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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7). 여호와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

시편 107:1-43, 시편 106:47, 로마서 8:35-3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4-03

말씀내용
오늘부터 시편의 마지막 부분인 제5권의 첫 시편인 107편으로 들어갑니다. 107편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찬양시로 추정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감격은 1945년 해방의 감격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이방 군대에게 약탈당하고 불타서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그런 폐허가 된 조국을 등지고 쇠사슬에 매여 광야를 지나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보낸 시간이 대략 50년 입니다.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독립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크신 섭리 가운데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유대인들을 옛 고토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430년의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억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바랄 수 없는 중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런 사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구원 역사가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험난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그림들입니다.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107편은 그들이 불렀던 감사 찬송의 내용입니다. 모든 구속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선포합니다(1-3). 그들이 감사의 찬송을 드릴 이유는 명백한데 그것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경험한 네 가지 이야기로 설명됩니다(4-32).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곤경 가운데 살아왔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곤경 속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건져주셨는지를 말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녀 세대에게 교훈을 주어 그들이 깨닫기를 원합니다(33-43).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1. 감사하라 (1-3; 106:47)
먼저 1-3절은 도입부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선언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이 구절은 전형적인 감사의 찬양을 보여주는데, 감사하는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그의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이유가 있다면, 2-3절에서 말하는 바, 하나님의 구원 역사 때문입니다. 속량했다는 말은 바벨론 제국에서 그들을 건져 내셨다는 뜻이고,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백성을 사방에서 모으셨습니다. 사실, 이 고백은 106:47에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이시고”라고 한 기도의 응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은 유대인의 구원 역사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감사의 노래는 우리 자신의 감사의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녀들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영원한 인자하심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감사는 감정을 언제나 수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아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감사가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에 감사가 없는데도 그 마음이 편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많은 찬송시를 쓴 윌리엄 카우퍼는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제가 가진 가장 큰 안타까움은 / 제 사랑이 연약하고 희미하다는 것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고 경배하오니 / 오,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은 이토록 중요한 본질인 것입니다.
2절은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이같이 말하는 것’은 신자의 삶에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해야만 합니다. NIV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Let the redeemed of the LORD tell their story(여호와의 구속 받은 자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말하게 하라).” NLT의 번역입니다. “Has the LORD redeemed you? Then speak out!(여호와께서 너희를 구속하셨는가? 그렇다면 외쳐 말하라!)”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다음 세대들에게 말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부모의 세대로부터 자녀의 세대로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지고 전수되는 것입니다.


2. 감사할 이유(4-32)
4-32절은 찬송할 이유입니다. 이것이 구속 받은 자들이 들려주는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네 이야기가 들려지는데, 이것은 모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에서 실제로 겪은 내용들에 기반한 고백이고, 우리에게는 인생을 살면서 겪는 다양한 상황들을 보여주는 묘사들입니다. 첫째는 길을 잃고 거주할 성읍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상황을(4-9), 둘째는 쇠사슬에 매이고 감옥에 갇힌 상황을(10-16), 세번째는 병들어 죽게 된 상황을(17-22), 끝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중에 일어난 광풍 앞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상황을(23-32)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네 번의 상황에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6,13,19,28절은 자구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근심 중에 부르짖으매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는 응답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8,15,21,31절에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는 구절이 네 번 반복됩니다.
이 반복되는 구절들은 시인이 말하고 싶은 강조점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고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이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다양한 인종, 민족과 국가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 되게 하는 고백이 아닙니까?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이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고 이렇게 썼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요한계시록 7:9-10).” 이제 그 각각의 이야기들을 들어보지요.


A.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는 인생 (4-9)
먼저 광야에서 길을 잃어 방황하면서 거주할 성읍을 찾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4-9). 목표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4절에서 ‘광야 사막 길’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 대한 은유입니다. 방황한다는 말은 목적지 없이 여행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왔고 얼마나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냥 걷고 또 걷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으며 완전히 지쳐 버렸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어느 새 중년이 되었습니다.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더 걸어가야 할 의욕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십니다(6). 뿐만 아니라, 바른 길로 이끌어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습니다(7).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베푸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라고 고백합니다(8). 그리고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결론을 맺습니다(9).
폴 투르니에의 말대로, 우리 모두가 가장 갈망하는 것은 소속감, 즉 집, 거주할 성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 그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찾을 때까지 불안해합니다. 이런 갈망은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 만족을 주시고 주린 영혼을 좋을 것으로 채워 주시기까지는 무엇으로도 해소되지 않습니다. 인생이 가지는 불안함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실 때 비로소 사라질 겁니다.


