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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18-31, 갈라디아서 3:13, 빌립보서 3:7-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3-24

말씀내용
여기서 바울의 논지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십자가의 도를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도’라고 표현한 것은 십자가의 설교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교회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바울 사도가 주목한 것은 자랑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전한 거짓 복음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복음이 고린도 사람들이 미친 영향은 그들의 자랑거리가 무엇인가로 드러났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그들의 부와 재물, 학식과 학벌, 소위 육체와 외모를 자랑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외적 조건들에 의해 나뉘어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이런 세속적 관점은 바울의 사도성 마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게 했습니다. 바울은 외적 조건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그 삶에 고난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랑하다라는 동사(καυχάομαι)가 신약 전체에서 32회 사용되는데 그중 25회가 고린도전후서에서(고전 5, 고후 20) 사용되었고 명사 형태로는 두 단어가 있는데(καύχησις, καύχημα) 총 22회 중 고린도전후서에서만(고전 4, 고후 9) 절반이 훨씬 넘는 13회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외적 조건들을 자랑하는 이런 태도는 고린도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는 복음에 상응하는 태도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심각하게 십자가의 도를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이것은 십자가의 설교가 소홀히 여겨진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1. 왜 우리는 십자가의 설교를 소홀히 여기는가?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왜 십자가의 도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을까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듣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면서 십자가의 도를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그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으로 간주되고(18), 소위 지혜롭고 총명하다는 이들을 무시한다고 말합니다(19-21).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표적을 추구하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 즉 걸림돌이고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23). 사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후서를 쓸 때, 표적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적 유대인들과 교양과 지혜를 추구하는 세속적 헬라인들 모두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을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적인 사람이든 세속적인 사람이든 그들 모두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 장면을 담아낼 수 있는 카메라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지요.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비록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생생하게 그 장면을 담아낸 사진을 교회의 강단벽이나 집의 거실에 걸어 두려고 했을까요? 아마 민망하고 부끄럽고 참혹해서 아무도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잘 생긴 서양 남자의 얼굴로 묘사된 예수님의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이런 종교적 상상력을 멈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순종, 그의 사명의 행사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십자가형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제자들은 그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께서 생전에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주장하셨던 내용들을 완전히 부정하고 뒤집는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 당연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한 채 동행하면서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누가복음 24:20–21a).”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주장하셨던 그 내용은 그가 십자가형을 받고 죽으셨기 때문에 성립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걸림돌)이 된 것은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랬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거리끼는 것이라는 말은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십자가에 못박히는 하나님의 아들을 결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십자가의 설교를 소홀히 여기는 첫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십자가의 도를 소홀히 여기는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신자가 동일시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와 수치의 죽음을 당하신 이유는 내가 그 자리에서 그 죽음을 죽었어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와 믿는 신자 사이의 동일시가 일어납니다. 십자가형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것은 심히 불편한 진실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듣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넘어 불쾌함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도는 모든 능력주의, 성공주의, 승리주의를 배격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선포되는 교회에서는, 이런 능력주의, 성공주의, 승리주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자랑의 문제는 결국 십자가의 도가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바울 사도는 진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왜 불쾌한지,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만 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더 큰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그처럼 특이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죽으셔야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해의 과정이 없다면, 기독교는 무능하고 무력한 값싼 은혜의 종교 이상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2.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는가? (고전 4:13; 신 25:3; 갈 3:13; 벧전 3:18; 롬 4:5)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죽음의 형태 중에서도 왜 굳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셔야 했는가?”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지만, 이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방법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중요하지만, 그 죽음의 방식도 중요합니다. 