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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2). 안식일의 노래

시편 92:1-15, 시편 89:46-48, 시편 73:3,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5-24

말씀내용
 시편 92편은 안식일에 헌정된 유일한 시편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을 읽는 사람들은 왜 이 시편이 안식일에 헌정되었는지 그 의미를 쉽게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시편 92편에서도 특별히 노년의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는 구절은 14절입니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14).” 누구나 이런 노년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질문은 이것이 안식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심지어 리처드 필립스는 시편 92편 설교의 제목을 ‘주일 예배당에 가는 노래(A SUNDAY GO-TO-MEETING PSALM)’라고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구약성경 주석인 미쉬나는, “이 시편은 장차 다가올 시대 즉 영원히 안식하게 될 그날, 영생을 위한 시편이다.”라고 말합니다. 제임스 메이스의 설명입니다. “이 랍비적 해석에 의하면, 창조는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주께서 원수들을 완전히 정복하시는 승리의 그날에 완성된다. 그때에는 하나님과 의인들이 영원한 안식에 거하게 될 것이다(히 4:1-4). 그때까지는 안식일을 통해 우리는 종말론적인 안식을 미리 맛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시편은 세상 마지막 때를 현재에 실현시키며 우리의 주일 예배와 안식의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해준다.”
제가 오는 주일에 [안식, 안식의 날, 예배의 날]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바로 종말의 안식에 관한 것이니, 오늘 말씀은 그 속편이나 예고편이라고 여겨도 좋겠습니다.


1. 안식일의 의미와 안식일을 대하는 태도 (출 14:13; 레 23:3; 암 8:5; 사 58:13-14)
먼저 안식일의 의미를 간단하게 생각해보고 본문을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식일은 무엇보다 기억을 위한 장치입니다. 절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입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억하고 불러야 할 노래의 주제는 우리의 희생이나 수고, 우리의 헌신이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 시인은 주의 이름,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1-3), 주께서 행하신 일(4,5), 주의 손이 행하신 일(4), 주의 생각(5)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절반을 하시고 우리가 남은 절반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이것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날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멈추고 쉽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우리가 협력해서 이루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홍해 앞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말한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그저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면 됩니다(출 14:13).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대항하여 싸울 힘이 없었고 그들의 압제를 벗어날 수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그들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노동을 쉼으로써 그것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노래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일을 쉬는 것과 공예배(성회, 레 23:3)가 중요한데, 이 두 가지는 축제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와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는 즐거움과 축제의 날로 의도된 안식일이 부담과 의무의 날로 전락한 것을 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백성을 책망합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아모스 8:5).”그래서 안식일은 우리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관심사를 내려놓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믿음과 주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의 날로 의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이 시험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이사야 58:13–14).” 안식일에 대한 이런 전제들을 가지고 시편 92편 본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2. 하나님을 노래하게 하는 기쁨 (1-5; 34:2; 히 12:28; 시 2:11)
먼저 1-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선하다고 말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지 않고 좋다(선하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1-3절은 한 문장인데, 히브리어로는 맨 앞의 단어가 ‘좋다(선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할 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에서도 사용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우리 영혼을 자유하게 하기에 선합니다. 시인이 안식일에 부르는 노래(찬송)는 감사함과 악기를 동원한 찬양으로 구성됩니다. 감사한다는 말은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환경 속에서 드리는 감사는 곤고한 심령들을 격려하고 기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편 34:2).” 그리고 이 찬양은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 등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하면서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노래의 주제는 주의 이름입니다. 이름은 본질과 행하시는 일 모두를 함축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지존자이신 하나님 보다 높으므로 찬양을 받을 존재는 없습니다.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찬양합니다. 이 두 단어는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할 때 쌍으로 나타나는 두 단어인데, 이사일의(二詞一意)적으로 사용되어, ‘성실하신 언약적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랑을 경험하는 백성은 선포와 찬양에 싫증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을 지겨워 하지 않을 것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아침마다, 밤마다 찬양한다고 말함으로써, 항상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4절은 이렇게 찬양의 이유를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4).”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안식일에 성도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억함으로써 누리는 정서이고, 이 기쁨으로부터 성도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이 모든 성도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 중심을 차지해야 하는 정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에는 은혜에 대한 기쁨의 충만함이 항상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브리서 12:28).” 시편 기자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편 2:11).”라고 떨림으로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펄전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깊이 묵상한다면 넘쳐 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구속의 역사까지 고찰한다면, 기쁨은 끝이 없게 되고 따라서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속의 사랑을 묵상하다 보면, 찬송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때가 종종 있다.” 여러분은 이 말에 얼마나 공감하십니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런 은혜를 다시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이 일은 안식일을 회복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 곧 복음을 다시 상기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5절에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할 때, 주의 생각이 참으로 깊다고 말합니다. 주의 생각이 깊다는 것은 이제 말하게 될 악인의 지각과 관계가 있습니다. 주의 생각이 깊은 것은 악인들에게는 가리워졌고 숨겨졌기 때문입니다.


