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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4).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2:37-41, 고린도전서 12:13, 요한복음 14: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9-11

말씀내용
교회가 초자연적 공동체라는 것은, 교회가 자연적 요인들로 설명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교회는 뛰어난 사람들의 지혜나 리더십 같은 자연적 요인들로 세워지는 모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로 갈릴리 사람들로 구성된 초기 길따름이들이 어떻게 3천명의 길따름이들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그 많은 사람들의 경이로운 헌신과 놀라운 결속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 본문은 교회가 자연적 요인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모임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이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의 회원이 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는 종교나 제도, 건물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 중심에 주님이 계신 살아있는 영혼들로 구성됩니다. 그들은 최초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이었고, 역사 속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이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된 사람들입니다.


1. 그들은 설교를 들었다! (37; 시 51:17)
신약 교회의 탄생을 설명하는 결정적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최초의 길따름이들은 예루살렘에 모인 대중(그들 다수는 여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이 자기들의 난곳 방언으로 듣게 된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구약 성경, 특히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으며, 이 사건은 사람들이 못박아 죽인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며 주 하나님 자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메시지는 모호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명쾌한 메시지였고, 청중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배려에 배려를 더한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 아침에 예루살렘에 모인 예루살렘 주민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귀를 울렸고 마음을 찌르는 너무나 강렬한 설교였고 그들은 이 메시지 앞에서 자신들이 피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은 대중의 반응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였습니다(37). 설교는 이런 것입니다. 설교는 단순한 강연이 아닙니다. 또 그룹 성경공부도 아닙니다. 설교는 설교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설교라는 이 미련해 보이는 방편을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초자연적 수단입니다. 제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친구가 다니는 새문안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들을 때, 뿌리칠 수 없는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을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 깊은 사랑 앞에서 저는 정말 “어찌할꼬”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대학에 입학하던 해, 마틴 로이드존스의 설교를 읽기 시작하면서 설교가 이런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놀랐던 일을 기억합니다. 이후 20대 청년 시절, 조지 휫필드의 전기를 읽고 받았던 충격도 잊을 수 없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하나님께서 2억이 넘는 그 땅에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들을 몇 사람만 일으켜 주시면 그 나라를 복음으로 뒤흔들 수 있으니 그런 사람을 저의 제자들 가운데 일으켜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었습니다. 저는 설교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고, 설교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먹이사 거룩하게 하심을 믿습니다. 목사로서 제가 하는 일들의 필요가 다 중요하지만, 지금 제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 일을 위해서 제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저는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설교자인 제 눈에 눈물이 터지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런 설교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아픔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데, 팔짱 끼고 앉아서 들을 수 있다니요? 사람들은 “아, 오늘 설교는 좋은 깨달음을 주었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설교)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다윗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는데(시 51:17), 이들이 이르게 된 마음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참한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구원을 갈망했으며, 절박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자리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물론 설교의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때로는 오순절과 같이 큰 무리가 회심을 하는 것으로 설교의 열매가 나타났지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설교자를 조롱했고 심지어 대적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그들의 권능 있는 설교에 언제나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처럼 반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슬픈 현실은, 설교가 회심이거나 반대로 조롱과 대적함의 어떤 반응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어쩌면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아닙니까?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상고하는 우리가 설교를 통하여 이런 영광스러운 은혜의 역사가 임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마음이 아닙니까?


