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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6).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사람들

요한계시록 21:5-8, 히브리서 6:18-19, 로마서 8: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6-20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심으로써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그 성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아름다움 자체였습니다. 오래도록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은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은 사망과 애통함과 곡함과 아픔이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인 5-8절은 이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자들이 누구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1.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 (5-6a)
A. 말씀하시는 하나님 (5; 20:11; 1:8)
5절을 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우리는 20:11에서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았지만, ‘보좌에 앉으신 이’라는 표현이 요한계시록에서 거의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상고하는 중에 종종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난다’는 표현들을 보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경우이거나(16:1,17), 혹은 천사들의 음성일 수도 있다는 것도 압니다(10:4; 14:13; 18:4). 하지만 본문 5절에서처럼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한 것은 1:8 이후 처음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1:8).”
B.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5a)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요한이 다시 보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제까지 요한이 본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환상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비준해주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1-4절의 말씀을 요약하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쓰인 ‘새롭게’라는 단어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용한 단어,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καινός’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만물로부터 죄의 모든 흔적과 영향을 깨끗하게 지우시고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C.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5b; 사 65:16-17; 히 6:18-19; 살전 5:24; 히 10:32-39)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는 것은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말’도 단순히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말씀만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비준하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라는 말씀은 이사야 65:16-17로부터의 인유입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6–17).” 선지자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거듭 선포합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여기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감흥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일차 독자들이었던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어떤 감동을 주었을까요? 황제 숭배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고난과 재산을 빼앗김과 심지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정말 더 나은 결정인가를 물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닻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소망과 확신을 주었겠느냐는 말입니다. 만일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거짓 확신이나 오해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 죽음은 얼마나 어리석고 무가치한 죽음이겠습니까? 무슬림들이 성전(聖戰)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살 테러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은 죽음입니까?
어쩌면 내일이라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할지도 모르는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의 진리성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박해로 인한 배교가 심각하게 일어나던 교회를 향해 쓰여진 히브리서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히브리서 6:18–19).”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그가 하시는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다는 사실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니다. 바울 사도도 큰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4).”고 권면한 이유는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서, 히브리서 10:32-39을 들어봅시다. 히브리서를 쓴 사도의 메신저로 히브리서 사본을 들고 온 사람이 이제 그 공동체에서 히브리서를 읽어준다고 상상하면서 이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32–39).”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포함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참됨을 믿고 소망을 가지게 하시려는 은혜로운 배려입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어려움 속에서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의 약속(기록된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증언하는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1장 5항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증언에 감동되고 설득되어 성경을 고상하고 존귀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용의 천상적인 성격, 그 교리의 효능, 문체의 위엄, 모든 부분들의 일치, 전체의 의도(이것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에 대한 충분한 발견, 다른 많은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들 그리고 그것의 전체적인 완전성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풍성하게 증명하는 증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인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가슴 안에서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로 말미암는다.
D.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6a; 16:17; 요 19:30; 사 44:6; 48:12)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6절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이루었도다”라는 말씀을 봅니다. 일곱째 대적 심판에서 성전의 보좌에서 나는 음성이 “되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16:17). 현세의 악한 질서를 종결 짓는 사건들이 끝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 역사의 모든 사건—세상 멸망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을 포함하여—이 끝났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 성취와 완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큰 소리로 “다 이루었다”고 소리치시고 운명하셨습니다(요 19:30).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이고, 이후의 모든 역사 성취는 바로 주님의 구속적 죽음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앞에서 보았듯이(1:8, 17; 2:8),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멧의 첫 자음과 마지막 자음입니다. 이 두 자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의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사이에 어이지는 모든 시간과 사건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우연히 일어나고 흘러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입니다. 수천년의 인류 역사에서 그리고 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처음과 마지막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시간의 주인이시고 시간을 통제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시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늘 시간에 쫓겨서 초조함과 염려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여러분이 염려한다고 시간을 늘리거나 앞당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을 쥐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모든 시간 속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요한이 갑자기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이사야 44:6; 48:12).”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성경은 과거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성경의 예언들은 미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예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현재와 같은 환난의 시기에도 여전히 역사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1세기 말의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위로는 동일한 효력을 지닙니다.


2. 이기는 자 (6b-7)
A. 이기는 자가 받는 상속 (7; 12:11; 2:13; 롬 8:17; 창 17:7; 삼하 7:14)
자, 이제 우리는 드디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주민이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만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주민이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주님의 메시지(2-3장)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들을 보았습니다.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약속들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주민이 되는 것이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단장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도 혹은 믿는 자라고 하면 되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주로 ‘이기는 자’라고 표현했는데, 왜 이렇게 신자 혹은 성도의 특징을 묘사한 것일까요? 결국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사탄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를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이며, 우리를 미혹하고 압박하는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이라는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됩니까? 12:11에서 사도 요한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이기는 방식은, 짐승이 우리의 생명을 취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이깁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버가모에서 주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2:13).
7절에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받으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신실하고 참된 말씀입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리스도께서 상속받으시는 모든 것을 함께 상속받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이 상속의 영광을 언급하면서 로마의 성도들을 독려했던 말씀을 요한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7).”
여기서 다시 한 번 언약의 문장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3절은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했는데, 중요한 차이는 백성이 아들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는 자가 받아 누리는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복의 요약적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창 17:7)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것(삼하 7:14)을 종합적으로 성취하는 말씀입니다.
