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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21). 장래의 영광을 맛보게 하는 말씀

시편 119:161-168, 이사야 66:2, 데살로니가후서 2:9-1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3-22

말씀내용
이제 우리는 시편 119편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은 161-168절로 각 구절은 히브리어의 21번째 알파벳인 씬/쉰(שׁ)으로 시작하는 21번째 연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시편 119편을 산에 비유하자면, 그 산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비록 고난의 상황은 여전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말씀으로 인하여 장래의 은혜를 앞당겨 맛보며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한 성경학자는 “이 연에서는 승리의 트럼펫이 울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기쁨과(162) 사랑(163,165,167), 찬송과(164) 평안(165) 그리고 소망의(166)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장래에 완전히 성취될 것들이지만, 시인은 현재에 그것을 맛본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데렉 키드더는 이 본문의 제목을 ‘The place of peace’(샬롬의 장소)라고 붙였는데, 모든 것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샬롬의 집이라는 우리 교회 이름의 의미와 정확하게 같은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망가졌던 모든 것들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회복되는 자리, 그 회복이 시작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1. 경외함과 즐거움 (161-162; 벧전 3:17; 단 11:32b; 사 66:2; 시 3:5-8; 롬 8:31; 시 2:11; 사 9:3)
먼저 시인은 161절에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161).” 상황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시인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벧전 3:17). 시인을 핍박하는 자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고관들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쓴 시라면, 아마 그는 권력자요 왕인 사울로 인하여 도망을 다니던 상황이거나,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요단강을 건너 도망하던 상황을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두려움이 삼킬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주의 말씀만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단 11:32b).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마음이 가난하고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떠는 사람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이사야 66:2).” 시인의 앞에는 핍박하고 잡아먹으려는 고관들이 있지만, 믿음의 눈을 열어 시인은 크신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펄전의 말입니다. “만일 더 큰 두려움이 작은 두려움을 몰아내지 않았다면 그는 방백들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시인이 이 두려움의 상황에서 취한 선택은 더 크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그 상황이 주는 두려움을 이긴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두려움의 상황에 처한 성도들이 취하는 믿음의 방식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상황 속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거대 권력으로 인한 두려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시를 생각해 보십시오(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3절).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를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 아멘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날 때, 이 시를 썼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편 3:5–8).”
1세기 로마 제국의 권력 앞에서 살았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로마서 8:31).” 이것이 언제나 두려움의 상황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이 그 상황을 이기는 방식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상황이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62절에서 시인은 승리의 기쁨을 회복하고 누립니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162).” 161절에서는 주의 말씀을 두려워한다고 했고, 162절에서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같은 대상을 향한 두려워함과 즐거움이 공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를 경험하는 사람의 고백이라고 스펄전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려움(경외감)은 노예의 두려움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으로 느끼는 외경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한히 선하시기에 시인은 그 약속을 의지하여 모든 상황을 넘어설 수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다윗은 시편 2편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편 2:11).”
그런데 이 기쁨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탈취물을 얻은 것과 같은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현재의 삶에서는 패배를 당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미 승리한 사람의 기쁨을 시인은 누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믿음으로 장래의 은혜를 바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날에 올 기쁨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이사야 9:3).”
이 즐거움은 분명히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믿음을 통해 신자들에게는 현재의 실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동기를 부여하고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불태우기 어렵고, 순종도 어렵습니다. 이 기쁨이 신자의 삶의 연료처럼 그 안에서 거룩한 불을 태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할 때, 장래의 은혜는 폭포수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쏟아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경험하셨습니까? 어느 날 곤고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었을 때, 자신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경험은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놀랍고 복된 체험인 것입니다. 경외함과 기쁨! 이 두 가지 감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신자의 마땅한 정서입니다.


