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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2). 천년왕국B

요한계시록 20:4-6, 요한복음 11:25-26, 빌립보서 1:21-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5-23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어 천년왕국이라는 주제를 한 번 더 상고하려고 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셨고 쫓아내 멸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사탄을 잡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둔다는 의미입니다. 그 목적은 사탄이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기간은 천 년입니다. 천 년은 문자적 천 년이 아니라 긴 기간을 상징하고, 복음이 온 세상과 모든 열방에게 전파되는 시기, 즉 교회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에 사탄은 만국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미혹할 수 없으므로, 복음이 없는 곳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 때 사탄은 잠시 풀려나는데, 그것은 사탄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탄이 결박 당하여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있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복음 전파는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지만, 그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음녀인 큰 성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 또한 많은 대가와 희생을 요구하는 삶인 것은 자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을 지키다가 박해를 당하거나 믿음 때문에 순교를 해야하는 시대의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사탄이 결박 당하여 무저갱에 갇혀있는 그 천 년 기간에 일어나는 일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 주요 질문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요한이 본 보좌들은 하늘에 있는 것인가, 지상에 세워질 것인가? 둘째, 이 보좌에 앉아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셋째, 첫째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육체 부활인가, 영적 부활인가?


1. 보좌가 있는 곳 (계 4)
4절은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몇 개의 보좌인지 모르지만, 요한은 보좌(왕좌)들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좌’라는 단어가 47번 나오는데, 거의 전부 하늘에 있는 보좌를 가리킵니다. 사탄이나 짐승의 보좌를 가리키는 예외적 경우에만 지상에 있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2:13 사탄의 권좌—버가모교회; 13:2 용이 짐승에게 주는 보좌; 16:10 짐승의 왕좌). 자, 그럼 지금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보는 보좌는 사탄이나 짐승의 보좌가 아니기에, 요한은 지금 하늘의 광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장소는 요한이 처음 하늘 보좌의 환상을 보았던 바로 그 자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계 4).
그러나 천년왕국이 주님의 재림 후에 있을 것이라고 보는 많은 전천년설 주장자들은 이 보좌가 지상에 세워질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이론을 천년왕국을 언급하는 유일한 본문인 요한계시록 20장만 위에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요한계시록 전체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 하늘에서 요한이 본 보좌들에는 앉은 자들이 있다고 했는데 이 보좌에 앉은 그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2. 보좌에 앉은 이들 (계 6:9-10; 3:21; 히 10:34-37)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보좌에 앉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4절을 주의하여 읽어봅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요한계시록 20:4).”
요한이 본 사람들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보좌에 앉은 이들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첫번째 사람들이 순교자를 가리킨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들은 하늘에 있는 순교자의 영혼들입니다. ‘영혼(ψυχή)’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종종 사람의 전인(全人)을 의미하지만, 이 경우에는 죽어서 몸과 분리된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6:9-10에서 하늘의 제단 아래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기도하는 영혼들입니다. 그들은 주님 재림의 날에 일어나게 될 심판과 그때에 그들이 육체 부활을 통해 몸과 영혼이 결합되어 영화로운 구원이 완성될 날을 기다립니다. 본문에서 ‘목 베임’은 문자 그대로 목 베임으로 죽은 순교자들만을 가리키는 말이라기 보다, 순교를 의미하는 약식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순교자들은 신앙의 타협을 거부하고 믿음으로 인내한 교회의 대표자들이기도 합니다.
또 본문 4절은 두번째 그룹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순교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박해 속에서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신실한 성도들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자연사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환상에서 본 바, 보좌에 앉은 이들은 순교한 성도의 영혼들이고 또한 모든 박해 속에서도 인내하다가 믿음으로 죽은 성도의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 비일은 이들을 두 그룹의 신자들로 보기 보다, 순교자들을 대표로 하는 하나의 승리한 교회(천상의 교회)로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순교자들만이 아니라 짐승과 거짓 선지자 앞에서 비난과 따돌림, 투옥과 재산을 빼앗김, 그외 모든 부당하고 불편한 일을 겪고 감내한 성도들이 함께 공유됩니다. 순교를 했는가가 아니라, 믿음을 지키고 인내했는가가 핵심입니다. 이들이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보상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요한계시록 3:21).”
