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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8). 의로운 말씀이 나를 만족시키네

시편 119:137-144, 민수기 23:19, 로마서 8:1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3-01

말씀내용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옳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옳고 그 말씀은 진리라고 인정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거나 그 말씀은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인격과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인 시편 119편의 18연(137-144절)은 ‘옳다’ 그리고 ‘의롭다’는 것이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그 말씀이 옳다는 것입니다. 18연의 처음과 마지막 절이 그것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137,144).”
히브리어로 ‘의롭다, 올바르다’는 말은 차딕(צַדִּיק)이고, ‘공의, 의’는 체데크(צֶ֫דֶק)인데, 그 첫 자가 히브리어 18번째 알파벳인 차데(צ)입니다. 18연의 8절은 모두 차데(צ)로 시작합니다.


1.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그 말씀도 의롭다 (137-138)
18연의 요점은 137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137).” 이 명제를 인정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 많이 있겠지만 이 사실로 인해 마음에 감동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칼빈도 16세기 제네바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던 바 있으니, 21세기는 오죽하겠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의로움과 지혜와 정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며, 그 개념들이 친숙하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할 때 그저 관념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격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를 구분해서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의 판단, 주의 말씀이 옳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격과 그 말씀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힙니다. 인격과 말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인격을 신뢰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말도 신뢰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의 의로움은 완전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옳음도 완전합니다. 이점에서 신자들은 의로움, 정의, 옳음의 절대 기준을 성경에서 찾고 성경에서 그 기준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의롭고 정의로운 것인지를 알기를 원한다면, 의롭게 살기를 바란다면 성경으로 들어가서 성경을 살피고 연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동번역은 137-138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야훼여, 당신은 공정하시며 당신의 결정은 언제나 옳사옵니다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137-138).” 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과 세상을 섭리하시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인생 여정을 인도하심에 대한 모든 결정은 언제나 의롭고 옳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결정과 판단도 신실합니다. 하나님은 변덕스럽거나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고 행동하시거나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시인의 이 고백에 온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없다고 느끼실지도 모릅니다. “잠깐만요!”라고 하고 싶거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대신 우리를 위로합니다. 왜 그럴까요? 뒤에서 이 문제를 다시 다루겠습니다.


2. 주의 말씀에 대한 성도의 정서 (139-140)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그 말씀이 옳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인식하는 성도에게 이런 고통이 있습니다. 139절입니다.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139).”
열정이 나를 삼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영혼이 소멸되고 파괴된다는 말입니다. 시인의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시인의 마음에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살아가며 그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대적들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었고 유다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가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으며 자기 기준대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런 모습을 찾기 위해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너무나 흔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분노는 조금 다르게 작동합니다. 열정이 자신을 삼킨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과 인격이 무시당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 대한 질투심이 불타오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기에 시인의 고통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의 자기 중심성을 하나님 중심성으로 변화시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이런 변화를 경험합니다. 자기 이름에 대한 무시나 자기 인격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무시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모독 때문에 심령이 상합니다. 이것이 시인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인간들에게서 당한 모든 악과 모든 불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짓밟히고 잊혀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 그를 괴롭히거나 슬프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되고 그의 존엄이 훼손되는 것을 볼 때 그것으로 괴로워하고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재앙보다 더욱 번민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히 하나님의 존엄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보다 비할 데 없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을 뿐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찰스 브리지스의 말도 들어보십시오. “이런 고통과 슬픔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평가에 비례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여기는가는 여실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고통을 경험합니까? 브리지스의 말을 좀 더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요, 은택을 베푸시는 분으로 여기고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모독당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마치 우리의 평판이 손상되는 것 같이 예민해질 것입니다. 그런 경우 서슴없이 끼어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 하는 그 비방을 자기가 대신 막아내려 할 것입니다.”
때로는 교리적으로나 행실로나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영혼을 향해 분노하거나 거절감을 표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할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대응하기 보다 그 영혼을 놓고 영적 씨름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40절이 바로 그런 신자의 정서를 이어서 보여줍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140).” 우리는 18세기 아메리칸 인디언의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서 이런 고백을 만납니다. "오, 주님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내 영혼이 거룩할 수만 있다면! 오. 그리스도께서 순수하신 것 같이 내 영혼도 순수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내 영혼도 완전하여질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책인 성경 속에 들어있는 가장 달콤한 주님의 명령들이 모든 것을 다 합축하 고있다는 느낌을 가지노라."
이 거룩한 정서를 이해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이 순결함과 거룩함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하고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영혼을 움직여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결함과 거룩함에 감동할 수 없고 그것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고 참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의로운 말씀의 순결함을 경험하고 그 말씀 안에서 만족하며 그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감동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이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주의 의로운 말씀 안에서 만족함을 경험하기까지는,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진정으로 누릴 수 없고, 형제들과의 참되고 신령한 교제를 가질 수 없으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주의 영광을 위해 살고 교회의 덕을 끼칠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은혜가 먼저입니다. 은혜 없는 기도, 은혜 없는 섬김은 도리어 우리 영혼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주의 말씀이 우리 영혼을 만족하게 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말입니다.


