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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2). 내 마음에 둔 주의 말씀

시편 119:9-16, 요한복음 17: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3-23

말씀내용
119편의 2연(9-16절)은 히브리어의 두번째 알파벳 ‘베이트(ב)’로 시작하는 구절들입니다. 베이트는 생긴 모양대로 집을 의미하는데, 2연의 내용도 역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집이 되게 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고 허버트 로키어(Herbert Lockyer)는 설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내 마음에 둔 주의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의 집이 무엇으로 채워지는가는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요소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다면, 그 집은 온갖 정욕과 탐욕, 교만과 자기애 같은 더럽고 악한 생각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것들을 쫓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 시인의 고민이 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9a)?” 본문에 드러난 대답은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의 집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1. 성도의 고민과 질문(9)
먼저 9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깊은 질문을 통해, 성도들이 가지는 고민, 성도들의 질문을 대변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9).” 성도가 어떻게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행실은 삶의 모든 행동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사실, 행실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들일 뿐입니다. 대답은 주의 말씀에 헌신하는 것, 그 말씀만을 지키는 것입니다. 119편 전체가 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배우고(12), 그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일(14-16)입니다. 이것을 시인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표현합니다(11).
문제는, 이 질문이 과연 내가 가진 질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청년이 아닐지라도 상관없습니다. “무엇으로 제가 저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이것이 진정 여러분의 고민이고 질문입니까? 우리의 시선과 관심과 마음을 끄는 것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 질문을 가지고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식 투자를 더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애들이 좋은 교육을 받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이 훨씬 더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현실적인 질문들 아닙니까? 그래서 이 질문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집이 이미 세상의 온갖 관심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우리 마음의 집을 정결하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시인의 이 질문이 곧 나의 질문입니다. 잊었던 질문이 되살아났습니다.”하는 심정으로 은혜를 구하며 이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여러분을 은혜 없이 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먼저 ‘청년’이라는 단어를 주목합시다. 이것은 시인이 청년 시기에 드린 기도임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하였듯이 이 긴 시편은 시인이 평생 드렸던 기도들을 같은 주제와 일정한 형식으로 모아놓은 시편인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기도는 시인이 청년 시절에 드린 기도였을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은 이 청년이라는 말 때문에, 지금 시인이 드리는 기도가 주로 성적 개념을 암시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이 될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청년의 정욕으로 한정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칼빈이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젊을 때에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강조는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젊은 날의 경건한 습관들이 형성되어서, 나이가 들었을 때 그 열매를 거두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젊은 날의 경건의 훈련은 경건의 습관을 형성하고, 그것이 평생에 더 바르고 경건한 결정들을 하게 함으로써 결국 경건한 어른의 자리로 인도할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물론 그 반대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니 뭔가 없던 것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2.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라(10-12; 요 17:17)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 17:17).” 시인은 이 원리를 이미 터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그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답을 알기에, 시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10).” 답을 아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답을 안다면, 전심으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2절에 이어 다시 한 번, 시인은 ‘전심으로’ 주를 찾노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왜 이 기도가 필요합니까?
스펄전의 말입니다. “가장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다 해도, 만일 거기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길을 잃을 것이다. 좁은 길은 우연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부주의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는 생각 없이 죄를 범할 수도 있다. 우리는 단지 그 위대한 구원을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파멸로 이끈다. 하지만 여호와께 순종하고 올바로 걷는 일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생각 등의 전부를 요한다.” 그래서 시인은 전심으로 주를 찾으며 스스로 그 일을 행할 수 없는 줄 알기에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도록 지켜주시길 간구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연약함을 충분히 아십니까? 여러분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묻는 게 아닙니다. 신앙, 즉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나는 하면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의지로 행한 것은 그것이 영적 일일지라도 결국 자기 의의 포로로 만들고 맙니다. 저는 이 시인의 의지가 얼마나 강고한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10절의 간구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자신의 연약을 알고 이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슬프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것을 눈치도 채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알지도 못합니다. 이 간구는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두려움을 보여줍니다. 애당초 사랑이 긴가민가하는 사람은 그 사랑에서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점을 찰스 브리지스는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구하지 않거나 느슨하게 부주의한 태도일 때에는 실족함이 눈에 보일 정도까지 드러나지 않으면 자기가 주님의 계명을 떠나 방황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하지만, 전심으로 주님을 찾을 때에는, 방황하는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될까 봐 조심하고, 곁길로 들어서는 첫 걸음도 내딛지 못하게 차단해 버리고, 마귀를 의식하며, 과거의 비참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도 이점을 너무나 잘 지적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갈 다소간의 욕망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도 약해서 가련하기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많은 허영으로 넋이 빠져 있으면 우리 안에는 세상이 지배하며 선한 헌신—우리가 그것을 여전히 위대한 것으로 느낀다 하더라도—을 그만두기 위해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우리의 본성에는 너무도 많은 악과 불완전이 있고, 또한 우리는 너무나 허약하고 나약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가 그의 계명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충분한 필요성이 날마다 있습니다.” 너무나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심으로’ 주님을 바라고 찾는 이 시인의 마음과 간구는 중요하고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시인은 여기서 좀 더 나아갑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 이제 시인이 하려는 것은 주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두는 일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필요할 때 그 말씀을 꺼내어 사용할 수 있도록 마음에 ‘숨겨둔다, 저장한다, 새겨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보물을 상자에 담아 놓듯, 마음의 보석 상자에 주의 말씀을 담아두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말씀을 마음에 담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성경읽기를 넘어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잃어버리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 없는 삶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북한을 돕다가 하루 아침에 죄수로 몰려 무기노동교화형을 받고 31개월 동안 고생을 하시고 풀려난 임현수목사님은 간증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때 자신에게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었는지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감사하게도 어느 날 목사님에게 성경이 주어졌습니다마는, 그 전의 시간들은 마음에 간직한 말씀들을 꺼내어 사용해야 하는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주의 말씀을 담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수년 동안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암송하게 해왔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후일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부모들도 이 일이 주의 말씀을 아이들의 마음에 담아두는 일이었음을 알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가 약화된 원인들 가운데에는 주의 말씀을 아이들의 마음에 담는 일에서 실패하였고 재미와 자투리 성경이야기들만을 주었던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리고 젊을 때, 주의 말씀을 그들 마음에 담는 일은 영적 전쟁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의 마음에 담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감당해야 하는 일이고,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과 교사들, 그리고 온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담는 일은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야 하는 최적의 장소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이 일은 우리 능력으로 감당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구합니다.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12).”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주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음을 알기에,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암송할 때, 그리고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가르치소서”라고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가르치실 때, 그 말씀은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9편에서 시인은 깨닫게 해달라고 6번을 간구하고, 가르쳐달라고 10번 이상을 기도합니다.


