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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22). 말씀에 의존하는 인생

시편 119:169-176, 히브리서 4:16, 고린도전서 10:1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3-29

말씀내용
우리는 드디어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인 시편 119편의 마지막 부분에 왔습니다. 119편은 176절, 22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 시가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1연부터 22연까지 각 절의 첫 글자는 히브리 알파벳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암송을 위한 용도였을텐데, 오늘 22연의 여덟 절은 모두 히브리어 마지막 알파벳인 타우(ת)로 시작합니다.


1. 이상한 결말
이 대단한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이제 이 시편이 어떻게 멋지게 마무리 되는지 보자”하는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는데, 그 결말은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집니다. 결말은 기대만큼 대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싱겁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제임스 보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연과 이전 연(21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이 연과 앞의 시편 전체 사이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21연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인의 순종과 그 말씀에 대한 시인의 기쁨에 관한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연은 모두 탄원이며 확신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시인의 잃어버려진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끊임없는 필요성에 대한 겸손한 인식이 있습니다.”
22연 전체의 분위기도 그렇지만, 마지막 절인 176절이 너무나 분명하게 맥을 끊는다는 느낌을 줍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176).”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다니요? 왜 이렇게 맥없이 끝나는 것입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21연은 119편의 절정이었습니다. 이제 그 산 정상에서 내려가면서 보는 정경은 장엄할 수도 있을 텐데, 시인은 그런 방식으로 이 시편을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시인을 감동하신 성령님께서는 비현실적인 해피엔딩 보다는 너무나 현실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이 시편을 마무리하게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시인은 왜 이런 방식으로 이 장엄한 시편을 마무리한 것일까요?


2. 자아(self) 대 하나님(176)
이 멋진 시편을 쓴 시인은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영적 감각, 말씀을 사랑하는 깊이, 하나님에 대한 체험, 고난의 환경에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싸우고 승리하는 경건, 게다가 이 긴 시편을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써 내려가는 문학적 능력 등을 보면, 우리는 그가 다윗인지, 아니면 어떤 구약의 인물인지 정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을 다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이 시편을 쓴 사람을 주목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책을 읽어 내려가다가 책이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갑자기 “도대체 이 책을 쓴 사람이 누구지?”하고 저자와 저자에 대한 것들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어쩌면 이 시인도 그런 것을 어느 정도는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유혹이 찾아옵니다. 시인은 자신의 경건과 결혼생활과 자녀양육, 그리고 모든 삶과 사역에서 자신이 얼마나 온전한 사람인지 소개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자기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단정하지 못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시인을 감동하셔서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를 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것이 가장 합당한 마무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자아를 높이고 싶은 유혹을 성령님의 뜻 앞에서 꺾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그저 ‘잃은 양 같이 방황하는 존재’라고 소개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자아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와 싸웁니다. 열흘 전, 주일에 제가 [은혜와 자랑]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한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자랑은 인간 본성에 속한 욕구이고, 죄성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죄성은 자기 중심성으로 집약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 중심에서 몰아냅니다. 자아가 우주의 중심이고, 자아가 그 누구보다 중요해서, 그는 자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생각이 자아에게 집중되어, 자신이 누구보다 잘 낫다고 느끼거나 반대로 자기 자신보다 불쌍한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푹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보이지 않고 사랑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돌보아줄 수 없습니다. 교만과 자기연민은 똑같이 자기 영혼을 죽이는 죄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자아를 넘어서게 합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더 이상 자아를 치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역겨운 죄인인 자아를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성을 보고 인식하는 만큼,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인은 이 은혜를 정확하게 알고 맛본 사람입니다. 176절이 그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을 ‘잃은 양 같이 방황하는 종’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의 능력이 필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하나님을 높이는 방식입니다.
데렉 키드너는 이 마지막 연을 이런 말로 정리합니다. “이 사람은 누가복음 18장의 비유(눅 18:9-14)에 나오는 자화자찬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의롭게 집으로 돌아간 세리와 같은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것이 시편 119편의 이상한 결말에 대한 설명입니다. 시인은 끝부분에서 자아를 높일 것인지, 하나님과 그 은혜를 높일 것인지 영적 싸움을 했을 것이고, 그는 이 싸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승리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높이는 멋진 선택을 한 것입니다. 자아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믿음의 승리입니다.