B. 쇠사슬에 매인 인생 (10-16)
두번째 이야기는 쇠사슬에 매여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삶의 경험입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은 죽음과 같은 어둠, 인생에서 가장 짙은 어둠의 경험을 말할 것입니다(10).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보낸 수 십년의 시간은 결코 유쾌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11).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 자신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죄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12). 그들은 엎드러졌지만 도울 자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중에 이렇게 도울 자 하나 없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나 혼자 만의 감옥 같은 상황에 우리를 묶어 두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시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여 내셨습니다(13). 그들을 얽어 매고 있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을 얽어 매고 있는 죄의 권세를 생각하게 합니다. 죄는 속박하는 성질을 가지고 인간을 죄의 종으로 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속박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때로는 고통으로 우리를 낮추셔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시인은 다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합니다(15). 하나님께서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기 때문입니다(16). 이것은 아무리 고집센 인간이 그 마음을 놋문을 쇠빗장으로 닫아놓은 것처럼 했을지라도 그것을 깨뜨리고 꺾으시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지금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하는 우리 모두의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변함 없는 사랑만이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C. 병들어 죽게 된 인생 (17-22)
세번째 이야기는 질병으로 죽게 되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함으로 고난이 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17). 미련함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병을 얻고 모든 맛을 잃어 먹을 수도 없는 사망의 문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쯤 되자,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 내셨습니다(19). 20절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라는 표현은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거역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라고 고백합니다(21).


D. 바다를 항해하는 인생 (23-32)
네번째 이야기는 바다를 항해하는 중에 광풍을 만나 이리 저리 구르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바다 위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과거에 교회에서 함께 봉고차를 타고 이동할 때 목사님이 기도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승용차를 타고도 운전 전에 기도를 하셨습니다. 운전을 하고 목적지를 향해 갈 때,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고 나만 잘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구하는 태도였습니다. 나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것이 곧 변덕스러운 자연이 나를 통제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라고 말합니다(24-25). 바다는 너무나 변덕스럽게 느껴지지만 사실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만나게 될 때에도 유효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이 나를 삼키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우리가 겪는 고통을 26-27절은 실감나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26-27).” 지배력과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그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십니다(28). 그리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시고 물결도 잠재우십니다(29).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평온함으로 기뻐하는 중에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십니다(30).
우리가 바라는 항구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하는 순례자들입니다. 광야 사막 길을 지날 때도 있고 바다를 항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여정을 지나면서 우리는 천성에 점점 더 가까와집니다. 비록 광풍이 일고 바다 물결이 높이 일어도, 우리는 평온함과 기뻐하는 중에 천성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장이고 약속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라고 고백합니다(31).


3.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33-42; 롬 8:35-39)
우리 인생은 이처럼 위험천만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은 이런 험한 일을 결단코 겪지 않고 푸른 초장만을 지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불안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삶은 우리 뜻대로 진행되지 않지만, 그리고 삶의 환경도 내 예상대로 풀리지 않을지라도,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실 자유와 권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시인은 먼저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33-34).”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들은 모든 것이 잘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단 한 순간에라도 모든 것을 뒤집어 놓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반대로도 일하십니다.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주린 자들로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35-38).”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들과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에게는 비록 많은 압박과 재난과 우환이 있을지라도(39) 그것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중단시킬 수는 없습니다(롬 8:35-39). 이렇게 사람의 운명을 뒤집으시는 하나님은 마침내 자기 백성을 기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40-42).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42).”


4. 지켜보고 깨달아라 (43; 롬 5:8; 계 21:1)
107편의 결론은 43절입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지혜로운 자는 이 모든 일들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고백이지만, 또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천성에 이르는 길은 아버지의 변함 없는 사랑 가운데 오르막과 내리막을 통과하는 길이지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증된 것을 압니다(롬 5:8). 우리가 느끼는 것은 우리의 상황과 경험에 따라 날마다 바뀔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주림, 십자가의 어둠, 죽음에 이를 질병,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 친히 겪으심으로써 그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 아래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합니다. 비록 광야 사막 길을 지나고, 사슬에 매여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경험도 하고, 죽을 병으로 고생을 하며,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부활의 몸을 입고 우리가 바라는 천성에 이를 것이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요한계시록 21:1).”
그러므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위험에서 또는 얼마나 심각한 위험에서 건짐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우리 인생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우리가 그 선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고 확인한다면,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우리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