3. 마음에서 입술로 (13,15a)
13절에서는 마음에 둔 말씀이 입술로 표현되는 것을 봅니다. “주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13).” 여기서 입술로 선포했다는 말은 이웃들을 향해 선포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에게 말씀을 읽어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본래, ‘선포하다’라는 말의 본뜻이 ‘계산하다, 하나씩 되뇌이다’라는 의미인 까닭도 있고, 이것은 15절에서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라는 말씀과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읊조린다’는 표현이 119편에 8번 나오는데, 이것은 과거 개역성경에서는 ‘묵상하다’로 번역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발성을 하여 묵상을 하는 것이기에, 개역개정역에서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로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주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재연한다는 뜻이 강합니다. 앨런 로스는 이것은 “마음에 둔 말씀들은 결국 모든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응용된다는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다중 감각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 내어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도 이 경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고, 귀로 들어오고, 마음으로 전달됩니다. 다시 마음에 둔 말씀들은 입술을 통해 순간순간 흘러나오고 그 말씀들을 되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4. 순종의 기쁨 (14,15b, 72)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을 읊조리는 시인의 마음은 어떨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14절이 그 고백입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14).” 종종 성경은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사랑을 돈과 물질에 대한 사랑에 비교하곤 합니다. 세상에서 돈에 대한 애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은 단순히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만 하지 않고, 주님과 그 말씀을 사랑할 때 돈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시인은 물질 보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뒤에서도 또 고백합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시편 119:72).”여기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축제의 기쁨, 흥겨움, 흘러 넘치는 기분을 표현합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풍부 가운데 영혼이 비참한 사람보다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는 신자의 만족이 훨씬 더 큽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그는 ‘주의 증거들을 즐거워한다’고 하지 않고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고 있을 때의 기쁨, 즉 순종의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의 기쁨은 생각이나 말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순종과 실행에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시인은 한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그는 주님의 말씀이 열쇠임을 알았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주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 말씀이 수시로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니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다시 입술에서 순종의 행위로 옮겨갑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이 모든 일은 한 질문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전심으로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사람에게 찾아온 기쁨입니다.


5. 교훈과 적용 (15b, 16)
이제 시인은 두 가지 결단을 합니다. 먼저 주의 길들에 주의하겠다는 것입니다(15b). 여기서 ‘길들’은 9절에서 ‘그의 행실’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나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길은, 주님의 길들에 주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따름이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한 사실입니다.
둘째로 시인이 하는 결단은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기에 주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는 것, 그 말씀을 살아내겠다는 것입니다(16). 말씀에 대한 즐거움으로부터 묵상이 시작되고, 그 묵상이 말씀을 마음에 두는 일이 되고, 그 말씀이 입술을 통해 선포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어집니다. 시인의 마음에는 배가된 기쁨이 충만합니다. 주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는 말은, ‘계속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암송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말씀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사실, 시편의 목적은 정보 전달(information) 보다는 영적 형성(formation)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습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는 것, 그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둔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에 두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둔 그 말씀을 통하여, 주께 범죄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를 지키시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세월과 함께 경건한 어른들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