3. 탄원 (169-170)
169-170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169–170).”
이것은 탄원입니다.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는 것과 적의 위험으로부터 건져 달라는 탄원입니다. 우리는 “아니, 바로 앞에서 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의 기도 치고는 너무 평범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가 얼마나 반복적으로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는지를 압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기도는 치기어린 젊은 시절에나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문제는 시인의 이 간구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십니까? “주님, 제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시는가 말입니다. 여러분은 시편 119편에서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저는 이 교훈 하나를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고 또 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구하는 자녀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실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구하는 두번째 간구는 대적들의 위험에서 건져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이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이 시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 군데에서 확인했습니다. 이 탄원은 신자의 삶의 현실을 오해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기도도 역시 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이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두 번이나 반복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가지는 마음이 아닙니까? 우리의 기도가 그저 허공을 울리는 기도로 끝난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내가 기도하면 그 기도와 탄원이 하나님 앞에 이르게 되며 하나님께서 직접 들으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기도했다는 사실에만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간구하는 것은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자상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들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거의 모두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께서 직접 들으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만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자상한 애정을 가지고 들으신다는 확신을 가진다면 어떤 성도가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인이 두 번이나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말한 것은, 우리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169-170절에는 기도와 말씀이 한 쌍으로 등장합니다.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를 뿐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해주십사 하는 탄원은,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고 그것은 바람에 지나지 않지만, 기독교의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확신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님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상황에서 약속 하나를 떠올릴 수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더더욱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4. 찬양 (171-172)
이어지는 171-172절에서 분위기는 조금 올라갑니다. 시인은 찬양과 노래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자기에게 율례를 가르치시기 때문이고, 그 모든 계명들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찬송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찬송이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나 자신을 변화시켜 가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시인은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깨달은 말씀은 성도를 기도와 찬양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의롭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주의 모든 계명은 의롭고 진실하며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고난 속에서도 성도는 주의 말씀을 노래하게 됩니다. 지난 주에 언급했듯이, 교리를 노래하는 것, 주의 말씀을 노래하는 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입술은 찬송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5. 탄원과 찬양의 하이브리드 (173-176; 히 4:16)
이렇게 두 절에서 찬양하겠노라고 말한 시인은 다시 탄원 모드로 들어가는데 마지막 네 구절에서는 탄원과 찬양이 번갈아 나옵니다. 그래서 시인이 탄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인지, 찬양을 드리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삶의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 삶이 절망과 탄식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만 구하는 것으로 점철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건강한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삶의 고난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온 종일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삶의 전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성도의 삶에는 두 요소가 언제나 공존합니다. 그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173절에서 시인은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하지 않을 수 있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순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의 손의 도우심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히 4:16). 그러나 이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말씀을 취하고 그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시인은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방법과 수많은 지혜들을 버리고, 복음의 약속을 생각하고 붙들고 적용하는 것은 모든 순간에 성도가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174-175절에도 탄원과 찬양이 함께 나옵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면서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노라고 고백하고, 영혼을 살려 달라고 하면서 주를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영혼을 살게 하시면, 시인은 점점 더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 최고의 목적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1문답).


6. 나는 비록 약하나 (176; 고전 10:12; 시 95:10; 58:3)
이제 마지막 구절인 176절입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176절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처럼 가난하고 연약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죄인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자신을 방황하는 잃어버린 양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건강한 성도인지를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이런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잊어버리고 된 줄로 착각하는 순간이 바로 넘어지는 순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0:12). 여기서 ‘방황하오니’라는 단어는 시편 95:10에서는 광야에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편 58:3에서는 악인들에게 사용된 단어인데, 이 단어를 시인이 자신에게 사용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양의 본성은 쉽게 길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찾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의 생존은 불가능합니다. 시인은 자기의 본성이 그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길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길을 잃어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죄에 빠져들 수 있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내버려두시는 즉시 바로 죄에 빠진다.”
칼빈의 말처럼, 우리는 틈만 나면 자랑과 자기 의와 강함과 승리에 도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76절은 우리를 낮은 자리로 가게 합니다. 겸손한 자기 인식, 은혜를 의지함, 약함을 자랑함, 말씀에 의존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119편의 마지막 절은 전체 구절 가운데 우리를 가장 놀랍게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176절을 현대적 언어로 바꾸어 탁월하게 설명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정말 모르겠어. 내가 하고 있는 게 찬양인지 탄원인지 확실히 단정할 수가 없어. 이 둘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 완전히 뒤죽박죽인 것 같아. 언제 실패할지 몰라. 하나님이 속히 구원해 주시길 바랄 뿐이야. 기도하고 간절히 주님을 바라 보는 게 요즘 내 일이야.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사랑과 찬양과 평안과 소망이 마음에 충만하게 돼. 늘 긴장 상태야. 그래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의 은혜에 나를 전부 맡겨버렸어.”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습니다. 시인의 고백은 성도의 삶의 현실을 놀랍도록 정직하게 반영합니다. 이런 현실을 정직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와 성도는 종종 천박한 승리주의나 절망에 쉽사리 휩쓸리곤 합니다.
시편 119편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 만이 자신을 현재의 고통 속에서 장래의 영광을 맛보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방황하는 잃은 양을 찾아 달라고 탄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결심합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마음과 이 결심이 저와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말씀을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긴장 가운데서 은혜의 말씀을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기도:
1. 감사: “나는 비록 약하나 주의 힘은 강하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신자가 일평생 견지하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나는 잃은 양 같이 방황하오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뒤죽박죽인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강하시고, 우리가 약할 때 도리어 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함을 자랑할 수 있고, 심지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인하여 감사합시다. 우리의 약함을 고백하고 자랑할 만큼, 우리가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를 기도합시다.
2. 간구: 우리는 그래서 늘 말씀에 의존하여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긴장 가운데서 은혜의 말씀을 의존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 평생에 너무나 중요한 기도입니다. 성령의 내적 조명이 없으면 우리는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라고 간구합시다.
3. 간구: 우리가 주의 말씀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장래의 은혜와 영광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노래가 나오고 찬송이 나올 것입니다. 오, 주여! 저희 심령에 이런 찬송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인생의 모든 시간에 노래와 찬송이 있게 하옵소서.
4. 간구: 특별히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고 붙잡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시인은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어려울 때 우리가 붙잡을 말씀이 없지 않도록, 그 약속을 알고 사랑하고 붙잡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의 약속을 새겨보며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삶을 구합시다.
5. 공동체를 위한 간구: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어른에서 아이까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더욱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말씀으로 저희를 빚으시고 말씀으로 저희를 세우심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6. 간구: 시인은 자신의 부르짖음과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드린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기를, 아버지께서 자상한 애정과 관심으로 우리의 기도를 친히 들으시기를 구합시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으로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3).”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