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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5).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시편 105:1-45, 역대상 16:8-22, 히브리서 11:9-10, 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3-06

말씀내용
오늘 시편 105편 강해의 제목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을 향하여 기억하라는 명령도 한 번 나오지만(6절)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씀이 8절과 42절에 두 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고 할 때, 이것은 정적인 단어가 아니라 동적인 단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고 계시다가 다시 기억을 떠올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동을 시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성경적 용례를 안다면, 가령, 우리가 “하나님, 저를 기억해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저를 위하여 행동을 취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거나 ‘권고하신다’는 말씀을 읽을 때, 이 단어들은 동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강해의 제목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본래적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5편은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그리고 찬양하라고 촉구하는 찬송시입니다.


1. 105편의 전후 구조 (시 103-106)
먼저 105편의 전후 구조를 살펴보는 것도 105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103편과 104편은 짝을 이루는 시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지요? 103편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찬송한다면,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찬송하는 시편입니다. 두 시편 모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시 103:1,22; 104:1,35). 이와 같이 105편과 106편도 짝을 이루는 시편입니다. 105,106편은 시편 제4권의 끝을 장식하면서, 거룩한 역사의 두 대조적인 측면을 보여줍니다. 105편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찬송한다면, 106편은 신실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는 실패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결국 105편과 106편은 짝을 이루면서, 이스라엘의 거듭되는 죄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언약을 이루심으로써 구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106편은 105편의 배경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지 않는 신실하심이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드러내어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104편의 35절 끝에 붙어있는 ‘할렐루야’입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은 이 ‘할렐루야’를 105:1을 시작하는 단어로 붙였습니다. 그렇다면, 103편과 104편이 각각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로 시작하고 끝나듯, 105편과 106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마치는 두 편의 시가 됩니다(105:1,45; 106:1,48). 이렇게 짝을 이루는 두 쌍의 시편들로 시편 제4권은 마무리 됩니다.


2. 배경과 구조 (대상 16:8-22, 35-36)
이 시편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쓰여졌는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105편의 처음 열 다섯 절(1-15절)과 106편의 마지막 두 절(47-48절)은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날에 드린 감사의 찬송시와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그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1-15은 역대상 16:8-22과, 106:47-48은 역대상 16:35-36과 거의 같습니다. 105편이 이 상황에서 쓰여진 시편이라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다윗이 기쁨에 겨워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려고 지은 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묵상한 뒤에, 다윗은 그런 하나님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언약 백성의 성실하지 않음을 기억하며(시 106)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자비를 더욱 찬양하고 싶어합니다.
105편은 짧지 않은 시편입니다. 시인은 역사를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이적들을 열거하는데, 이 모든 시인의 기억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1-6절은 찬양하고 예배하라는 부름이고, 7-15절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즉 족장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16-23절은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24-36절은 애굽에 있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끝으로 37-45절은 광야에 있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3. 예배로의 부름 (1-6; 출 33; 19:6)
먼저 1-6절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과 당신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라고 명령합니다(1-2). 1-6절에 나오는 동사들은 거의 다 복수 명령형입니다. 그 동사들은 ‘감사하고 불러 아뢰며 알게 할지어다 노래하며 찬양하며 말할지어다 자랑하라 구할지어다 기억할지어다’입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다양한 예배의 요청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예배가 인간에게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것인지 일깨워줍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복음)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여 감사와 찬송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1-6절은 한 편의 설교의 기능을 합니다.
1-2절은 예배가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으로 끝날 수 없고, 세상을 향한 증언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노래하고 찬송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멈출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세상에 알리려고 할 것이고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세상에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이 충만한 예배는 세상을 향한 증거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점에서 시인은 예배의 수위성을 말합니다. 예배가 살아나면 증거도 살아납니다.
3절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고 하는데, 자랑한다는 말은 예배자가 찬양에 몰두하여 그것을 개인적 기쁨이나 자랑으로 표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려라, 그의 거룩한 이름을 높여라”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배자는 마음이 즐겁지 않을 수 없습니다. 4절에 의하면,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의 능력만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는 말이고,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동행과 그 임재를 더 원했던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출 33).
5-6절은 예배의 주체를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모든 육적, 영적 후손을 향한 명령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선택 받은 자들이기에(출 19:6), 그들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찬양하고 선포하고 노래하고 외치고 기뻐하고 기억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이 찬양해야 할 내용은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입니다(6).


4. 족장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7-15; 히 11:9-10,16; 창 12:3; 20:6-7)
7절부터는 본격적인 역사 회상입니다. 역사를 회상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하여 언약 백성의 신앙의 근거를 확증하고 격려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시인은 7-15절에서 족장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를 회상합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8절입니다.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8).”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당신의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여기서 언약을 명령하신 말씀이라고 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주도권과 권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은 서로 간의 흥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맺어집니다.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이기적인 목적으로 살게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위해 살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맺어지는 이 주도적 언약의 관계는 인간에게는 은혜로운 명령입니다.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의 내용은 9-11절에서 설명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9-11).”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맺으신 언약이고 맹세이며 율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인데, 그 내용은 땅과 관련이 됩니다.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합당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의 약속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브리서 11:9–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의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곧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것’임을 알았고 그것을 바라보고 사모했습니다(히 11:16). 만일 우리가 이 ‘영원한 언약’을 순전히 정치적 의미, 이 지리적 영토 소유권 증서로 이해한다면,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박해하고 쫓아내려고 하는 많은 유대인들의 실수에 동참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대로, 족장들의 가족을 보호하셨습니다. 창세기는 족장들의 무분별한 행동을 기록하고 있고 이런 행동들은 그들의 소명을 위태롭게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당신의 언약 백성인 족장들을 보호하시고 모든 위험에서 건지십니다. 그들은 본래 ‘사람 수가 적은’ 약하고 부족한 무리였지만(12)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 하나님께서는 어떤 권력자라도 자기 백성을 억압할 수 없게 하셨고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김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위태롭게 했던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창 20:1-18). 그때 하나님은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세기 20:6–7).” 하나님은 이렇게 족장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키셨고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신실하심을 보이셨습니다.