B.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약속 (6b; 사 55:11; 요 6:37)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좀 더 자비롭고 은혜롭고 편안하기 짝이 없는 말씀을 듣습니다. 6절에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는 ‘목마른 자’입니다. 이기는 자라고 해서 우리가 이르지 못할 엄청난 위인들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들은 위인 중의 위인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음을 인하여 그들이 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서 설명될 수 있는 위인이 있다면 그는 ‘이기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생명 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는 말씀은 ‘이기는 자’의 본질을 설명해줍니다. 이 말씀도, 이사야 선지자의 무한히 은혜로운 말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복음의 약속이 여기 있습니다. 복음의 약속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돈이 있어야 하거나, 많이 배워야 하거나, 도덕적이어야 하거나, 교양이 넘쳐야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리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 아닙니까? 굳이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목마름입니다. 복음은 단단한 식물이 아닙니다. 이가 튼튼하고 입안이 건강해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물에 비유하시지 않습니까? 물은 이가 없어도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입안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흘려 넘길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마시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목이 마르다면 말입니다.
목이 마르다면 와서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고 약속하십니다. 이 샘에 와서 누구든지 마음껏 마실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 자비롭고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도 주저하는 영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죄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자기가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가 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마치 별을 보고 싶어한 사람이, 망원경을 발견하고 나서는 망원경을 통해서 보지 않고 망원경 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러분이 기꺼이 은혜를 받으려고만 한다면 됩니다. 믿음의 입으로 은혜를 마시려고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원한 영광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3. 두려워하는 자 (8; 마 13:21; 딤후 4:10a; 마 8:26; 막 4:40; 계 14:5; 딛 1:16)
하지만, 오늘 본문은 부정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안 돼!”라고 첨언을 합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요한계시록 21:8).”
한 마디로 이들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는 연결되는 표현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거나 포기한 배교자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레고리 비일의 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언약공동체 안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더 이끌리고 박해에 직면했을 때 타협한 자들을 가리킨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가시적인 신앙 공동체 안에 있지만 세상과의 거룩한 싸움에서 후퇴하고 용기 있게 짐승과 맞서지 못하는 충성되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분명히 어느 지역교회에 속한 교인이지만(여러분이 벧샬롬교회의 교인인 것처럼) 인내하지 못하고 세상의 압력에 굴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결국 믿음을 떠나는 교인들입니다. 로버트 마운스의 말을 빌리면, “이들은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 보다는 개인적인 안정감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는 씨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들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마태복음 13:21).”들입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는 이런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 충분히 많이 말씀합니다(히 6:4-6; 10:26-31; 약 5:19-20; 벧후 2:20-21; 요일 2:19; 5:16). 데마는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디모데후서 4:10a).”
‘두려워하는 자들’ 뒤에 이어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주님께서 바다에 일어난 큰 풍랑을 보고 두려워했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셨고(마 8:26),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고 책망하셨을 때, 믿음과 두려움을 함께 언급하신 것과 유사합니다. 두려워하는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누릴 수 없는 자들의 목록에 맨 먼저 ‘두려워하는 자들’이라고 썼을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목록은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방인 불신자들의 특징이겠지만, 물론 가시적인 언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중에도 일부 있었을 것입니다. 흉악하다는 것은 가증스럽고 혐오스럽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가증한 것들의 어미’로 불린 큰 음녀에게 속한 특징이었습니다(17:4-5). 살인자라는 말은, 성도들을 죽인, 땅에 거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6:9; 9:21; 13:7,10,15; 17:6; 20:4). 음행은 니골라 당의 죄악이었고(2:14,20),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많은 신전에서 종교적으로 행해진 신전 매춘과 깊이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또 마술이 1세기 로마 세계의 삶에 필수적인 한 영역이었다는 점에서(행8:9-24; 13:8-11; 19:17-20; 계 9:21; 18:23; 22:15), 신자들도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영역이기도 했습니다. 우상숭배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경계한 죄요, 십계명이 명백하게 금하는 죄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만국의 죄의 심장부에 있는 것이 우상숭배였고(9:20; 22:15), 짐승이 세운 거짓 종교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13:4, 8, 12, 14-15; 19:20). 그리고 황제 숭배라는 일상의 맥락에서 범해질 수 있는 죄였습니다. 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고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을 받을 자들은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히 6:18).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의 특징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계 14:5)”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디도서 1:16).”들입니다. 이들은 거짓말로써 자신들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해 있음을 입증하는 자들입니다(요 8:44). 이런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고 참된 말씀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요 4:14; 시 107:4-5, 10, 23-25, 30; 시 55:22)
말씀을 맺기 전에, 여러분에게 드릴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기는 자입니까, 두려워하는 자입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목마름이 있습니까? 목마름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이 물을 마셔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지 마십시오. 이 샘에 나아와서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을 믿고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시는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요 4: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여 헤매며 주리고 목이 말라 영혼이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시 107:4-5). 또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일 때도 있습니다(시 107:10). 아니면 바다 같은 인생에서 큰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시 107:23-25). 이 모든 상황에서 여러분을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영혼의 닻 같은 소망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히 6:19). 그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됩니다. 그의 말씀은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107:30).”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보았던 모든 환상을 통하여 그것을 우리에게 확증해줍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않으십니다(시 55:22). 그러니 모든 영광을 삼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