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성경장절분류 > 사도행전 강해 - (1). 예수의 증인들

추천설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사도행전 강해 - (1). 예수의 증인들

사도행전 1:1-14, 누가복음 1:3-4, 누가복음 24:44-4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8-21

말씀내용
오늘부터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합니다. 구절 구절을 자세히 다루기 보다 말씀 전체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교회의 정체성과 교회의 사명이라는 두 핵심 주제에 관하여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약 50일이 지나 인류 역사에 신약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소수의 평범한 사람들로 시작한 이 신흥 교회 운동은 유대인과 로마제국의 극렬한 탄압 속에서도 폭발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성장하여 결국 4세기에는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을 받고 4세기 말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렇게 생명력이 끊어지지 않고 들불 같이 번져간 운동이 있습니까? 그것도 극렬한 박해와 탄압 속에서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질문은 또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왜 그토록 제 자리 걸음도 모자라서 뒷걸음질을 치는 것일까요?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는 초기 교회의 기원과 처음 30여년의 확장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교회에 대한 고민과 질문이 적지 않습니다. 한동안 “이게 나라인가?”하는 말이 있었듯이, “이게 교회인가?”라고 물으면서 하나님이나 신앙을 버렸다고 하지는 않으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교회를 판단하는 올바른 기준과 성경적 관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교회의 본질을 엿볼 수 있고 그런 기준과 관점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관심을 교회로 모으게 하십니다. 특별히, 교회의 정체성과 교회의 사명입니다. 정체성과 사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온데 간데 없는데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고, 교회의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거나 병든 교회일 것입니다. 이제 출발하지요.


1. 저자와 수신자 (1; 몬 1:24; 딤후 4:11; 골 4:14; 눅 1:3-4; 행 23:26; 26:25)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속편 혹은 후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내가 먼저 쓴 글’이라고 한 것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사도행전을 쓴 사람은 누가복음의 저자요, 바울의 동역자였고(몬 1:24; 딤후 4:11) 사랑받는 의사였던 누가입니다(골 4:14). 비록 본문에서 누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1-2세기의 교회는 누가복음을 쓴 누가가 사도행전의 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우리가 이것을 부정할 근거와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함께 직접적으로 데오빌로라는 인물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우리는 그가 실존 인물인지 아니면 누가가 상징적으로 설정한 가상의 인물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가가 데오빌로를 ‘각하’라고 부른 것을 보면(눅 1:3) 그가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이 칭호가 유대에 와있던 로마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에게 붙여졌던 칭호였음을 고려하면(행 23:26; 26:25), 그는 로마 사회에서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말씀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었는데(눅 1:4) 어쩌면 교회에 가해지는 압력으로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의 믿음을 붙들어주려는 의도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는 추정도 가능합니다. 성령께서는 누가의 의도를 사용하셔서, 누가가 이 책을 쓸 때에 전적인 영감을 주셔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무오한 성경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이 말씀을 살피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복음과 교회에 대한 확신에 이르는 은혜를 주시길 간구합니다.


