단어 중에서 6-8 단어가 각 연에서 사용되는데, 시인이 이 각 단어의 특별한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사용했다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양하게 혼용하여 쓰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여덟 단어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단어로, ‘길’이나(3,37), ‘이름’(132), ‘성실하심’(90) 등도 사용되었고, 84, 121, 122절에서는 어떤 상응하는 단어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들 단어들의 공통점이라면, 언약과 구속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들은 설령 율법이나 계명, 율례, 법도와 같은 것일지라도, ‘하라, 하지 말라’는 의미로 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단어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와 은혜를 전제하고 있고, 단순히 행위의 순종을 넘어 언약 백성의 하나님을 향한 애정을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119편은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성경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교칙이 즐겁다고 말하는 학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덟 단어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약과 구속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4. 복있는 사람은 말씀의 길로 행하는 사람이다. (시 1:1; 창 6:9; 마 7:13-14; 호 10:2a; 겔 33:31; 막 12:30; 렘 29:13)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 1연은 여덟 절이 모두 히브리 알파벳 첫자인 알렢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1절과 2절은 시편 1:1처럼 ‘복있는 사람’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1절과 2절의 끝 부분이 “~자(들)은 복이 있다”로 마치는데, 히브리어로는 이 말이 맨 앞에 나옵니다. 이것은 행복한 사람, 기쁨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여기로 오라는 초청입니다. 데렉 키드너는 시편 1편, 19편과 관련해서 119편의 성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위대한 시편은 시편 1편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활짝 만발한 모습을 보여주며, 시편 19:7 이하에서 칭송하는 성경의 다양한 면모들을 개인적 차원에서 증거해주고 있다.”
인간은 본질상 행복을 추구합니다. 우리나라 헌법도 행복추구권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명시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행복이 어디서 얻어지는지 타락한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시인은 행복의 길이 여기 있다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먼저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행위가 온전하다’는 말은 죄 없는 의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직역하면 ‘길에서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길은 행위, 행실을 의미하지만, 길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중요합니다. 삶의 여정, 특별히 지나온 삶의 궤적을 가리킵니다. ‘온전하다’는 단어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창 6:9)”고 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죄나 흠이 없다는 말이라기 보다 ‘방향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 삶의 궤적이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온 여정을 보여주는가? 이것이 ‘행위가 온전하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라고 부연 설명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은, 신앙은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신분이 중요하고, 믿음으로 얻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는 것, 그리고 이신칭의를 확신하는 것,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거기에 머물러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있는 사람은 길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1-3절에서 사용된 동사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1절에 ‘행하다’뿐 아니라, 2절에 ‘지키다’와 ‘구하다’ 그리고 3절에 다시 두 번이나 ‘행하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신앙은 길을 행하되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 즉 말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고 협착한 길로 행하라,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3-14). 존 번연이 신자의 삶을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 비유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의 삶은 꾸준히 그 말씀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지를 알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1절 하반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함으로써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이 어떤 가치와 방식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지시하고 우리가 가는 길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경이 그일을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조금 더 보완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
2절은 복있는 사람의 행위가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겉과 속이 같은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의 행함은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전심으로’는 나뉘지 않은 마음입니다. 오늘날 좀처럼 강조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마음을 분산하고 싶어합니다. 신앙과 하나님께도 해당됩니다. 적당히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전심으로’라는 말은 불편함을 초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언제나 ‘전심’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호세아 10:2a).”고 했고, 에스겔 선지자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른다”고 백성들의 두 마음을 지적했습니다(겔 33:31). 무엇보다도 주님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막 12:30).
이 말씀들은 너무 극단적입니까? 지금 시인은 행복한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전심은 길에서 흠 없이 걷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거나 하나님을 거부하는게 아닙니다. 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안 행복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3).”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은 간절함과 그것을 알려고 늘 애쓰는 실천적인 습관에 걸려 있는 복입니다. 이 습관은 하나님의 약속에 감동을 받을 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3절은 이런 사람의 실상을 정리하듯 묘사합니다.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3).”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닙니까? 모든 불의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은 주의 길로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사람은(고후 5:17) 더 이상 불의를 지속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3절에서 ‘행한다’는 동사는 완료형인데, 그 행위가 습관적으로 꾸준히 지속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행하고 그 길에서 흠이 없는 사람이며, 불의를 행하지 않고 주의 도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5. 교훈과 적용: 길 (1,3, 113; 요일 2:6; 사 30:21)
말씀을 정리하면서, 한 단어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말씀의 길로 행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이지요. 문제는 어느 길로 가느냐입니다. 히브리어로 ‘길’을 의미하는 ‘데렉(דֶּ֫רֶךְ)’이란 단어가 오늘 본문에 두 차례 나옵니다. 1절에서는 ‘행위’로, 3절에서는 ‘도’로 번역되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주의 도’ 즉 주의 길로 행하는 사람이고 그것은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내면의 발현입니다. 시편 119편 전체는 주의 길이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말씀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길로 행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십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나뉘어진 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수십 년 동안 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서 뿐 아니라, 신약성경을 통해서도 책망하시는 것은 바로 ‘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시인은 113절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라고 말합니다. 제자도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모든 여정을 완수하셨으니 나는 이제 아무 것도 할 것 없고 그저 믿음으로 안주하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제자도는 그리스도의 길로 행하며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한1서 2:6).” 신앙은 전심으로 구하고 그 길, 말씀의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행복입니다.
이렇게 걸어가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이사야 30:21).” 뒤에서 말씀으로 우리가 행할 길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신자는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따라 판단하고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뒤에서 들리는 주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말씀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여러분의 뒤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의 길로 행하십시오. 이런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