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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과 역설

고린도후서 13:4, 고린도후서 12:9-10, 고린도후서 4:8-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3-31

말씀내용
지난 주일,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주제를 상고한 것에 이어, 오늘 부활주일에도 저는 사도행전 강해를 잠시 멈추고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주제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세상적 기준의 자랑으로 가득한 교회가 된 것은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멀리 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번째 편지를 ‘십자가의 도’에 대한 주제로 시작한 것을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봅니다. 그러나 사도의 논리는 일관되고 정연합니다. 그는 두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는 13:4에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도를 말하는데, 특별히 부활의 관점에서 십자가의 도를 말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1. 대반전: 예수님의 부활 (행 1:9; 마 17:23; 20:19; 요 20:25; 2:22; 고전 15:20; 히 2:14-15; 살전 4:13; 고전 15:58; 히 11:6; 욥 42:5-6)
예수님께서 극한의 수치와 비참함을 한 몸에 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무력하게 죽는 모습을 요한은 보았고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몇 여인들이 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어딘가로 숨었지만,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뿐 아니라 온 유다와 갈릴리까지도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 특히 제자들은 망연자실하여 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몰려오는 슬픔과 두려움, 허탈함, 어떤 말로도 그들의 상태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상태를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반응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대반전의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극단적인 수치와 비참을 짊어지고 무력하게 못 박혀 죽으신 분이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40일이 지나서 그는 사람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려 지셨습니다(행 1:9).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만 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부활 사건이 없다면, 사도행전도 없고 서신서들도 없으며, 우리의 믿음도 없고 교회도, 기독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면 우리는 사도들의 변화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허탈함은 충만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탁월한 성도들이 가졌던 부활에 대한 소망들을 어렴풋이 보기는 하지만, 부활은 구약성경의 보편적 가르침이거나 보편적 신앙의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부활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어도(마 17:23; 20:19)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단 한 사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부활에 대한 기대를 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그들은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한 도마의 태도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요 20:25).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야말로 대반전의 사건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 그들은 드디어 주님이 하셨던 말씀들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한복음 2:22).”는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대반전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의 대반전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고전 15:20), 우리가 장차 죽음을 넘어 부활할 것에 대한 소망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기’에(히 2:14) 신자는 자신이 죽음에게 정복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히 2:15). 그리고 주 안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대할 때, 슬퍼하지만 절망하지는 않습니다(살전 4:13).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을 섬겼던 모든 일들이 헛된 일들이 되지 않을 것이며(고전 15:58), 부활의 날에 우리에게 상으로 갚아 주실 하나님이 계심을 기대합니다(히 11:6).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품었던 모든 의문과 질문들이 그 부활의 날에 주님을 뵙게 될 때, 완전하게 응답될 것을 우리는 기대합니다(욥 42:5-6).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대반전의 사건이 되었듯이, 우리에게도 대반전의 날이 올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압니다.


2. 질문: “신자의 현재 삶에서 부활의 능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요 20:29)
여기까지는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씀일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그런 대반전이 올 것을 압니다. 그런데 날마다 살아가는 제 삶은 이렇게 버거운데 오늘 내 삶에 예수님의 부활과 그 능력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경험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된 자들”입니다(요 20:29). 이 복됨은 어떻게 우리의 날마다의 삶에서 작동합니까?