보좌에 앉은 이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은 성도의 영혼들이 심판을 행할 권세와 통치권을 모두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으로부터 억울하고 부당한 판단을 받아서 죽임과 손해를 입었던 성도들이 이제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의 권세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억울한 죽음을 죽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성도들을 옳다고 인정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4절 말씀이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실제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주의 말씀 때문에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얼마나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일차 독자들이었던 1세기 말의 성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 신앙 때문에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에는 문자 그대로 목 베임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했고, 사도들 중 첫번째 순교자 야고보도 참수를 당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바울도 네로 황제 치하에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고 사도들 중 요한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외에도 1세기 말의 성도들 중에는 황제 숭배를 거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계 2:13). 요한 자신과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순교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잠시 고난을 당할지라도 너희가 누릴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여라!” 하는 메시지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레온 모리스는 말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왕의 통치권과 승리를 얻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배교의 시대에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브리서 10:34–37).”
보좌에 앉은 이들이 순교한 영혼들과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죽은 신실한 성도의 영혼들이라는 해석은, 4절 하반절에 ‘살아서’라는 말과 5절과 6절에서 ‘첫째 부활’이 의미하는 바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첫째 부활 (요 11:25-26; 롬 6:4; 골 3:1-3; 엡 2:4-6; 빌 1:21-23; 고후 5:8; 눅 23:43)
4절 하반절에 ‘살아서’라는 말과 5-6절의 ‘첫째 부활’은,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무천년설의 해석을 따른다면 죽은 성도들의 영적 부활을 의미합니다. ‘살아서’라는 말의 용례를 보면(요 11:25; 계 13:14), 이것이 반드시 육체 부활만을 의미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부활’이라는 용어도 대부분 육체 부활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첫째 부활’이 주님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육체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고 육체로 부활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한 뒤에, 둘째 부활, 즉 불신-악인들의 육체 부활이 일어나고 이어 백보좌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육체 부활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한 악인들의 육체 부활 사이에는 천 년의 기간이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전천년설은 두 번의 부활을 말합니다. 본문에 대한 이 해석은 성경의 어떤 본문에서도 지지를 받기 어렵습니다. 이 본문만이 그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의 고전적 논거로 헨리 알포드의 말이 인용되곤 합니다. “두 부활이 언급된 한 본문에서, 만일 첫째 부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영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둘째 부활은 무덤에서 나오는 문자적인 부활을 의미한다면, 언어의 모든 의미는 사라지며 성경은 어떤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알포드가 말한 해석의 일반적 원리는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해석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주님은 믿음으로 당신과 연합하는 것은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부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신자들은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바울 사도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6:4).”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골로새서에서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로새서 3:1–3).” 신자들은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산 자들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표현이 에베소서에 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4–6).”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사도 요한은 ‘살아서’라는 표현과 ‘둘째 부활’이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이 말을 쓰는 것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 육체적으로(육체와 영혼의 분리) 죽은 성도들의 복됨(계 14:13)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공유하는 것이 모든 신자에게 속한 공통된 유익이라고 할지라도, 본문에 있는 요한의 환상에서 이 유익은 죽어서 하늘의 영광 가운데로 들어간 성도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신학적으로 ‘성도의 중간상태’라고 부릅니다. 성도가 죽고 나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성도는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명료하고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답을 얻을만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기는 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립보서 1:21–23).”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성도의 죽음이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뿐이 아닙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의 고백과 다르지 않은 고백입니다. 주님께서도 당신 옆에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언젠가 육체 부활을 하게 될 때 나와 함께 낙원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확언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살아서’라고 말하고 ‘첫째 부활’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말합니다. “첫째 부활은 완전하지 않지만 영원한 영적 부활을 시작하고, 이것은 나중에 영원히 더 큰 영적 형태로, 하지만 충분히 육적인 형태로 완성될 것이다.” 또 윌리엄 헨드릭슨의 말입니다. “여기서는 영혼이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천 년 동안 다스린다. 그후에 영혼은 더 이상 다스리지 않는다. 몸과 영혼이 다시 합하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 성도들이 다스리게 되는데 시간의 제한이 없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된다(계 22:5).”
