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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0). 지혜로운 삶에 대하여_"20:01-21:23 음향사고로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시편 90:1-17, 민수기 20:1-29, 시편 17:1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5-10

말씀내용
시편 89편을 설교한 지 거의 1년 반 만에 90편을 이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90편은 총 5권으로 구성된 시편의 4권(90-106편)을 시작하는 장입니다.


1. 덧없는 인생에 희망이 있는가? (민 20)
아마 90편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실텐데,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90편을 여러 차례 설교했는데 주로 장례식에서였습니다. 도널드 윌리엄이 말했듯이, 90편은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직면하는 어둠의 실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둠은 한편 죽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C.H. 류폴드의 말대로, 현실주의적인 표현들을 담고 있긴 하지만 비통함이나 과도한 비관주의를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시편에서 우리는 덧없는 인생에서 희망의 빛줄기가 비추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어가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시편의 저자를 바벨론 포로 후기의 인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임스 보이스는 이 시편은 광야에서의 모세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고, 특별히 민수기 20장을 그 가능한 배경으로 제시합니다. 민수기 20장은 미리암의 죽음과 아론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고, 모세가 가데스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백성을 향해 분노하여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냈던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 일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오직 가나안만 바라보고 지난 40년을 광야에서 살아왔는데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사건은 모세의 임박한 죽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드린 기도라는 것이 제임스 보이스의 설명입니다.
90편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말하고 3-6절에서는 죽음 앞에 굴복해야 하는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대조합니다. 7-12절에서는 나아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하게 된 인간의 처지를 진술하고 13-17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깊은 갈망을 기도로 담아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한편으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덧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인생에 희망이 있는가를 질문합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덧없는 인생에 여러분의 변함 없는 소망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깊이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2.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이시다(1-2; 민 12:8; 신 33:27)
시작하는 1-2절을 같이 한 번 천천히 읽어봅시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1–2).”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영원하심과 광대하심을 얼마나 감각하며 읽으셨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던 사람이었습니다(민 12:8). 모세만큼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감각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영원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순간인데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현재입니다.
‘주여’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위엄을 강조합니다. 그 주님은 영원하심에 걸맞게 언제나 모든 세대에 그들의 거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거처라는 말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기 보다, 보호하고 돌보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현존을 반영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명기 33:27).”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호와 돌봄의 원천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창세기를 썼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2절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묵상할 때, 우리는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참된 믿음을 가진 정상적 신자라면, 연약한 인간의 생명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언약의 확실성의 근거이자 신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스티븐 차녹의 말대로 입니다.