3. 즐거움이 되는 주의 말씀 (141-143; 민 23:19; 계 21:4; 22:5; 행 5:41; 롬 8:18; 고후 4:17)
시인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주의 의로운 말씀은 자기의 만족이 될 뿐 아니라 고난 중에도 즐거움이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인의 마음은 그 말씀 때문에 즐겁고 기쁩니다.
141절입니다.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141).” 시인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고 현실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미천하고 멸시를 당합니다. 시인은 자기 처지와 신세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처지는 낮고 비천해도 대적들처럼 주의 법도를 잊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나를 멸시하고. 무시해도 내 미래는 안전하다고 확신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바보라고 하고, 실패자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그 말들을 곱씹지 않습니다. 정말 힘이 있고 참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142절입니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142).”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만이 영원히 유효한 판결이며 참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말은 잊어버려도 되지만,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곱씹어 묵상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판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참되고 영원히 옳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라는 사실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복음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신자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쳐야 마땅합니다.
시인은 ‘주의 의는 영원한 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좋다고 말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우리의 형편이 좋으나 나쁘나 언제나 주의 말씀은 옳고 참되다고 말하고, 그 말씀 안에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듣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합니다. 대기업 이사들도 거짓말을 할 것입니다. 기업체의 직원들도 거짓말을 하겠지요. 그리고 많은 남편과 아내들이 서로 거짓말을 합니다. 유튜브에는 거짓말이 넘쳐납니다. 세상은 거짓말로 가득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참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수기 23:19).” 참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비록 환난과 우환이 미친다도 할지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라고 시인은 고백할 수 있습니다(143). 우리말성경은 143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고난과 번민이 나를 사로잡아도 주의 계명은 내 기쁨입니다(143).”
인생에서 고난과 번민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에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암울한 중에도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이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장래의 은혜를 보는 눈이 생겼기 때문이 아닙니까? 믿음은 장래의 은혜를 보게하는 눈이며 창이 아닙니까? 우리는 더 이상 사망과 애통과 고통이 다시 있지 않은(계 21:4), 영원한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계 22:5). 믿음은 이 변하지 않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게 하고, 환난과 우환 속에서도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 시험대를 통과하면서 우리의 믿음은 그 참됨을 우리 자신에게 입증하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의 말입니다. “고난의 훈련은 온 세상의 부요와 존귀 전체 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 이런 가운데 믿음으로 인내하면 평안하게 탐닉에 빠져 사눈 것 보다 하나님을 더 존귀하게 해드리고 우리 자신에게 더 큰 유익이 된다.” 우리는 이 말을 깊이 그리고 정직하게 곱씹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비록 육신의 위안을 누리지 못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그 말씀이 자신의 즐거움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육신의 위안을 누리지 못할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상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롭고 신실하시고 그 말씀은 언제나 참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의 시간에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그 십자가는 쓴 맛이 아니라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공회에 잡혀 채찍질을 당하고 나오던 사도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사도행전 5:41).”그들이 아프지 않았거나 견딜 만한 고통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채찍질의 고통 보다 더 큰 희열이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 천로역정을 마치게 될 것이고, 천성문에 이를 것입니다. 하늘에 당도하게 되는 첫 순간에 우리는 지상에서 주를 위해 겪은 모든 고난에 대한 보상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은 영원히 지속될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17).”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고백입니까? 시인은 환난과 우환 속에서 이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주의 의로운 말씀 속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런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진리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을 맛보기를, 이것을 경험하기를 구하십시오.


4. 의로운 말씀이 나를 만족시키네 (144)
끝으로 시인은 14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144).” 137절에서 말한 것을 다시 말한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당신의 언약은 언제나 공정하시니 그것을 깨우쳐주시고 이 몸을 살게 하소서(144).”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에 대한 시인의 믿음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우시고 그 말씀은 영원히 의롭습니다. 비록 현재의 고통 때문에 눈물이 마르지 않지만, 그 눈물에는 미래의 기쁨에 대한 눈물이 섞여 흐르는 것입니다. 주의 의로운 말씀이 내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우쳐주시기를, 그래서 자신의 몸을 살게 하시기를 시인은 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의로우며 참된지, 그리고 그 의로운 말씀이 우리를 얼마나 만족하게 하는지, 환난 중에도 그 말씀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는 것을 맛보고 살아가기를 구합시다.
우리가 만일 이 시인의 고백에 마음을 함께 한다면, 우리는 시인이 걸어가는 그 길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며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고후 5:7). 우리 인생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여정을 인도하시는 발자취를 놓칠 때가 적지 않고, 그 길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조각들이 언젠가 맞춰지고 완벽하고 거대한 그림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J.R.R. 톨킨의 단편, [니글의 이파리]에서 니글이 하늘에 올라가서 보았던 그 완성된 그림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환난과 고난 속에서 겸손하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결말을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그 의로운 말씀으로 만족하며 그 말씀을 즐거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복된 은혜를 우리 인생 여정에서 더 많이, 더 깊이, 더 풍성하게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