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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5). 우리를 다시 살리사!

시편 85:1-13, 요한계시록 3:2, 시편 51:10-1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8-11

말씀내용
영적 침체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은 죄입니다. 모든 영적 침체가 죄와 관련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죄는 신자의 삶에 영적 침체를 가져옵니다. 영적 침체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던 기쁨을 앗아갑니다. 심해지면 영적 갈망 자체도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후에 1년 여의 영적 침체기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은 후에 회개를 하게 되는데 그제서야 자신이 잃어버린 영적 기쁨을 회복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것이 시편 51:10-12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편 51:10–12).” 이것이 다윗 개인의 참회시이고 또 회복을 구하는 기도라면, 오늘 우리는 시편 85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로서 회개와 회복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교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저작 시기와 상황
85편이 쓰여진 시기와 상황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바벨론 포로기를 지나 귀향민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시대 쯤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고(주전 586)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은 고레스의 명령에 따라 귀환을 시작합니다. 1차로 스룹바벨과 세스바살의 지도 하에 귀향을 하는데 주전 538년의 일입니다(에스라 1-6장). 이로부터 80년이 지난 주전 458년, 에스라의 지도 하에 2차 귀환이 이루어집니다(에스라 7-10장). 마지막으로 주전 444년에 느헤미야와 함께 귀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느 1-13장). 이와 같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는 일은 단번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나라가 망했고 멀리 포로로 붙잡혀간 이들에게 무슨 돌아갈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들이 오래 전에 거듭 약속했던 대로 그 약속을 이루어 그들을 기업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귀향민들은 얼마나 들떠서 돌아왔겠습니까?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만 하면 곧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돌아온 귀향민들은 많은 난관들과 도전들을 직면해야했습니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황폐해서 버려진 예루살렘 성이었고, 무너져서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성전 터였으며, 그들이 거할 집 하나 제대로 없는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성전을 재건해야 했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도 재건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적 상태가 회복될 필요가 절박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생각하면, 본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85편은 세 연으로 나뉩니다. 1-3절에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4-7절에서는 현재의 위기에서 자신들을 회복시키고 다시 살려주시기를 간구합니다. 8-13절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2. 과거의 은혜 (1-3)
먼저 과거의 은혜를 언급하는 1-3절을 보지요. 우리가 영적 침체에 빠질 때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해야 하는 첫번째 일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 특별히 시편에서 배우는 중요한 패턴입니다. 1-3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것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시편 85:1).” 여기서 시인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건을 가리킬 개연성이 아주 큽니다. 하지만 여기 ‘야곱의 포로된 자들’이라는 말은 70인경의 번역을 따른 것인데, 히브리어 본문에는 ‘포로들’이라는 말이 없고 ‘야곱의 행운’이라고 되어 있어서 적지 않은 영역성경들(NIV, ESV, NLT, LEB, The Message)이 ‘야곱의 행운들을 돌아오게 하셨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주의 땅’은 약속의 땅 자체만을 가리킨다고 보기 보다, 하나님의 장소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시인이 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들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들을 회복시켜 주셨던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시편 85:2).” 여기서 언급하는 죄악과 죄는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우상숭배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북 이스라엘 말기에 쓰여졌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이 죄악과 죄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출 32-34). 금송아지를 섬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진멸해버리려는 마음을 모세에게 밝히신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던, 이스라엘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민족적으로 범죄한 배교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죄악을 사하셨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너무나 많지만, 사실 사죄의 은혜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임스 보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자비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죄용서입니다. 바로 이 원천에서 다른 모든 자비가 흘러나옵니다.”
또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들을 용서하시는 방법은 구속자의 의의 전가로 그 죄악들을 덮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덮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렇게 해주셨다고 말합니다.
3절입니다.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시편 85:3).”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당신의 진노를 거두실 수 있었습니다. 죄 용서의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는 거두어 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시인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3. 우리를 다시 살리사! (4-7; 계 3:2; 시 51:12)
두번째 연에서 우리는 회개와 회복을 위한 공동체의 절박한 간구를 마주합니다. 85편은 시인 한 사람의 기도가 아닙니다. 8절을 제외하면 기도의 주체는 ‘우리’ 즉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4절입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시편 85:4).” 여러분이 이미 주목하셨겠지만, 85편에는 유독 ‘돌이키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 말은 종종 죄에서 돌이킨다는 뜻으로 회개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오게 하신다, 돌이켜 주신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신다, 백성이 어리석은 데로 돌아간다’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4절에서는 ‘우리를 돌이키시고’라고 말합니다. 1절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셨던 대로, 신실하게 그 약속을 이루어 그들을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영적, 물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회복의 은혜를 누리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거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은 뒤로 밀려난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지 않으시고 자신들을 대적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조상들의 죄악을 사하셨고 모든 죄를 덮으사 진노를 거두셨지만, 지금 자신들을 향해서는 진노를 거두시지 않은 듯 보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들의 회개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이키게 해주셔야 자신들이 돌이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회개할 수 조차 없다는 고백입니다. 회개는 전적으로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도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를 넘어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거두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께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일은 같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5절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시편 85:5).” 이미 유다 백성이 겪은 고난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고난이었습니다. 시인은 압니다. 자신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이미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요, 진노를 거두신 결과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백성의 영적 상태는 황폐합니다. 물론 외적인 도전들과 물질적인 궁핍의 문제도 심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가만히 보면, 백성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물질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 회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에서 그것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시편 85:6).” 시인은 백성을 대표하여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라고 기도합니다. 이 간구는 부흥을 위한 간구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2a).”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형편에 있기에 이런 간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름은 교회지만, 교회가 그 안에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생명력을 경험하지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너무나도 많은 교회들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흥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깨우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물붓듯이 부으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들의 감각을 온전하게 새롭게 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라는 간구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진정한 기쁨의 대상이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개인적으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편 51:12).”라고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시편 85:7).” 시인은 자신의 간구의 근거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어주신 언약이라는 사실을 주장합니다. 그는 주의 인자하심(헤세드), 언약의 사랑을 베풀어달라고 구합니다. 비록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니 그 언약에 따른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때,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언약, 그리고 그 언약에 따라 주신 모든 약속들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마땅히 구할 자격이 있고, 하나님은 당연히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사실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참된 기도를 배웁니다.


