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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8). 기독교 사건

사도행전 4:1-22, 누가복음 21:12-15, 시편 118: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0-16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의 치유 사건 때문에 결국 두 사도가 예수님을 심문하여 십자가로 이끌었던 바로 그 공회(산헤드린)에서 어떻게 예수의 증인으로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때 배워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요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치유 사건을 계기로 그 치유를 가능하게 하신 분,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은 불가피하게 정죄를 수반합니다. 율법의 정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복음 증거가 정죄를 수반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 정죄를 인정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어찌할꼬?”하면서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께서 죄인을 유효한 부르심으로 부르실 때, 죄인은 그 부르심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본문 4절은 남자의 수가 약 오천명이나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놀라운 결과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공동체는 거의 1만명에 이르는 공동체가 되고 있었습니다. 하워드 마샬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인구는 25,000명 또는 거기서 열 배까지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고대의 도시의 인구가 2십 5만명까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25,000명 정도라면 거의 절반의 인구가 복음에 반응하고 교회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까? 어떤 학자는 이 숫자가 허황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18세기의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이 설교를 했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한다면, 이것을 합리적 추정만으로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호의적 반응은 뒤에서 보듯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없도록 영향을 줄 정도였습니다(21).
베드로의 설교에 이처럼 많은 구원의 열매가 있었지만, 복음은 모두에게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1절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많이 일어났던 일입니다. 누가복음 20:1입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누가복음 20:1).” 이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중단시켰듯이, 베드로의 설교도 중단시켰습니다. 사실, 1절에서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설교를 한 사람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요한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절에 ‘이르러’라는 말과 누가복음 20:1에 ‘가까이 와서’는 헬라어로 같은 단어인데, ‘기습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들은 불을 끄고자 하는 자(소방수)들처럼 아주 급하게 몰려왔음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제사장들은 성전과 제사에 관한 책임자들입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 경찰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로 서열상 대제사장의 다음 위치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관료층을 구성하는 제사장 문중에 속한 사람들로 산헤드린 공회의 다수파였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율법과 경건에 대하여 바리새인 만큼 몰두하지 않는, 정치적 이해관계까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불을 끄려고 했는지는 명확합니다. 2절에 의하면, 그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가르침이 싫었습니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종말의 부활을 믿었던 바리새인들에게도 싫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싫어하여’라는 이 말은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복음과 주의 말씀에 대하여 보이는 반응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냥 싫은 것입니다. 어렵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차원이 아닙니다. 오병이어로 배불린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돌아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자 그들은 ‘어렵도다’라고 반응을 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주님이 정곡을 찌르시지요.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 6:60-61)?” 그들은 오병이어는 좋았지만 복음은 싫었습니다. 이들과 공회원들의 차이는 권력의 유무입니다. 권력이 없는 이들은 예수님과 말씀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설교를 중단시켰고 중단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결국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둡니다. 14절에 병 나은 사람이 사도들과 함께 있었다는 말씀으로 보아 그 사람도 가두었을 것입니다. 이미 날이 저물었을 때였으므로, 공회를 소집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밤에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누가복음 21:12–15).”
주님께서 미리 이런 말씀을 해주신 이유를 그들이 알고 이해했을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4절은 이들의 방해 작업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남자 오천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어떤 방해도 복음을 가둘 수 없습니다. 지난 이천년의 교회 역사가 보여주고 증명하는 바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린도후서 2:16).”
동일한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생명을, 어떤 이에게는 죽음을 준다는 이 사실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여기에는 배우고 못 배우고, 가지고 못 가지고의 차이가 없습니다. 불신앙의 문제는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역사의 마지막까지 그럴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을 홍해가 갈라지듯, 둘로 가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두번째로 살펴볼 명제는 기독교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공회는 두 사도를 불러놓고 설명을 요구합니다. 먼저 공회를 구성하는 자들의 면면을 보지요. 그들은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입니다(5). 관리들은 6절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문중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성전 맡은 자, 전임 제사장들을 포함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장로들은 주로 사두개파를 지지하는 주요 귀족의 수장격인 원로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들로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공회원 중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은 장로 그룹에 속했을 것이고, 니고데모는 서기관 그룹에 속했을 것입니다. 6절에는 대제사장 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데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였고(주후 15-36년 재위), 그의 장인 안나스가 전임자였지만(주후 6-15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아마 가야바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주후 36-37년)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을 가리킬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 예수님을 심문하였듯이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