3. 노래가 그칠 때—악인의 번영을 볼 때 (6-8; 73:3,17)
찬송은 좋은 것이지만, 찬송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악인의 존재입니다. 6절에서 시인은 악인을 어리석은 자와 무지한 자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주의 생각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옳은 일에 대한 감각이 없는 짐승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무지하다는 말은 지혜문학에서 바보를 가리키는데, 지식을 가졌지만 고집스럽고 영적 감각이 없는 자입니다. 의도적이든 무지함 때문이든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적 이해력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무서운 것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 무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풀 같이 자라고..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7). 악인의 성공과 번영은 그저 풀 같이 자라는 수준일 뿐입니다. 그들의 멸망은 갑작스럽게 임할 것입니다.
종종 성도들은 이런 사람들의 번영과 성공을 보면서 시험에 듭니다. 이들의 존재는 찬송을 방해합니다. 이런 악인의 형통함 때문에 시편 73편을 쓴 아삽도 시험에 들었습니다(시 73:3). 하지만 성경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번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은 멸망입니다. 그 전환점이 8절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8).” 악인의 멸망을 말하는 근거는 영원하신 지존자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지존자를 뵈었을 때 그들의 종말을 깨닫게 되었고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시 73:17).


4. 다시 노래할 때—지존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8-11)
지존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 헤아릴 때, 성도는 다시 찬양하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9-1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9–11).”
심판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지존하시다면 그를 대적하는 자들은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9절에는 ‘패망한다’는 말이 두 번 사용되고 흩어진다는 말을 더하는데, 이는 악인들이 완전히 패배하고 파멸될 것을 강조합니다. 시인은 시대의 마지막에 있을 극적인 심판을 생각합니다.
반면, 주께서는 성도를 높이실 것입니다.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라는 표현은 힘이 넘칠 정도로 머리를 흔드는 야생 들소의 힘을 통해 성도가 누릴 능력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성도는 악인의 심판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것입니다.