4. 하나님의 응답 (8-13; 합 2:1; 요 1:14; 롬 5:1; 8:32)
시인을 통해서 표현된 백성의 진심 어린 간구는 이제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8절은 85편에서 유일하게 1인칭으로 기술된 문장인데, 이것은 백성의 지도자인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서 백성에게 말하는 형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하나님께 들은 약속을, 간구하는 백성에게 전해주는 내용이 8-13절입니다. 먼저 8절입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편 85:8).” 지도자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위해서 기다릴 것을 요구합니다.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라는 말은, 그들이 종종 빠지곤 했던 죄나 우상숭배, 과거의 배교의 사건들과 같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지 못하고 우상에게로 향하는 대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하박국 2:1).”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믿음을 요구하고 이것은 언제나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동안, 어리석은 데로 가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9절입니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시편 85:9).” 구원이 경외하는 자에게 가깝다는 말은, 이제 고난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른다는 것도 구원이 가깝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닙니다. 같은 것을 반복하여 말함으로써 강조한 것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백성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10절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편 85:10).” 이 응답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또 얼마나 복되고 멋진 표현입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네 가지 속성이 드러납니다. 인애(헤세드), 진리(에메트), 의(쩨데크), 화평(샬롬)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특징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 속성들은 의인화됩니다. 인애와 진리가 만났습니다. 인애와 진리는 종종 짝을 이루어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인자와 성실’로 번역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여기서 은혜와 진리는 구약의 개념에서 인애와 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진리가 완전하게 드러난 사건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대속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 죄에 대한 완전한 공의를 쏟아 부으셨고, 이로 인하여 죄인인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만난 자리는 사실 십자가에서 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만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고 모든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음으로써, 신자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5:1에서 말씀한 대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1).” 의가 없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존재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11절에서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진리는 신실함, 이스라엘 백성의 신실함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실함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의가 굽어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만족하십니다. 당신께서 입혀 주신 의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를 받아 신실함으로 반응하는 백성을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굽어보시는 것입니다.
10-11절은 하나님의 속성들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그 백성이 신실함으로 응답하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은 간구했던 대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12-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시편 85:12–13).”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합니다. 주님은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로마서 8:32에서 말씀하신 대로 말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그것은 아마도 당장 혹독한 기근의 때를 지나고 있던 귀향민들에게 풍성한 수확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결론을 맺습니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시편 85:13).”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간다는 말씀, 주께서 행하시는 길은 의의 길이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당하는 모든 일을 올바로 판단하심으로써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역사의 모든 부정한 것을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지난 주일,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봄 대로, 주님은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계 22:12). 58편은 이런 종말론적 소망으로 마무리됩니다.


5. 교훈과 적용
여러분은 85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교훈을 받습니까? 우리는 종종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합니까? 저는 우리 시대의 교회의 자가평가 기준이 말할 수 없을 만큼 하락했다고 느낍니다. 전반적으로 이 시대의 한국교회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십니까? 여기에, 우리가 사도행전과 신약성경에 언급되는 교회들과 교회 역사를 살펴볼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교회의 영광스러웠던 순간들을 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85편을 우리의 기도로 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사를 열고, 과거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어주셨던 영광스러운 축복의 사건들을 살펴보십시오. 시인이 1-3절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께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라고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깊고도 충만하게 경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이 교회에 가득합니까? 주의 말씀은 과연 우리의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는 역사가 있습니까? 성령의 생기가 교회를 늘 새롭게 합니까? 우리가 사도행전 2장에서 보는 예루살렘교회의 특성들이 나타납니까? 우리의 주일 공예배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수요기도회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얼마나 깊은 영적 사귐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는 하늘의 기쁨이 충만합니까?
이 질문들에 대한 여러분의 답은 무엇입니까? 저와 함께, “아닙니다! 주님, 저희는 그런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그 큰 일을 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구하시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구합시다. 그러나 구하기 전에, 주께서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먼저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해주시기를 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는 천국을 맛보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렇게 이땅에 하나님 나라의 표지를 보여주는 교회가 되기를 구합시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회복되는 은혜를 입기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