그렇다면, 5절에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전천년설에 따르면, 첫째 부활은 성도들의 육체 부활이고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불신자들이고 그들은 천 년 후에 육체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부활입니다. 그러나 첫째 부활이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영적 부활을 의미한다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은 죽은 불신자들의 영혼들입니다. 이들 불신자의 영혼들은 죽음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부활 생명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고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천 년이 차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죽은 성도들과 함께 육체로 부활할 것입니다.
6절에서 우리는 그 부연설명을 만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요한계시록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은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14절 설명대로, 육체로 부활한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못 곧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게 아닙니다. 둘째 사망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믿는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기에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된 것은 이것만은 아닙니다.


4.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왕 노릇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주님의 재림까지 하늘에 베푸신 보좌에 앉아서 무엇을 합니까? 그들의 영혼은 부활의 생명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천년왕국입니다. 정리하면, 천년왕국은 순교자들과 주안에서 죽은 신실한 성도들의 영혼 즉 천상의 승리한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의 생명을 누리면서 교회의 시대, 복음의 시기인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육체 부활, 그리고 악인들을 향한 최후의 심판과 성도들의 영원한 영광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이 왕 노릇은 무엇보다 영적 통치입니다. 죽은 성도들이 아직 몸으로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승리한 교회 성도들은 영광 중에 보좌에 앉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참여할 것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흠 없는 제사장으로 섬길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승리에 놀랍게 참여합니다. 이 다스림은 죽은 성도들이 언젠가 미래에 가질 영광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누리는 실재입니다. 이 메시지가 왜 중요합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적 교훈입니다.


5. 교훈과 적용 (2:10,13; 고후 4:17-18; 롬 8:18)
요한계시록의 첫 독자들을 생각하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얼마 전 순교한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안디바가 있었습니다(2:13). 그는 주님의 충성된 증인으로서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성도들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그 영광의 승리를 누리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안디바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박해가 끊이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살다가 최근에 죽은 성도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장차 받을 고난을 말씀하시면서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10). 그러나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은 성도는 죽어서 천 년 동안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7–18).” 또 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는 눈 앞의 영광에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과 함께 그 순간 살아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알고 원합니다. 성도는 죽어도 영광이고 망해도 영광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확증해줍니다. 죽은 성도들은 천 년의 기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영광을 누리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들은 육체로 부활하여 영화로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이것을 믿으십니까?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면 루비 켄드릭(Ruby Rachael Kendrick, 1883-1908) 선교사의 무덤을 불 수 있습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인상적인 묘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녀가 임종하기 한 달 전 자신을 파송한 미국감리교 선교부에 보낸 편지의 한 글귀입니다.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한국을 위해 모두 바칠 것입니다(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그녀는 1907년 24세 처녀로 한국(대한제국)에 와서 9개월 만에 맹장염으로 25세의 짧은 삶을마치고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기 일주일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을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돌아올 집이 있고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떠난다면 십자가는 없는 것이겠지요.”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온 루비는 개성에서 언어를 공부하는 중 폐렴에 걸린 아주 어린 한국 고아 소녀를 맡아 헌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소녀는 위기를 넘겼지만 혼신을 다했던 그녀는 급속도로 쇠약해지면서 맹장염에 걸렸고 세브란스에서 수술을 하였지만 회복을 하지 못하고 결국 1908년 6월 19일 25세의 짧은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녀가 임종하기 한 달 전쯤, 자신을 파송한 감리교 선교부에 보낸 편지의 일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선교사의 삶을 누리는 기쁨이 이렇게 큰데 그것을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있으라고 한 곳에 있는 것과 비교할 만한 더 기쁜 삶은 없을 거예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지요. “치러야 할 희생은요?” 맞아요. 저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겪는 희생은 너무 많고 크지요. 하지만 지금 그것은 어디에 있나요? 주님이 주시는 보상에 비하면 그것들은 너무나 작고 사소하답니다. 제가 잠시라도 머뭇거린 것이 얼마나 창피한지요. 선교회 여러분, 만약 주님께서 당신을 추수의 현장으로 부르신다면,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빨리, 기쁘게 그리고 온 마음으로 응답하세요. 여러분이 열 명씩, 스무 명씩 이곳으로 와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한국을 위해 모두 바칠 것입니다.” (1908년 5월 11일 송도에서)
여러분은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인생이 어리석은 인생 처럼 보이십니까? 오늘 주의 말씀이 진리라면, 저는 그녀처럼 지혜로운 사람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혜롭게 하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