5. 성도의 노년과 종말 (12-14; 89:46-48; 왕상 6:29; 5:8; 시 91:1)
이제 이 시편에서 가장 아름다운 본문인 12-14절입니다. 악인의 번영은 풀의 자람 같이 일시적이었다면, 의인의 번영은 막을 길이 없고 점진적이며 영구적입니다. 이 본문은 어쩌면 시편 89:46-48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시편 89:46–48).”
시인은 의인을 종려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에 비유합니다. 종려나무는 물이 많은 오아시스에서 자라며, 대추야자를 생산하고 생명과 풍요를 상징하기에 성전 안에 새겨진 나무였습니다(왕상 6:29,32,35; 7:36). 백향목은 크고 당당한 나무로 성전의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습니다(왕상 5:8,10). 스펄전은 종려나무와 백향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종려 나무는 빨리 자라지는 않지만, 수백 년 동안 건재한다는 점에서 들판의 풀과는 확연히 다르다. 거칠고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서서 모든 힘을 다 바쳐 한 줄기로 위로 곧게 뻗어나가는 고고한 종려나무를 볼 때, 우리는 경건한 의인을 연상케 된다. 의인은 다른 모든 자들이 멸망하는 환경 가운데 처하더라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굳건한 목표를 잃지 않는다. 본문에서는 의인의 현재 상황뿐 아니라 앞으로의 상황까지도 말해 주고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의인은 번성할 것이요, 지극히 고상한 방식으로 번성할 것이다. 백향목도 역시 고상하면서 장수하는 나무이다. 주님은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사 65:22)라고 말씀하셨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산 정상에서 백향목은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면서도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정 경건한 의인도 모든 역경 속에서 영혼의 명랑함을 굳게 지키며 신앙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 소들의 먹이가 되는 풀은 거듭나지 못한 자를 나타내는 좋은 상징이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는 백향목은 하늘의 후사를 나타내는데 더 없이 좋은 상징이 된다.”
종려나무와 백향목과 같이 번성하고 성장하는 의인은 ‘여호와의 집에 심긴’ 나무이기에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할’ 것입니다(13).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보호받고 안전하게 사는 의인의 삶에 대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의인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이 번성할 것입니다. 시편 91편의 표현을 빌면, 의인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 곧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시 91:1).
그래서 의인은 늙어도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합니다(14). 노년이 되어서도 열매 맺는 삶을 살고, 나무처럼 청청할 것입니다. 모든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사라져 버리겠지만 말입니다. 노년에 여전히 결실한다는 말씀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그림을 보여줍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이런 인생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노년은 하나님의 집에 심겨져 그 뜰 안에서 번성하기를 원하는 의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눈 앞의 성공과 잠깐 있다 없어질 번영에 눈 멀지 않고 지존자를 바라보고 그가 행하신 일로 기뻐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6. 삶의 노래 (15,4)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씁니다.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15).” 하나님은 바위 같이 신실하고 정직하십니다.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의인은 그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집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여 노년에도 결실하는 인생은 그 삶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참됨,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을 증거할 수 있다면 이보다 복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의인의 노년이 여전히 결실한다는 말은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노년에도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라고 말하며 노래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4). 바위 같이 정직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삶으로 노래할 것입니다.


7. 교훈과 적용: 안식일의 노래 (히 12:2)
여러분에게는 이런 노래가 있습니까? 처음에는 입으로 노래합니다. 매일 그 노래를 부르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주신 안식일에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 일 때문에 기뻐하며 노래합니다. 그러면서 눈 앞의 번영과 성공에 속은 것을 회개하고 주의 생각이 깊음을 헤아립니다. 안식일에 주의 백성이 모여 노래합니다. 주의 이름을,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주께서 행하신 일을 찬송합니다. 이런 노래를 우리는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주일 공예배에서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이런 고백이, 이런 감격이 살아있는 노래입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노래를 우리는 언제 불렀습니까? 공예배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그 노래를 그칠 수 없다고 느꼈던 적이 언제입니까?
청교도들은 안식일을 ‘영혼의 장날(the market day of the soul)’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일-안식일은 기쁨입니까, 지루한 의무입니까? 한 주간 동안 눈에 보이는 사람과 일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가도 주일에 우리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누가 진정으로 번영하는 자인가? 도널드 윌리엄스는 말합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은 한 시즌 동안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그들의 성공은 기만적이다. 꽃처럼 그들은 번성하다가 영원히 끊어질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겉모습을 꿰뚫어보고 하나님의 의와 심판을 신뢰한다.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9). 진정으로 번영하는 사람은 여호와와 그분의 집에 심겨진 사람이다. 그는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의 일을 바라본다(4). 그의 삶은 노년에도 결실한다(14). 그러므로 우리의 번영은 이 덧없는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여호와의 집에 심긴(13)’ 데서 찾을 수 있다.”
안식일에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고 노래합니다. 시편 92편에는 명령이나 권고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완성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주(창시자)이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히 12:2). 우리는 안식일마다 모여서 그분을 기억하고 이 진리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기쁨을 잃어버렸고 희망을 놓쳐버린 지친 영혼들이 안식일에 와서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복된 은혜를 일생 누리며, 늙어도 결실함으로 바위 같으신 하나님의 정직하심을 증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