2. 사랑과 찬송 (163-164)
두려운 상황에서 기쁨을 회복한 시인에게 이제 사랑이 회복됩니다.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163).”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즐거워하게 되면, 모든 거짓을 미워할 힘이 생깁니다. 거룩한 정서가 그 안에 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있는 유혹과 싸워 이길 힘이 생깁니다. 따라서 영적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신자들은 죄와 싸워 이길 힘도 그만큼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거짓을 미워해야 할 만큼 미워할 정서적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경외하는 말씀을 사랑합니다. 시인은 이 짧은 본문에서 세번이나 사랑을 표현합니다(163,165,167). 시인 안에서 거룩한 정서가 강하게 살아나며, 이로써 그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자, 시인의 심령 속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열망이 강하게 끓어오릅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64).” 찬송이 회복된 것입니다. 상황에 압도당하고 눌려 있을 때, 하나님을 찬송하고픈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고관들의 핍박 아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일곱 번은 온전하게 항상 종일 찬송한다는 말이고, 아무리 찬송을 드려도 그 마음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무엇을 찬송합니까?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찬송합니다. 오래 전 미국 복음주의 잡지 〈Christianity Today〉에서 읽은 인터뷰 기사가 생각납니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현대 찬송 작가요 가수인 Keith & Kristyn Getty 부부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찬송은 교리를 노래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교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복음—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시인이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찬송한다고 말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은 찬송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평안과 소망 (165-166; 시 29:11; 사 26:3; 살후 2:9-10; 요 14:27; 롬 5:5)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누리는 샬롬의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한 샬롬을 경험한다고 말하지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165).” 평안이 회복됩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면서 평안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세상과 육신과 사탄은 교만과 욕정, 탐욕과 안일함,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분노, 염려와 온갖 수단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인 자신이 현재에 경험하는 바를 표현한 것입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이 ‘큰 평안’ 안에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이 다 응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명목상의 신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또한 주의 말씀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도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신자의 정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과 특권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큰 평안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들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편 29:11).”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이사야 26:3).”
시인은 이어서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져야 할 십자가가 있고 우리를 낮추는 불시험들이 있으며,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에도 불구하고 큰 평안이 있을 뿐 아니라, 그 고난과 어려움이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언제나 흔들리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성장하지 않으며, 입을 열면 불평을 일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고난이 오면 그것이 장애물이 되어 넘어져 일어서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 법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데살로니가후서 2:9–10).”
여러분이 어떤 교회에 속했는가가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이제 시인은 소망을 회복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166).” 여기서 ‘주의 구원을 바라며’라는 말이 소망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신약 성도들에게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의 충만함,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만이 우리 구원의 확신의 오직 유일한 기반이라는 말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자신의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확신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있고, 그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들에 있는 것입니다. 왜 신자들이 확신을 가지지 못할까요? 그 말씀, 그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고 살며 그 약속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소망의 확실함을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 때문에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 5:5).”


4. 순종 (167-168)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심령이 경험하는 큰 평안은 소망의 씨앗이 되고 순종의 동기가 됩니다. 167-168절입니다.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167–168).”
주의 증거들을 지켰다고 두 번 말합니다. 마지못한 순종이 아닙니다. 온 마음으로 시인은 지키기를, 순종하기를 열망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 말씀을 경외하고 즐거워하며, 그로써 사랑하고 찬송하게 되면, 또한 그 안에서 큰 평안과 소망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그의 말씀이 우리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한, 마땅히 해야 할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정직히 하나님께 전념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거듭난 참 신자의 거룩한 성향입니다.
168절에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나이다’라는 고백은 칼빈이 평생 자기 모토로 삼았던 코람 데오(Coram Deo)를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행위가 주 앞에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다시 이 두려움은 즐거움을 만나 온전한 정서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모든 죄악이 받아야 할 형벌과 저주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하게 해결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5. 교훈과 적용
놀랍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복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고난이 없는 인생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 것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도 이 땅에서는 고난을 겪고, 때로는 하나님이 계시면 네 삶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약속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두려워 떨며 그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돌보시고, 그들 안에 사랑과 찬송을, 큰 평안과 소망을, 그리고 순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요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 일곱 번씩이라도 찬송하기를 갈망하십니까? 고난의 한 가운데서도 큰 평안을 경험하십니까? 주의 구원을 바라기에 소망 중에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이 확실한 말씀 속에서 보장해주신 은혜와 특권, 이 복락을 놓치지 마십시다. 이 은혜를 누리고 살아갑시다. 장래의 은혜가 이 모든 말씀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오늘 누리는 은혜가 됨을 경험하며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장래의 은혜와 영광을 맛보게 하는 열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