그 첫번째 답은, 예수님에 대한 처형 방법이 곧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거의 전적으로 인간 쓰레기들에게만 사용되었고 로마 시민에게는 절대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형은 노예들에게 가해진 가장 극단적 형태의 죽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참수당하여 잘린 머리가 쟁반 위에 놓여졌지만, 이 소름 끼치는 이미지도 십자가형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오명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우리의 소망이나 염원, 우리의 필요를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에게 투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죽으신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닌 자, 즉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고전 4:13)’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인본주의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수치 그 자체였습니다. 십자가형은 특별히 개인의 존엄에 대한 궁극적 모욕, 즉 창피를 주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최후의 처방으로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처형을 당하는 자가 어떤 수준에서도 인간 사회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치에 수치를 더하는 처형 방식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즉 체면 손상이 십자가형의 요체였습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체면을 손상하는 고통이다”라고 말한 수잔 손택(Susan Sontag)의 말은 십자가형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겠지만, 특별히 유대인에게 체면은 중요했습니다. 지금도 중동 문화는 신체에 깃든 예민한 개인적 명예 의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유대인에게 태형을 가할 때 40대로 한정하라고 하신 이유는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신 25:3). ‘경히 여긴다’는 말은 체면을 손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대중 앞에서 벌거벗겨진다는 사실이 특히 유대인에게는 십자가형의 핵심으로 여겨졌습니다. 본회퍼가 “십자가의 의미는 신체적 고통에만 있는 게 아니라 특히 거절과 수치에 놓여 있다”고 본 것은 옳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형제의 체면을 손상하는 것을 금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저주 받은 자로서 보편적 인간성의 흔적 조차 부정하기 위해 고안된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신학자 조엘 그린의 말입니다. “주권자가 나체로 인해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그를 가릴 수 있는 옷 하나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이 하늘의 빛이 그를 외면하고 날이 어두워진 이유다.”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십자가형의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그 어떤 처형 방식, 죽음의 방식도 죄 아래 있는 인간의 극한 상태에 상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창조자요 만 왕의 왕께서 십자가에서 정죄 받았고 무력해 지셨으며 인간성을 박탈당하셨습니다. 마치 짐승의 지위로 격하되어 살 가치가 없는 노예에게나 합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내어주어 죄의 종이 되셨고 율법의 정죄를 받고 죽음의 지배 아래 들어가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설명을 빌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율법대로 저주를 받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예수님께서 저주의 가장 참혹한 형태를 보여주는 십자가형의 죽음을 당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만족 또는 배상의 개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해결하려면 그 죄에 상응하는 가치를 가지는 처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동일한 가치로 배상이 이루어질 때에만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사람의 죄를 속량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히 9:12).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가 단지 죄인이라는 인식과 인정을 넘어, 우리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인이라고 해서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죄인이 아동 성폭행범 같이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서, 이렇게 크신 분이 인간의 범주에 들 수 없다고 판단한 사람에게나 주는 십자가형이라는 큰 대가를 치르는 일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속죄나 만족이 있을 수 없으며, 우리가 바로 이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베드로전서 3:18).” 주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단지 친구를 위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경건한 자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롬 4:5). 이 죽음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비유를 해야만 한다면, 고문을 당한 사람이 고문을 한 가해자를 위해서 죽고, 광주 항쟁에서 아들을 잃은 광주 시민이 전두환을 대신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의 죽음은 우리가 불경건한 자이고 불의한 자, 인간 쓰레기임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듣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면서 선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나의 구주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그 수치와 저주를 온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어야 하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모든 면에서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3. 십자가의 도는 자기 증명의 모든 수단을 무력화한다. (빌 3:7-9; 갈 6:14; 고전 1:23; 고후 13:4; 12:9; 갈 6:12-14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형의 죽음을 말할 때, 즉 십자가의 도를 말할 때, 우리 본성 안에 있는모든 자기 증명의 수단들은 무력화됩니다. 능력주의와 성공주의 그리고 승리주의가 설 자리가 없게 된다는 말이고, 우리의 외적 자랑의 조건들이 다 무색해 진다는 말입니다. 완전히 발가벗겨져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육체가 무엇을 자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울은 로마 시민이라는 큰 영예를 가지고 있었고, 당대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바리새인이라는 것 외에는 유대인으로서 자랑할 수 만한 것들을 꽤나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 그의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7–9).”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예외 없이 이런 버림의 과정을 경험합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28절에서 “세상의 천하고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천하고 멸시 받는 교인들, 주로 노예의 신분을 가진 교인들을 언급하려는 의도 뿐 아니라, 특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중의적 표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천하고 멸시 받는 것들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위 ‘있는 것들’을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도는 모든 세속적 가치들, 우리의 모든 외적 자랑거리들, 자기 증명의 모든 수단들을 무력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29).