2. 구원에 필요한 것들 (38-41; 고전 12:13; 요 14:12)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37),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대답합니다(38). 이 말에는 죄인의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핵심적 요소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을 고쳐 먹고 앞으로 도덕적 삶을 살라고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말에는, 회개, 세례, 죄사함, 성령의 선물이라는 요소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두 가지 명령과 그렇게 하면 죄 사함을 받게 되고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두 가지 약속입니다. 먼저 오해하지 말 것은, 베드로가 여기서 개인 구원의 단계를 설명하거나 구원의 모든 요소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령, 죄사함은 세례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례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세례는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공적으로 인치는 표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백성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가담한 죄를 회개해야 했습니다. 어떤 죄인도 회개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했고 그 죄를 슬퍼했으며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회개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삶에서 늘 일어나고 있습니까? 제가 거듭 강조하듯이,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인생에 일어나는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입니다. 회개 없는 죄사함은 없습니다. 죄사함의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사실에 있지만, 회개를 통해서 그 죄사함과 구속의 효력이 죄인에게 주어집니다. 죄사함은 회개를 통해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회개가 죄에 대한 돌이킴이라면 믿음은 그리스도께만 죄사함이 달려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을 한 단어로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세례는 그들이 회개했고 죄사함을 받은 것에 대한 표입니다. 신자는 세례의 표로서 공적으로 교회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 요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세례가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행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유대인인 사람들에게 세례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날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 앞에서 태생적 유대인으로서의 자기들의 의로움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이 설교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들은 것은 베드로의 명강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설교가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끝으로 말한 것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지 않는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날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온 3천명의 사람들에게 그날 아침 120명의 첫 길따름이들에게 일어났던 현상이 다시 발생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가시적 현상이 일어났는가를 누가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베드로의 말대로,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이것이 그들이 받은 성령 세례입니다. 그들은 참된 회심과 세례를 통하여,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진 저수지인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시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된 것입니다(고전 12:13).
여기서 성령의 선물(gift)과 성령의 은사들(gifts)은 구분해야 합니다. F.F.브루스의 설명입니다. “성령의 선물은 높아지신 주님이 아버지의 권위 아래서 주시는 성령 자신이지만, 성령의 은사들은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영적 재능이다.” 낯선 언어를 말한다든지 하는 어떤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죄인이 구원받은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복음 앞에서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했고 참된 신앙의 고백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가 삶과 성품에서 맺는 열매를 통해서 드러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는 약속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도 말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9).” 여기서 ‘너희’는 유대인이고 ‘너희 자녀’는 단순히 청중의 어린 자녀들이 아니라 유대인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먼 데 사람’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성령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가 시간적으로는 청중의 모든 후손들에게 미칠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온 세상에 미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이 부르심은 우리가 교리 공부에서 배운 바, 성령의 부르심이고 유효한 부르심, 저항할 수 없는 부르심을 가리킵니다.
사실, 베드로의 설교는 36절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청중의 탄식어린 외침 때문에 중단된 것이었습니다. 40절에 보면 베드로는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거부한 사실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영광 받으신 메시아요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41).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3년 동안에 보지 못한 큰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기는 했지만, 그들 중 다수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걸림이 되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아마 베드로와 사도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저녁 그들에게 하셨던 이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한복음 14:12).”


3.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이 본문에 근거하여 조금 더 생각을 해봅시다. 이 삼천 명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어떤 교리를 믿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들이 뭔가를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말을 들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란 그들에게 무언가가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기독교를 자기의 종교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행해지는 그 무엇이고, 여러분에게 일어난 어떤 일로 설명됩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셨고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은 청중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청중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탄식을 터뜨렸습니다. 성령님께서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죄를 책망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이 그들 자신과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중립적인 구경꾼이나 객관적 입장을 취하는 방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자 그들은 이것을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저 지적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자신들의 영혼이 큰 곤경에 처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덧 없는 세상의 것들에 매여 살아온 것을 깊이 후회하고, 그에 대한 형벌을 받아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흔들어 놓는 어떤 일이 일어난 사람들,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의 회심은 그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자신들의 구주와 주님이 되심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형편 없는 죄인이며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회심은 교회 공동체의 삶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회심의 결과가 어떤 방식으로 그들 공동체의 삶에서 나타났는지는 다음 주일에 살펴볼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해서 부인할 수 없고, 다른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지요. 왜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복음이 목숨을 던질 만큼 강력하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과 복음과 기독교와 교회는 너무나 많은 신자들에게(그들 스스로가 고백하는 바에 따라) 인생의 최우선순위에 들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문제는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이 곤경에 대한 인식 그리고 탄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출발하여 회심의 과정에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는 일을 ‘제대로’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질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행전 2:42-47에 기록된 초기 교회의 삶에 대한 말씀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37-41절을 건너뛰고 42-47절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초자연적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회원은 초자연적인 성령님의 역사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초자연적 사건이 일어난 사람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무언가가 그들 안에 일어났고, 이후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보다 더 높고 고상하고 귀하고 값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뀌었고, 주변의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돈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바뀐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의 전 존재를 흔들어 바꾸시는 일을 그들에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당에 가서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는 것이 이 땅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거듭났는지, 회심을 했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전에 교회를 다녔었고, 또 그전 교회에서 집사를 했다는 사실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인정해줍니다. 교회는 이렇게 스스로의 초자연적 본질을 훼손해갑니다. 여기서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초자연적 삶이 발생하거나 형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37-41절을 건너뛰고 42-47절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이제 정말 중요한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에게는 그 초자연적인 어떤 일이 일어났었습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탄식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 탄식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의 덧없음에 매여 살아왔음을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까? 그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살아온 죄에 대한 깊은 깨우침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그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영원한 지옥의 형벌 가운데 죽어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고 인정했습니까? 참된 회심의 열매가 있습니까?
아무도 스스로 결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어떤 일을 일으켜 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그리스도인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지속적으로 빚어내시는 열매가 존재합니다. 과연 그 열매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교인명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어떤 일들도 아닙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에게서,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시겠지만, 한 번도 이런 탄식이 있었던 적이 없는 분들이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번도 세상의 헛된 것을 따라 살아가고 돈을 위해 살며 세상이 주는 것들을 우상으로 섬겨 살았던 죄를 깊이 인식하고 회개한 적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했듯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탄식하는 여러분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구주와 주가 되심과 그분께 여러분의 구원이 달려 있음을 알고 주님을 업신여긴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주를 의지할 때, 죄사함을 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된 초자연적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는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바, 초자연적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벧샬롬교회에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주님의 교회에 그런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