3.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덧없다(3-6; 창 3:19)
이제 모세는 3-6절에서 인생이 짧고 덧없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인생을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3절에 ‘티끌’이라고 했고 4절에서 ‘지나간 어제’와 ‘밤의 한 순간’이라고 했고, 5절에서는 ‘잠깐 자는 것’과 ‘아침에 돋는 풀’ 그래서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 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인생이라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했을 뿐, 과도한 비관주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 다수는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헛되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빛 안에서 자신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1-2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말했고 그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보니 그 인생은 헛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절에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는 말씀의 인용입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천년은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순간일 뿐입니다. 인간이 므두셀라처럼 천 년을 산다고 해도 결국 죽음에 굴복해야 하는 인간의 생명은 짧고 덧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홍수나 급류에 단번에 쓸려 내려가 버리는 약한 존재입니다. 살았다고 하지만, 그저 잠깐 자는 것 같을 뿐입니다. 밤새 자라 아침에 돋아난 풀이 꽃도 피우지만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것처럼, 인간의 짧은 인생에서는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성공하는 것 같다가도 갑작스럽게 뒤집히는 일은 다반사이고 인간은 속수무책입니다. 인생의 이런 덧없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4.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7-12; 시 19:12; 잠 1:7; 욥 1:1; 눅 12:20)
죽음 앞에서 무력한 인생의 덧없음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죽음이라는 물리적 위협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최대 난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7-12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7절에서 ‘주의 노’와 ‘주의 분내심’, 9절에서 ‘주의 분노’, 11절에서는 ‘주의 노여움’과 ‘주의 진노’를 언급하는 것이 그것들입니다.
먼저 7-8절입니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7–8).”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죽음에 굴복하는 인생의 짧음과 고난의 이유가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신자의 모든 개별적인 고난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일반 원리입니다. 그러나 광야 이스라엘 백성 1세대의 죽음이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반역의 결과였음은 분명합니다(민 14:29-30). 모세는 이 참혹한 죄의 결과를 체감하며 이 고백을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는 결코 숨겨질 수 없으며 은밀한 죄일지라도 그 얼굴 빛 앞에 훤히 드러난다고 그는 말합니다(8). 사람들 앞에 죄가 공개되었을 때에만 죄가 아니고, 내가 인식해야만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결코 가볍고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편 19:12).”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을 돌아볼 때, 모세는 9절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9).” 이것은 40년을 바로의 왕궁에서, 40년을 광야에서, 마지막 40년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목자로 120년을 살아온 모세의 고백입니다.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70-80년은 광야 백성의 일반적인 수명에 맞는 진술입니다. 20세 이상으로 애굽에서 나온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었으니까요. 신속히 날아간다는 표현은 인생의 짧음과 덧없음을 묘사합니다. 왜 인생이 이렇게 허무합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는 게 모세의 대답입니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11).”
모세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 기도를 읽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인류의 첫번째 범죄가 빚어낸 결과를 창세기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짧은 인생 중에서도 그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의 말대로, 이 기도가 민수기 20장을 배경으로 한다면,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의 죽음, 그리고 그 한 번의 죄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 하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생각하면서 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는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았고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간구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
이 간구는 그저 남은 수명을 알려 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간구입니다. 모세가 구하는 지혜로운 마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능력을 알고 자신의 삶과 죽음을 헤아리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사 거룩한 삶을 살도록 지혜의 길을 걷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특별히 구약성경의 시가서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언 1:7)”입니다. 욥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기 1:1).”
주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를 생각해 보십시오(눅 12:16-21). 그는 곡식을 쌓아 둘 곳을 염려하고 일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을 만큼 성공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이 사람이 어리석은 이유는 모세가 말하는 인생의 덧없음과 짧음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탐심으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5. 은혜가 필요한 인생 (13-17; 17:15; 롬 8:18; 고후 4:17; 시 27:4; 잠 16:9; 고전 15:58)
마지막 연에서 모세는 은혜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13).”
범죄한 인생에게 주어지는 몫은 기쁨과 즐거움이 아닙니다. 모세가 10절에서 말했듯이,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에 기대어 모세는 영혼의 만족과 즐거움과 기쁨을 달라고 구합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14–15).”
모세는 아침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만족하기를 구합니다. 이 간구는 다윗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17:15).” 이렇게 시작하는 아침은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여기서 ‘만족하게 하사’라는 말은 단순히 필요가 채워지는 수준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공급되었다는 의미, 넘치는 풍성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넘치도록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약 1:5). 인생이 어떻게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은퇴 후의 삶을 보장해주는 은행 잔고나 재산이 아니고, 성공한 자녀들의 삶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맛보고 체험하여 만족하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평생토록 한결 같이 만족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슬픔을 당한 날 수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와 비교할 때 기쁨을 당한 날 수는 얼마나 적은지요? 모세는 ‘괴롭게 하신 날수’와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어찌 우리를 괴롭게 했고 화를 당한 날수 만큼이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라고 했고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17).”라고 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잠깐 지나가는 인생에서 겪은 환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6–17).” 모세의 이 마지막 간구는 인생이 단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슬픔과 수고 뿐인 삶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나타나기를, 주의 영광을 자손들에게 나타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게 하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음을 온 백성과 그들의 모든 자손이 알기를 그는 구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7절에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라고 할 때, 은총은 ‘아름다움, 기쁨, 유쾌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임재가 그들 위에 머물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것을 구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 27:4).” 이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모세도 구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만 비로소 만족할 수 있고 영원토록 즐겁고 기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넘치도록 수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의 목전까지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의미를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우리의 수고를 의미 있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넘치도록 수고를 했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인생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렇게 수고할 때, 그 수고는 “주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고전 15:58).”


6. 교훈과 적용 (히 11:10,16; 시 23:6; 요 15:4)
모세의 기도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삶을 배웁니다. 그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했습니다(12). 본문이 그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이 기도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된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 멀리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드렸던 기도는 아닐까? 그는 거기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인생은 참으로 짧고 덧없지만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 나의 거처는 내가 지난 40년 동안 고대하고 원했던 저 앞에 보이는 가나안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늘의 본향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0,16).” 어쩌면 모세에게 있어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늘의 본향에 대한 생각은 약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을 바라보았을 때, 모세는 이 지혜로운 마음을 어느 때보다 놀랍게 얻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광대하심으로 자신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1–2).”
이것이 모세가 12절에서 구했던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이 지혜가 아니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세상에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다윗도 이것을 구했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6).”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거처를 발견하는 모세, 자기의 목자 되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다윗이 궁극적으로 바라본 분은 그들을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을 하지요. 그 결심은 결국 기다리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한복음 15:4).”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 지나가는 거처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거처를 생각하고 사십니까? 이 불확실하고 덧없으며 일순간에 불과한 인생에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있음을 아십니까?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여러분의 거처로 삼는 것입니다. 주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 사는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