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 수치와 저주를 온 몸에 안고 벌거벗겨진 존재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인간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하는 인간 쓰레기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대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자들에게는 더 이상 육체를 따라 할 수 있는 자랑 거리들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의 죽음은 지혜와 강함 같은 세상의 가치들을 폐하여 버렸습니다(24-25). 그리고 예수님은 수치와 저주, 형벌과 대속의 십자가 죽음에 당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어 주셨습니다(30). 신자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부끄러운 십자가의 도를 도리어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라디아서 6:14).”고 하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형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그 십자가의 복음, 십자가의 도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주는 시금석이 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말한대로, 십자가야말로 모든 것을 시험하는 시금석인 것입니다. 본문 18절에서 쓴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겠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안다면, 더 이상 외적 조건들로 자랑의 소재를 삼을 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은혜를 잊어버리고 본성을 따라서 반응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겠지만, 신자는 다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31).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첫번째 편지를 시작하면서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23). 그리고 두번째 편지를 마치면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하면서(고후 13:4) 여기에 자신이 약함과 고난을 기뻐하고 심지어 자랑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고후 12:9). 바울 사도가 볼 때, 이것이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반응입니다. 육체 곧 외적 조건들로 자랑을 삼아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대신, 약함과 고난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거짓 복음에 속고 있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쓰는 편지를 마치면서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라디아서 6:12–14).”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자랑하던 모든 것들—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다는 의미는 나 자신이 그 수치와 저주를 온 몸으로 감당하며 죽었어야 하는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존재가 자신의 학위를, 재산을, 성공을 자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4. 교훈과 적용: 십자가의 복음이 없는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므로 만일 십자가의 도(설교)가 교회 강단에서 사라진다면, 우리는 적어도 교회의 교회됨을 부정하는 치명적인 두 가지 현상을 교회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A. 자랑
먼저는 자랑이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부와 재산, 학력과 학벌, 성취와 성공 등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성공의 기준들이 자기를 증명하는 자랑의 수단들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설교 되지 않는 강단에서는, 대신 번영의 복음, 즉 자신의 공로와 행위로 성공이라는 하나님의 복을 증명하는 율법주의라는 거짓 복음이 선포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진단했듯이, 십자가의 도가 설교 되지 않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괜찮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의 도를 알고, 그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B. 사랑
십자가의 도가 설교 되지 않을 때 일어나게 되는 또 하나 치명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실종되는 현상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복음이 만들어내는 사랑이 실현되거나 경험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십자가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마치 이미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것처럼 자신들을 십자가 너머에 위치시키거나, 고난이 그들 밖에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십자가 위에 위치시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다 지나간 것이고,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살아간다고 하면서, 더 이상의 고난은 없어야 하고 우리는 복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을 오해하게 되면, 고린도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사회적 기준과 잣대들에 의해서 자신들을 다른 형제들과 구별하는 일들을 빈번하게 행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애찬을 나누는 거룩한 자리에서조차, 고린도 교회의 부자들은 가난한 형제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로 여김을 받는 형제들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없었습니다(고전 11). 사회적으로, 성격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사귐은 있었지만,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과 사귐과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명한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쓴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형의 죽음을 통해서만 세상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조되는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을 보고 드러내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마무리: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리로! (고전 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전달하는 수단은 오직 십자가의 도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종종 우리의 본성을 불쾌하게 하고 우리의 자기의를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의 메시지, 이 십자가의 도는 초기 교회 시절에 이방 세계 전역을 불태우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엄청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고전 2:2)”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리에서 그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리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 모든 것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확인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