5.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16-23; 창 37:5-11; 40:1-23)
이어지는 16-23절은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데, 신실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놀랍게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16-19절에서 그 주어가 하나님이심을 통해 드러납니다. 16절에서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야곱의 가족이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앞서 애굽으로 파송하시는데, 그 방식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에베드(עֶ֫בֶד)’는, 중의적으로 사용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노예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롤프 제이콥슨). 그렇게 요셉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습니다(18). ‘몸’은 혼, 생명, 목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네페스(נֶ֫פֶשׁ)인데,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것은 단지 요셉의 육체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그의 전 존재가 결박 당한 것 같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19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결정적으로 보여줍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9).” 상반절을 문자대로 번역하면, ‘그의 말씀이 오기까지’이고, 그 의미는 ‘그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지만 요셉 자신의 꿈을 가리킨다고 데릭 키드너나 앨런 로스는 해석합니다. 부모와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내용의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창 37:5-11) 그리고 감옥에서 동료 죄수였던 바로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꾸었던 꿈에 대한 해석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창 40:1-23). 요셉이 꾸었던 꿈이나 바로의 신하들이 꾼 꿈에 대한 해석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의 형태로 나타났기에, 그것을 ‘그의 말씀’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19절 하반절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같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이나 바로의 신하들이 꾼 꿈 해석은 요셉에게 장래의 은혜에 대한 전망과 소망을 제시해줌으로써 요셉이 살 소망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고난에서 견디게 해주었고 요셉을 연단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롤프 제이콥슨은 19절에서 처음 ‘그의 말씀’은 요셉의 것이고 두번째 ‘그의 말씀’은 하나님께 속한다고 하면서, 여기에는 의도적 모호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20절에서는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했다”고 말합니다.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한 것인데” 사실, 시인은 이 통치자의 행동 배후에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행사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요셉은 애굽의 주관자가 되어 바로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되었고(21) 바로의 허락 하에 모든 신하를 다스리고 자신의 지혜로 애굽의 장로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22).
시인은 요셉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노예에서 총리로 수직 상승하는 기막힌 섭리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6. 애굽에 있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24-36; 출 11:1)
하나님은 그렇게 애굽으로 이주한 백성의 보호자가 되심으로써 당신의 신실하심을 계속 보여주십니다(24-36). 기근 중에 야곱의 가족은 애굽으로 들어가 함의 땅에 나그네가 됩니다(23). ‘나그네’는 고대인들이 사회의 안전망으로 여겼던 친족 책임망의 바깥에 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위험에 처한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크게 번성하여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지만, 대적들은 그의 백성을 미워하고 그들에게 교활하게 행하게도 하셨습니다(24-25). 데릭 키드너는 우리 주님께서 유다의 배반 조차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으로 보셨듯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시편의 관심사 중 하나라고 지적합니다. 이제 26-36절은 모세와 아론을 보내 권능을 베푸사 자기 백성을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애굽의 바로에게 주신 재앙들이 기록되는데, 재앙의 순서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 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단호하고 다재다능한 능력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동이 간결한 동사들로 표현됩니다. ‘보내시니(26), 보내사(28), 죽이셨도다(29), 말씀하시고(31,34), 내리시며(32), 치셨도다(33,36)’와 같은 동사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일들을 재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출 11;1), 시인은 이것들이 하나님의 설득과 경고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표적, 징조’라는 단어를 선호합니다(27). 표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증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7. 광야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37-45)
끝으로 출애굽의 과정과 광야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신실하셨는지를 시인은 보여줍니다(37-45). 여기서 시인이 언급하는 내용을 일일이 다 살필 수는 없으나, 42절은 중요합니다.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42).” 다시 시인은 신실하신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이유는 그가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십니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종 아브라함에게 행하시기 위하여 그 인생과 그 역사에 능동적 개입을 하십니다.


8. 교훈과 적용 (45, 1-4)
도널드 윌리엄스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족장들이 방황할 때 그들을 지켜 주셨고, 기근에 처한 이스라엘을 부양해 주셨으며, 그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을까?” 그 답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이삭에게 하신 맹세(9),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10)을 영원히 기억하셨기 때문이며(8),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42)입니다.” 족장들의 방황과 요셉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을 한 것은 지연과 패배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거룩한 약속과 자기 백성을 기억하고 계셨기에, 신실하시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은 때를 따라 그분의 방식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시편 105편에 대한 데릭 키드너의 얼마나 와 닿는 제목인지 모릅니다. Not one thing has failed.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일은 하나도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구절인 45절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신실하신 목적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45).” 역사 속에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쉼 없이 주권적 능력을 행사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거룩한 백성을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목적은 오늘 그 모든 은택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울립니다. 너희도 그를 기억하고 행동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를 예배할지어다!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1–4).” 그래서 105편은 가장 합당하게도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로 마칩니다. 우리도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