‘이 일’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나은 일을 말합니다. 공회원들이 말한 ‘이 일’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베드로는 공손하게 고회원들을 부르면서 답변을 시작합니다. (우리 말 번역은 반말투로 되었으나 베드로는 사실 공회 앞에서 매우 예의있게 말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 일’에 주목하여 말합니다. 9절입니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9).”베드로는 ‘착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40세된 사람이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했는데 완전한 치유를 받아 걷고 뛰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경축해야 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공회원들의 마음은 이미 굳어질대로 굳어져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 자기 권리를 지키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들 외에 자신들의 관심을 쏟을 대상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이 착한 일 때문에 구금되었고 심문을 받고 있다는 말로써, 그들의 양심을 찌르지만 그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죄인의 마음은 이렇게 굳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말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그 사람의 치유를 구원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실상 그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은 치유 이상의 사건, 즉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16절에서 공회원들이 스스로 말하듯이, 이 사건은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설명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그리고 공회원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들입니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공회가 온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에 관해서는 돌려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베드로는 자신이 목격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복음은 걷지 못하던 사람을 치유한 사건으로 그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베드로는 시편 118:22을 인용하지요.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 사도들을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던 공회원들을 놀라게 한 대목일 것입니다(13). 이스라엘의 건축에서 모퉁잇돌은 깎아 만든 정사각형 돌로 건축물이 시작되는 가장 먼(가장 앞쪽의) 모퉁이의 기초에 두어 건축물의 위치와 방향을 확실하게 결정하는 돌을 의미합니다. 현대 건축과 달리 모퉁잇돌은 땅속 깊이 파묻지 않았기에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건축자가 벽을 세우는 과정에서 그 돌이 특정한 위치에 놓기에 적절하지 못하거나 크기가 맞지 않을 경우, 그 돌을 버리게 되는데, 그 버린 돌을 다른 건축자가 모통잇돌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사용할 수 있는데, 이 구절은 바로 이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돌을 버린 책임이 이스라엘의 대표인 공회원들에게 있다고 베드로는 다시 그들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짓고 계시는 새 집—영적 성전인 교회를 이해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짓고 있는 집—이스라엘과 다윗 왕국—을 짓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버린 돌이 새로운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돌이 된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과감하고도 배타적인 선언을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12).”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다시 사신 사건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이론이나 관념이 아닌 사건입니다. 죄인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유일한 구주가 되셨습니다. 인간이 구원얻을 다른 이름, 다른 길은 주어진 바 없습니다. 여기에 현대 다원주의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기독교가 사건이라는 것은 공회에서 말하는 베드로와 요한 자신들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공회원들이 주목한 것은 사도들의 ‘담대함’이었습니다(13). 담대함은 일반적으로 로마 사회에서 자기 의견을 거침 없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유민의 특성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함은 말하는 내용의 진실성을 담보한다고 여겼습니다. 공회원들이 ‘학문 없는 범인’인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구약 시편을 즉석에서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도들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병 나은 그 사람이 하나의 증거로서 현장에 있었으니, 공회원들은 비난할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공회원들은 예수님과 논쟁을 해서 이길 수 없었던 그전의 사건들을 회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전율하도록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누가복음 21:15).”
결국 비난할 명분을 찾을 수 없었던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퇴정시키고 나서 자기들끼리 논의를 했습니다. 16-17절입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16-17).” 이미 어제의 치유 사건은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바 되었고 사건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습니다. 다만 더 이상 이 사건과 예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들은 진실과 사실에 접근할 생각이 애당초 없습니다. 인간의 불신이라는 것은 이렇게 어리석은 자리로 인도합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고, 진실과 사실을 묻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사회의 각 영역에서 보는 바가 아닙니까?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결정사항을 통보고하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두 사도는 담대함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 도대체 이런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는 과연 이런 담대함을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에게 그렇게 했듯이, 자신들의 목숨이 공회원들에게 달려 있지 않았습니까? 두 사도는 공회의 결정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담대하게 거부했습니다. 공회는 두 학문없는 범인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 때문에’ 사도들을 처벌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사도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위협하고 석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누가는 병 나은 사람이 나이 40세가 된 사람이라고 덧붙임으로써 도장 찍듯이 치유 사건의 확실성을 확정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공회 앞에서 그들은 주눅이 들지 않았고 담대히 할 말을 했고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본문이 주는 열쇠는 8절에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베드로와 요한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해야 할 말을 조리있게 하게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입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2:11–12).”
기독교는 사건인데 세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사건입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의 치유 사건이 그렇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그러하며,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드러낸 변화가 그렇습니다. 이는 모두 합리적 설명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는 초자연적 사건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여러분에게 기독교는 일어난 사건입니까? 그 사건은 초자연적이기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습니다. 그 똑똑한 공회원들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독교가 지난 이천년 동안 그 많은 반대와 저항, 박해와 공격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만일 기독교가 하나의 관점이고 견해이며 가르침이었다면 진작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기독교를 미워합니까? 본문에서 보는 공회원들이 기독교를 미워한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기독교는 이성으로 납득되거나 설명될 수는 없지만, 명백하게 부인할 수 없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사건이기에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초자연적 사건들입니다. 그 일이 여러분의 삶에도 일어났습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를 세상을 향해 보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메신저가 곧 메시지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입으로만 증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삶의 변화를 통해서 예수 이름의 능력을 증거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 삶에 작용한 힘입니다. 그 힘은 내 본성을 거스릅니다. 학문 없는 범인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말하게 하는 힘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기독교는 내가 동의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임하셔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새로 낳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전혀 새로운 삶입니다. 기독교는 베드로와 요한을 변화시켰듯이 사람을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고, 그 메시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입니다. 그 능력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게 합니다(20). 이점에서 그리스도인은 힘 있는 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보여준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