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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4). 여호와의 창조에 나타난 영광

시편 104:1-35, 욥기 38:4-7, 욥기 38:10-1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2-14

말씀내용
시편 104편은 103편과 함께 짝을 이루는 시입니다. 두 시편이 모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103편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한다면, 104편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합니다. 103편은 구속자 하나님을, 104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딕슨은 이 두 시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유익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위대함으로 인해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분은 택하신 자녀들에게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 일로 인해 찬양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창조의 일과 피조물에게 베푸신 일로도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104편은 창세기 1장의 복사판 또는 창세기 1장을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순서를 일일이 104편의 내용과 대조할 필요는 없겠지만, 데릭 키드너는 이렇게 두 장을 대비시키기도 했습니다.
첫째 날(창 1:3~5): 빛(시 104:2a)
둘째 날(창 1:6~8): “궁창”이 물을 나누다(시 104:2b~4)
셋째 날(창 1:9~10): 땅과 물이 구별됨(시 104:5~9; 추가 10~13?)
(창 1:11-13): 초목과 나무 (시 104:14-17; 추가 18?)
넷째 날(창 1:14~19): 시간을 지키는 빛들(시 104:19~23; 추가 24)
다섯째 날(창 1:20~23): 바다와 공중의 생물들(시 104:25~26; 바다만)
여섯째 날(창 1:24~28): 동물과 사람(시 104:21~24에서 예상됨)
사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창조의 날들을 제대로 썼는지를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순서 보다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존귀와 권위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며,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피조물과 인간은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창조세계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이 104편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바를 조나단 에드워즈 처럼 잘 표현해준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피조세계 전체의 행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에서 주장한 바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의 제목인 “여호와의 창조의 영광”도 그것을 요약한 말이고 할 수 있습니다.
104편의 본문으로 직접 들어가기 전에, 어떤 마음으로 이 시편을 읽어야 할지,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104편은 시작과 끝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부름이듯이, 기쁨과 환희, 환호와 탄성으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읽도록 가르침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말을 선뜻 이해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관련하여 새로운 관점과 마음을 얻을 것을 기대하셔도 좋겠습니다. 설교자가 아니라, 시편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그 일을 하시기를 구합니다.


1. 창조 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 (1-30)
저는 자세하게 본문을 살피기 보다는 흐름을 여러분이 놓치지 않도록 인도하려고 합니다. 1-30절까지는 창조세계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 창조 세계가 즐거워하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A. 첫째 날 (1-2a)
먼저 1-2a절은 창세기 1장에서 주로 첫째 날의 창조에 대한 내용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1-2a).” 하나님이 심히 위대하심을 찬양하라는 부름,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프롤로그입니다. 옷을 입었다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빛을 옷으로 삼으시고 존귀와 권위를 옷 입으심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피조물에게 알리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그의 광채로 온 세상에 빛을 비추실 때, 이것이 바로 그 안에 숨어 계시는 그가 우리에게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나시는 옷이다.” 구약 성경에서 옷을 입는다는 표현은 보통 그 사람의 속성을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입으신 빛은 성경에서 ‘거룩함, 이해, 기쁨 그리고 생명 자체’를 상징합니다. 여호와는 빛과 관련된 모든 것이 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B. 둘째 날(2b-4; 히 1:7)
이어지는 2b-4절은 창조의 둘째 날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2b-4).”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는 둘째 날 궁창을 만드신 일에 대한 시적 표현입니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보좌를(여기서 들보는 보좌를 의미합니다) 궁창 위의 물 위에 즉,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곳에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는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움직이는 보좌 수레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바람과 불꽃은 하나님의 사신 또는 수행 비서 입니다. 하나님은 구름을 타시고 바람과 불꽃(번개)을 사신으로 삼으시고 모든 창조세계와 모든 나라를 시찰하고 두루 행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히브리서 1:7).”라고 함으로써, 바람과 불꽃이 모두 천사들을 의인화한 표현이라고 해석합니다. 시인은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초월과 편재성 모두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C. 셋째 날(5-18; 욥 38:10-11; 요 5:17)
이제 5절부터는 주로 창조의 셋째 날을 묘사하는데 18절까지 지속됩니다. 특히 5-9절에서 시인은 창조 질서의 안정성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땅에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놓으셨습니다(5). 처음에는 물이 땅을 덮고 있었고 심지어 깊은 바다가 산들을 덮고 있었지만(6)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를 나누셨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7절에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여’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꾸짖으셨다고 하는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바다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반영합니다. 그들은 바다의 사람들 소위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언제나 물과 바다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홍수는 노아 때의 것과 같이 모든 것을 휩쓸어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꾸짖으셨다는 표현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의 경계가 정해졌고 물은 돌아와 땅을 덮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9). 9절의 표현은 욥기 38:10-11을 반영하는 듯 보입니다.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욥기 38:10–11).”