A. 고린도의 거짓 교사들의 답변 (빌 3:18)
이 질문에 대한 고린도 교회에 있던 거짓 교사들의 답변을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번영 복음이 말하는 전형적 답변을 말했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죄의 결과인 슬픔과 가난과 질병과 구질구질한 모든 것들을 뒤로 날려 보내고, 이제는 부활의 기쁨과 부요함과 건강함과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답변입니다. 그들은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다 지고 가셨기에 더 이상 우리에게 머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답변은 1세기 고린도의 문화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도 적합한 메시지였습니다.
주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한 고린도는 1세기에 이미 그리스-로마 문화를 선도하는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종교의 중심에는 신이 강함을 보임으로써 자기의 추종자들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신은 자비와 관대함이 아니라 힘으로만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 사회를 지배하는 그리스-로마 문화는 힘과 권력과 강함을 추구하고 숭배하는 문화였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나라의 지배적 문화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힘과 강함이라는 가치에 한정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하지만, 실제로 고린도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문화적 가치들은 이외에도, 부와 스포츠, 인상적 연설과 성적 방종에 이르렀습니다. 자료들을 읽어보면 이 고대 도시는 21세기의 세계 특별히 한국과 얼마나 닮은 꼴인지 모릅니다. 고대 아테네의 희극 작가였던 아리스토파네스(주전 450-385)는 ‘코린티아제스타이(고린도화하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음행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전한 복음은 이런 기존의 가치들을 모두 뒤집어 엎는 것이었고, 그런 까닭에 이런 문화적 영향력 아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이런 가치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아니 그 가치들을 모두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거짓 복음을 전했을 때 고린도 사람들은 크게 호응을 하게 되면서 바울의 사도성 마저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부와 권력과 성공과 건강과 세상에서의 만족을 약속하는 번영의 복음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독교 복음에 상응하는 삶의 태도를 버린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다시 복음, 즉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지난 주일 고린도전서 1장에서 그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벌거벗긴 채 피투성이로 죽어간 죄수를 신으로 섬기는 기독교 복음은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고린도가 추구하는 문화적 가치들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부와 성공과 권력과 같은 것들인 한,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로 밖에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빌 3:18). 부활은 분명히 대반전의 사건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대반전, 그리고 언젠가 우리에게도 일어난 미래의 대반전을 믿어 의심하지 않지만, 오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신자들의 삶에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 아니 성경의 답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B. 바울의 답변: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이다 (빌 1:6; 고후 1:8-9; 3:1-6; 4:7-12; 갈 2:20; 빌 3:10; 고후 12:1-10)
오늘 본문이 이 질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답변입니다. 그리고 그의 답변은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삶은 한 마디로 역설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린도후서 13:4).”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십자가, 고난, 고통, 슬픔, 죽음과 같은 것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라고 우리의 삶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함과 무력함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바는 우리가 인생에서는 이렇게 약함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장차 부활의 날이 오면 우리는 영광스럽게 살아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전체를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종말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마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언젠가 마칠 것을 보장하는 증거입니다(빌 1:6). 그렇다면 이미 시작된 그 일을 우리는 인생에서 어떻게 경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답은 ‘약함을 통해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역설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죽음을 통한 생명, 고통을 통한 위로, 약함을 통한 강함을 거듭 말하면서 고린도의 세속주의의 근원을 뿌리 뽑고 싶어 합니다.
바울 사도는 확신은 낙심을 통해 주어지며(1:8-9), 만족은 결핍과 부족을 통해서 주어지고(3:1-6),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다고(4:7-12; 갈 2:20; 빌 3:10; 고후 4:12) 말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기쁨이 주어지고(7:4-7), 가난을 통해서 풍성함이 주어집니다(8:1-2).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약함을 통한 강함을 말합니다(12;1-10). 이 약함을 통한 강함은 우리 안에서 시작된 종말의 영광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다는 사실을 비교합니다. 이 약함 안에서의 연합이, 지금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셔서 강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로 묶어준다고 말합니다. 장차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입겠지만, 지금은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그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역설이고,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3. 날마다 약함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고후 4:8-12)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심지어 부활 신앙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고통과 슬픔, 약함과 패배가 없는 삶이 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버거운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고통과 슬픔 속에 던져지고 때로는 약함과 무력감에 처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도대체 믿음이 무슨 도움이 되는데?”라고 묻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는 자신의 영적 자녀와도 같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무력해 보이기만 합니다. 바울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처럼 자신도 약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살아나셨고 살아계심과 같이, 자신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으로 고린도 사람들을 대하겠지만 이 약함을 통하여, 약함 때문에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하나님의 강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은 신자의 매일의 삶에서 겪고 살아가는 약함, 무력함,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잠깐 고린도후서 4:8-12을 읽어보지요.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린도후서 4:8–12).”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미래의 부활이라기 보다(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신자가 죽음의 한가운데서 맛보고 경험하는 부활의 능력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4:17 이하 5장으로 가면서 미래의 부활을 분명하게 다루는 것 같습니다.


4. 나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경험하는 조건 (고후 12:9-10)
이것을 바울은 12장에서 훨씬 더 실감나는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기를 3번이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가시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지만, 사도로서의 그의 치명적 약점이라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시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 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은 “내가 네게 족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은혜라고 표현하셨을까요? 바울이 하나님의 임재를 얻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고,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자격도 없음을 재차 확인시켜 주시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약함 속에서 힘을 나타낼 것이라는 겁니다. 바울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고 그 강하심을 경험하는 조건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기 위해서 바울이 할 수 있는 공헌은 약함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깁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두려워하고. 피하는 우리의 낮음과 무능은 바로 하나님이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경험하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9b–10).”


5. 교훈과 적용: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삶
우리가 바울의 이 고백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벌거벗겨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십자가 복음 앞에서 벌거벗겨짐을 경험합니다. 그 복음 앞에서 우리를 수식해주는 온갖 강함의 수단들이 다 벗겨지고 우리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적나라한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의 약하심은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의 자리가 됨으로써, 대반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벌거벗겨질 때, 세상의 강함의 모든 조건들은 우리에게서 벗겨집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자신의 약함을 직면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강함과 그 부활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어떻게 약함과 실패와 수치와 외로움과 두려움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앞에서 철저하게 무력함을 느끼는 순간, 슬픔과 허망함과 심지어 절망감을 느낍니다. 무력한 자신이 너무나 싫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순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날을 지날 때, 슬픔과 두려움이 영원할 것 같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무력감에 우는 시간입니다. 오늘 주님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약함의 순간에 하나님의 강함을 맛보고 경험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장래의 어떤 날에 우리가 누릴 부활의 사건 이전에, 우리가 신자로서 버거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맛보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 때, 우리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약함을 기뻐하고 심지어 자랑하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내 약함 안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고, 내 약함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함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약함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 수치와 두려움, 이 모든 것입니다. 언젠가 대반전의 날은 옵니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에도 우리는 복음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약함을 통해, 내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하고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무력하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신자인 우리는 늘 약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은혜와 복됨을 누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