2.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이야기다 (1-2)
누가는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1-2절에서 이렇게 씁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자신이 누가복음에서 쓴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를 시작하신 모든 일’입니다. 행위와 말씀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누가는 충실하게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령하시고 승천하셨는데 그때까지의 일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주님의 승천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 이어지는 속편인, 사도행전은 누구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사도들의 행적들’이란 뜻을 가지는 이 책의 제목은 그 주인공이 사도들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지상 행적을 소개한다면, 사도행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여전히 당신의 거룩한 일을 이 땅에서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말은 삼위 하나님이 그 중심에 계시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부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를 통하여 땅끝까지 전파되게 하시고 또 그 열매로 모든 민족 가운데 교회가 세워지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3. 증인들을 준비시키시는 예수님
그렇다면,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 이 말씀 속에서 눈에 보이는 베드로나 바울 사도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누가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하신 일은 사도들을 당신의 증인으로 준비시키는 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A. 확실한 많은 증거들 (3,8)
먼저 3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본문은 ‘고난 받으신 후에’라고 말함으로써 죽으심을 더 강조하려는 듯 합니다) 40일 동안 거듭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이 사실임을 ‘확실한 많은 증거’로 나타내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증거’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여기서만 한 번 사용된 단어인데, 설득력 있고 의심할 여지 없는 방식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부활을 절대 의심할 수 없도록 자주 분명하게 부활하신 당신의 육체를 보여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확실한 많은 증거’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까? 당신의 부활을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왜 필요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부인할 없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8절에서 주님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확실한 많은 증거로 증인의 일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부활하신 그분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B. 성령의 권능 (4,5,8; 눅 24:49)
하지만,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4).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4:49에서 누가는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능력,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사도들은 바로 얼마 전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겁쟁이들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확실한 많은 증거가 있다고 한들, 이 겁쟁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가 약속하신 그 능력을 입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이 인간적 용기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까? 더구나 기독교를 대적하는 상황이거나 그 증거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현저하고도 치명적인 불이익이 주어진다고 할 때에도 우리는 그저 선천적 용기 정도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좀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말했다시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5). 이것을 말그대로 이해한다면, 요한의 물세례에서 죄인이 물에 잠겼듯이, 이제 사도들은 성령에 잠기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논란이 적지 않습니다마는,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가 2장에서 보게 될 오순절 성령강림을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은 권능을 받을 것이고, 이 권능으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8). 그리고 우리는 사도행전 전체의 이야기에서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C. 하나님 나라의 일 (3,6,7; 눅 24:44-45; 시 2:12; 행 2:23)
그러나 여기서 누가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나타나 당신의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기만 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3절은 그 가르침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예수님에 관한 모든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눅 24:44-45).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로써 온 우주의 왕으로 선포되셨고, 시편에 이른대로 누구든지 그분 앞에 복종하고 입맞추지 않는다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편 2:12).”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아야 했지만 6절에 기록된 사도들의 질문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들이 꿈꾸는 나라는 재물과 산해진미와 외적 평화를 비롯해서 모든 좋은 것들이 넘치는 땅의 나라였습니다. 번영신학이 주는 모든 메시지가 다 하나님 나라의 일과는 무관한 것들이 아닙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특별히 이런 오해가 가득합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지도자가 메시아라도 되는 양, 그리고 마치 대한민국을 정치로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수 있는 양 여기고 광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 안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무지를 드러내고 그들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일과 무관한 우상 숭배일 뿐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오로지 이 세상 일에만 몰두하고 이 세상에서 복을 구하려고 하며 이 복만을 궁극적 선으로 여기려는 경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칼빈은 이런 삶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에서 유배당한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치지 않으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교정하여 주십니다. 복음의 말씀을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바라보게 해주십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붙잡힌 우리의 모든 성향을 고치시고 바로 잡으시며 우리 육신의 악을 제거하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증인으로 불러내십니다.
주님은 장래의 결과가 어떨 것인지에 따라 미리 대비하고 계획하는 우리의 성향을 거두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대답입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7).” 우리는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들과 관련해서 당신의 주권적 권한을 행사하시는 것을 수긍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당신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행하기를 기뻐하십니다(행 2:23).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알고 거기에 몰두하는 일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나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승천 (9-14)
이렇게 부활 후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나타나셨고 당신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위임하신 예수님은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사도들은 마냥 하늘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 이것은 여전히 육신의 감각으로 그리스도를 보려고 하늘만 쳐다 보는 것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이제 승천하신 예수님은 전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영으로 사도들과 함께 계시고 권능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유하던 다락에 모입니다. 여기에는 열 한 사도 외에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중에 야고보와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던 다수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녀들 중에는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이제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그들에게 부어주실 것이고 친히 말씀하신대로 그 평범한 겁쟁이들을 당신의 담대한 증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마 6:33)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탄생할 교회를 통해서 당신이 이 땅에서 하실 일들을 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롬 12:4-5).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회인 당신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여전히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에서 자연스레 교회의 사명이 나옵니다. 그것은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8).
우리가 보았듯이, 예수님의 증인은 자기 의지나 타고난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증인이 되려면 그 분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사도들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확실한 많은 증거를 가졌던 사도들의 거짓 없는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주관적 체험에 근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친히 목격한 그분을 성경의 증거들을 통하여 믿음으로 봅니다. 기독교는 역사 상에 일어난 일이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그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위로부터의 권능을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권능을 잃어버렸고 교회들은 금권 외에는 어떤 능력도 알지 못하는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칼빈의 말입니다. “사령관의 명령 없이는 전투를 개시할 수 없는 것이 병법의 기본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공격 개시 신호를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함부로 싸움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명하신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돈과 지식과 세상적 힘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네, 물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라면, 열심히 여러분의 노력과 능력으로 살면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절박하게 그 권능을 구해야 합니다.
세번째 예수님의 증인의 조건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고 거기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여러분이 감당하는 직업이나 일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예수님의 증인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영위하기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그는 범사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사람입니다(마 6:33). 예수님의 증인이 가지는 삶의 최우선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증인입니까?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초기교회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단순히 교인이 아닌 예수님의 증인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예수의 증인들이 그들의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2세기에 접어들면서 ‘증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마르튀스(μάρτυς)는 순교자라는 새로운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 단어에서 순교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martyr가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평범한 소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통해 세상을 흔들기 시작하시는 역사를 사도행전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덕이나 철학 또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물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에 실존하셨던 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증인도 아니었고 예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아침에 교회당에 와 앉아있다는 것이 보장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지옥의 형벌에서 건져 주시기 위하여, 영원에서 나와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그분이 필요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께 엎드려 굴복하십시오. 세상의 학문, 철학, 사상, 재물, 명예,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주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제 인생이 헛되고 저는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는 비참한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구하기만 하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났고 구원의 은혜를 입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교회당에 일주일에 한 번씩 출석하는 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일평생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존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말씀 속에서 만나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자신을 드리며, 성령의 권능을 입어 예수님의 신실한 증인으로 살겠노라고 응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