여기까지 시인은 대부분의 동사를 과거 시제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10절부터는 현재 시제가 주로 사용됩니다. 주제는 창조의 안정성에서 창조 세계를 돌보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관대한 공급으로 옮겨갑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이신론과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알려진 예화와 같이, 하나님은 시계가 저절로 잘 가도록 만들고 시계를 떠난 시계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1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의 위험한 성격은 사라지고 물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수단과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변합니다. 먼저 10-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10-12).” 비가 오지 않으면 메말라 버리곤 하는 강 바닥(와디)으로는 샘이 솟아 흐르게 하시고, 그 결과 각종 들짐승들과 들나귀들이 해갈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물은 하나님께 주시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는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지저귀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누각 보좌에서 산에 물을 부어 주심으로써 주님의 그 일은 땅을 만족하게 하여 결실하게 하십니다(13). 때를 따라 비를 주시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14-16절은 하나님께서 고대 근동 사람들의 세 가지 필수 요소들을 공급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는 물이 깨끗하지 않은 곳에서 매우 중요한 음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오일)은 햇빛에 종일 노출되어 피부가 금방 건조해지고 상하는 기후에서 필수품이었습니다. 세번째로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인간의 생존 조건입니다. 하나님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고 땅에서 수확하게 하십니다.
16절은 다시 물의 흡족함을 말하고 그 결과 여호와의 나무로 불리는 가장 큰 나무들 즉 레바논의 백향목들이 자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큰 나무에는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산양을 위해 높은 산을, 너구리를 위해 바위를 은신처로 제공하여 주십니다. 결국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창조 세계가 질서 가운데 돌아가고 유지되고 모든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이제도 일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 뿐 아니라, 섭리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문은 “하나님께서는 작정을 어떻게 이루십니까?”라고 묻고 “하나님께서는 작정을 창조와 섭리의 일로 이루십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시인은 이 두 가지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D. 넷째 날(19-23; 히 1:3)
19-23절은 창조의 넷째 날에 맞추어 하늘(천체)의 광명들을 묘사합니다. 1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19).” 천체의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심으로써 하나님은 주기를 만드셨습니다. 정한 때를 따라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기 위함입니다. 리처드 필립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시간과 계절의 일관성, 천체의 예상 가능한 안정적인 움직임을 자연의 가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질서 있게 운행하는 것과 태양 주위를 도는 궤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유지됩니다. 히브리서 1:3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시간 측정의 신뢰성으로 인해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특히 20-23절에서 시인은 밤과 낮의 주기를 말합니다. 밤은 동물들의 활동으로 가득 찬 시간입니다. 심지어 젊은 사자도 하나님께 먹이를 구하여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정글의 모든 짐승들을 먹이십니다. 그 짐승들은 밤에 그렇게 활동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 굴 속에 눕게 되고 그때 사람이 나와서 저녁까지 수고하여 일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밤을 주심으로써 사람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E. 삽입—탄성과 찬송(24)
여기까지 말하다가 시인은 24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에 탄성을 지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24).” 여러분도 이 시인의 탄성과 찬송에 공감하십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작품으로 볼수록 경이로움을 가지고 놀라게 되고, 놀랄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찬송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4절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묵상하던 시인이 감격하여 쏟아내는 탄성입니다. 그 일들이 얼마나 놀라운지, 얼마나 절묘하게 맞아 돌아가는지, 생명의 주기를 유지하는지를 찬양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걸작품들인 것입니다.
F. 다섯째 날(25-26)
25-26절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해당합니다. 본래 다섯째 날에 하나님은 바다의 생물들과 공중의 새들을 창조하셨지만, 여기서는 바다만을 언급합니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25-26).”시인은 크고 작은 바다 생물들이 무수히 있는 광대한 영역, 바다를 돌아봅니다. 특히 리워야단이라고 묘사된 무서운 괴물은 고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동물, 무서운 괴물인데, 종종 악어로도 번역이 됩니다. 시인은 이 바다 괴물을 등장시켜 이런 것들도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그것도 애완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2. 섭리의 영광(27-30)
앞에서 말하였듯이, 우리는 104편을 읽으면서 창조의 순서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섯째 날에 땅의 생물/동물들과 사람을 지으셨지만, 시인은 그 순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21-24절에서 이미 언급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시인은 27-30절에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영광을 묘사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의 공급자이시고 유지자이십니다. 27-28절은 긍정적인 언급입니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27-28)” 29절은 부정적 언급입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29).”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멈추시면(낯을 숨기시면) 모든 존재는 떨고, 하나님이 그들의 호흡을 거두시면 모든 존재는 죽어 먼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그 생명을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30절은 그것을 이렇게 확정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30).” 여기서 주의 ‘영’은 29절에 호흡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숨을 주시는 한,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창조하사’는 ‘다시 살아나게 하다/ 갱생하다’ 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3.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 세계를 기뻐하신다 (31-35)
마지막 다섯 절(31-35절)은 시인의 기도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 세계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31-32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그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을 만지신즉 연기가 나는도다(31-32).” 이것은 시인의 기도이지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그 모든 창조세계를 지금도 돌보시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토록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리처드 필립스의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분의 속성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땅이 우리의 기쁨을 위해 존재한다고 자기중심적으로 가정하는 반면, 시편 기자는 땅의 최우선 순위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어떻게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과 능력을 영화롭게 하는지를 보여 주면서 시편 기자는 이 영광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가장 열렬한 소망을 표현합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바로 일어날 일이라는 확신에 찬 주장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도 그러할 것입니다.””
33-34절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33-34).” 시인은 즐거워하면서 자신의 묵상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묵상하던 중 하나님께 대한 감정이 격앙되어 모든 정성으로 찬양을 드립니다. 시인은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하나님의 창조와 그 영광을 찬송합니다. 마지막 35절은 우리를 잠시 멈칫하게 합니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35).”라는 기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존재들이 없이 완전히 조화롭고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을 온전하게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 세계에서 완전한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정당합니다. 필립스의 말입니다. “죄인들이 땅에서 멸망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합당한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완전한 공의와 진노의 영광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104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로 시작하여 이 어구로 마칩니다. 그리고 시편 전체에서 처음으로 ‘할렐루야’가 외쳐집니다.


4. 교훈과 적용
이제 104편의 교훈을 적용적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A. 하나님의 창조를 기뻐하는 법(욥 38:4-7)
첫째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바라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또한 돌보시고 공급하시는 모든 면을 응시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여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장면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이 장엄한 장면을 존 파이퍼는 그의 책 『하나님의 기쁨』에서 욥기 38: 4-7을 인용하면서 놀랍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 본문을 읽어보지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기 38:4–7).”
7절에서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천사들은 물질로 된 존재가 아닌 영적 존재들이었기에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창조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관객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표현하신 것은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탄성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서, 하늘의 모든 천군천사들은 놀라고 또 놀라며 환호와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것은 7절에서 ‘기뻐 노래하며,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칼빈이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극장이라고 했을 때, 천사들은 그 극장의 최초의 관객이었습니다. 존 파이퍼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전혀 들어보지 못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의 특성을 지닌 물질을 존재하게 하셨을 때, 천사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모든 색과 물감을 모아 새로운 그림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완전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아들들의 반응은 기뻐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이 기쁨을 생각하며, 창조 세계인 자연을 응시합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그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해도 부족할 것이라고 느끼며 이 시를 노래합니다.
이런 새로운 시각은 죄인이 중생할 때 일어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회심 후에 느낀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늘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던 해, 달, 별, 들, 구름, 푸른 하늘, 풀, 꽃, 나무, 호수, 모든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지혜와 순결과 사랑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그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보기 위해서 구름과 하늘을 쳐다보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옛날에는 천둥이 치면 소스라치게 놀랐다. 천둥과 폭우에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그것을 즐긴다. 천둥치고 폭우가 내리는 첫 광경을 보고 하나님을 느꼈다. 나는 그럴 때에 구름을 보고, 번갯불 놀이를 구경하고, 하나님의 무섭고 장엄한 천둥 소리를 듣고 내 자신을 안정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 천둥은 종종 엄청나게 재미있다. 나의 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즐겁게 묵상하게 해 준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묵상 내용을 읊조리거나 노래로 내 생각을 독백 형식으로 말하는 것은 늘 자연스러운 일이다.”(이언 머레이, 『조나단 에드워즈:삶과 신앙』이레서원, p.87). 중생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이전의 것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한 신자들은 104편을 시인과 함께 같은 감정으로 부를 수 있게 됩니다.
B. 하나님의 새 창조를 보며 환호하고 탄성을 지르라 (고후 5:17)
두번째 적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쉽게도 그 천지 창조의 장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접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천사들이 보았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더 나은 관객이 될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무에서의 창조였지만, 죄인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구원 곧 새 창조는 악에서 선을 만들어 내시는 창조 행위이기에, 천지 창조와 비교할 수 없는 더 나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입니다(고후 5:17). 우리는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봅니다. 세례 때마다 그 일을 목격합니다. 아니, 세례 이전에도 우리 중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을 봅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천지 창조 때 천사들이 기쁨으로 소리쳤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놀라고 기뻐하며 소리치고 환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목격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C. 클라이드 킬비(Clyde Kilby)의 결심문
끝으로, 104편을 읽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을 신실한 그리스도인 영문학자이고 휫튼 대학의 교수였던 클라이드 킬비의 결심문 가운데 두 가지를 소개하며 설교를 맺겠습니다.
“나는 가끔 내가 어릴 때 가졌던 시각의 신선함을 뒤돌아보며 최소한 잠시 동안이라도,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말처럼, '순수 하고 맑은 표정과 경이감으로 꿈꾸는 눈을 가진 어린 아이' 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내 눈과 귀를 열 것이다. 매일 한 번 나는 나무나 꽃이나 구름이나 사람을 그저 쳐다볼 것이다. 나는 그들이 무엇인가를 묻는 데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며 그저 그들이 거기 있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루이스가 칭한 대로 그들의 "신적이고 마술적이며 두렵고 황홀한" 존재의 신비를 기쁘게 허락 할 것이다.” (존 파이퍼, 『하나님의 기쁨』은성출판사, pp.118,120).